80화. 그러나 꽃은 지기 마련(4)
설국의 왕.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를 걸어 준 저 스킬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그냥 ‘왕’이라고 하고, 양반이 가지고 있는 A급 스킬 중에서는 가장 좋아 보여서 걸어 본 거지.
다행히도 <[A, 숙련 불가] 설국의 왕>에게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스킬을 걸기를 잘한 것 같았다.
나와 양반의 주위로 눈보라가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윽…! 빌어먹을 양반 새끼가 같잖은 재주를……!”
그 기세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백정의 목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춥지가 않았다.
“후우.”
내뱉은 숨이 눈에 보일 정도로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는데 말이다.
“꼬마, 이거 네 짓이야?”
양반이 무엇을 묻는 것인지, 나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A, 숙련 불가] 설국의 왕>이 일시적으로 활성화됩니다.】
양반은 지금 나와 똑같은 메시지를 보고 있을 거다.
완전히 같지는 않겠구나?
양반의 눈에는 자신의 스킬이 A급에서 S급으로 올라갔음을 알리는 시스템 창이 나타났겠지.
나는 양반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웃었다.
“네. 잘했죠?”
“그래, 잘했어. 그런데 말이야.”
후웅-!
얼어붙은 공기를 베며 날아온 것이 양반의 검에 튕겨져 나갔다.
“스스로 네 몸을 지킬 수 있는 스킬은 없어? 널 안고 이렇게 싸우는 건 조금 힘든데.”
“하나 있기는 해요.”
“오? 그럼 그것 좀 써 봐.”
“그런데 백정 새끼의 뺨을 때려야하는 거예요.”
양반이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설은 오빠.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게 스킬의 발동 조건인 걸요? 리사는 억울합니다.
“그냥 없다고 말해.”
“있는 걸 어떻게 없다고 말해요?”
나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광풍이 몰아쳤다.
휘몰아치며 날리던 눈들이 순식간에 걷힐 만큼의 위력이었다.
눈보라를 순식간에 걷어 버린 사람은 백정이었다.
“내가 아주 우습지?”
“우습지는 않은데.”
내뱉은 말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양반이 다리를 움직였다.
콰과광-!
탄생목을 중심으로 고여 있던 물이 순식간에 솟구쳐 올랐다. 조금 전까지 우리가 있던 자리에, 백정이 강하게 검을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마치, 분수대에서 솟구친 물과도 같이 튀어 오른 물방울이 이내 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온몸을 적시는 빗물에 눈가를 살짝 찡그리려던 것도 잠시, 양반이 쥐고 있던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내리던 비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백정.
그에게로 말이다.
저를 향해 날아드는 날카로운 얼음에 백정이 미친 듯이 웃으며 양손에 쥔 두 자루의 검을 거칠게 움직였다.
백정을 노리던 얼음들이 바람에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백정은 곧장 자리를 박찼다.
후웅-!
눈으로 쫓기 힘든 속도.
그러나 양반은 그의 움직임이 보인다는 듯이, 쥐고 있던 검을 능숙하게 내저었다.
카앙, 캉!
날카로운 날붙이가 여러 번 맞부딪쳤고, 나와 양반의 주위로는 다시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계속 같잖은……!”
“재주라도 부려야지.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너보다 약하니까. 아니, 약했으니까.”
양반이 제 말을 정정하고서는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이제 너랑 똑같은 S급 각성자야, 백정.”
윤리오 이전의 백정은 S급 각성자였나 보다.
그보다 설은 오빠, 오빠가 S급 각성자로 힘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10분도 채 안 남았어요.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 스킬 적용 시간이 7분 남았습니다.】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의 스킬 적용 시간은 10분.
이 중 3분의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다.
“설은 오빠, 빨리 끝내야 해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나를 품에 안고서는 그게 힘든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눈보라를 일으켜 백정의 시야를 방해하는 거겠지.
하지만.
“잡았다, 양반 님.”
백정은 S급 각성자답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나도, 양반도 당황해하는 찰나에 벼락같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설은! 애를 이리로 던져!”
선비의 목소리였다.
거센 눈보라를 뚫고서 우리를 향해 닿은 목소리에 양반이 곧장 나를 저 위로 집어던졌다.
“흐아아악!”
허공에 부웅 뜬 몸에 두 눈을 질끈 감을 뻔했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는 상대가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즉시 해제되는 스킬이었다.
나는 내 뺨을 할퀴고 가는 시린 칼바람에도 두 눈을 부릅뜨고서 양반을 시야에 잡았다.
양반이 백정의 휘두른 검을 가까스로 피해내고서, 제 검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앙, 캉! 카강-!
백정의 검을 막아내는 양반의 몸놀림은 굉장히 가벼웠고, 또 경쾌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선비의 품에 안착했다.
허공에 떠올랐던 몸이 단단한 팔에 끌어당겨지자, 나는 곧장 팔을 내뻗었다.
“리사는 물건이 아니에요! 아니라고, 이 빌어먹을 탈쟁이 새끼야!”
선비의 머리칼을 휘어잡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선비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탄생목 주변에 고여 있던 물이 다시 한 번 더 솟구쳐 올랐다.
그것이 빗방울로 내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망할 선비 새끼야, 지금 뭐하는 거야? 애를 데리고 바로 이곳을 빠져나가야지.”
솟구쳐 오른 것이 그대로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아직 피지 못한 꽃봉오리와도 같은 형태로.
허공을 딛고 서 있던 선비가 나를 안은 채 수면 위로 발을 디뎠다.
“그러고 싶은데 말입니다. 바깥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하더군요.”
“불가능하다고?”
“네, 백정 녀석이 탄생목 주변으로 결계를 쳐둔 것 같더군요.”
“결계라…….”
양반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백정 새끼한테 그런 류의 스킬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아이템을 이용했겠죠. 그간 바깥을 내내 돌아다닌 녀석 아닙니까? 재미난 거라도 주워 와서 이곳에 설치를 해 둔 모양입니다.”
선비의 말에 양반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파괴해야겠네.”
양반이 쥐고 있는 검에 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반은 곧장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각시가 그러더군요. 당신을 윤사해의 아이와 함께 바깥으로 데려가 달라고.”
선비가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당신을 윤사해에게 데려가 달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본 건지는 몰라도.”
양반은 말없이 선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거절할 거 알잖아.”
바깥에서는 백정이 꽃봉오리와도 같이 얼어붙은 것을 부수기 위해 혈안이 된 모양인지, 쾅쾅 내리치는 폭발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 소음을 배경음 삼아 선비가 입을 열었다.
“각시가 말하기를, 제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나도 네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하자.”
양반이 흡사 서리가 내린 것만 같은 검을 고쳐 잡았다.
“내가 백정 새끼가 부려 놓은 재주를 뛰어넘어 볼 테니, 너는 그 사이에 꼬마를 윤사해에게 데려다줘. 아주 안전하게.”
양반은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내딛은 걸음에 얼어붙어 있던 수면이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꼬마. 아니, 윤리사.”
양반의 입에서 처음으로 들은 나의 이름이었지만,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향화가 아니었다면 너는 진작 죽은 목숨이었어, 알아?”
“아니요.”
앞만 보고 있던 양반의 고개가 내게로 향했다. 나는 그의 은백색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리사는 어떻게든 살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오빠도 살아요.”
어떻게든.
내가 도와주는 데까지.
양반이 내게 삼킨 뒷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고, 쥐고 있던 검으로 허공을 베어냈다.
콰과광-!
꽃봉오리와도 같이 닫혀 있던 얼음 기둥이 일으켜진 바람에 산산이 조각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죽어가는 나무의 주위로 싸라기눈이 어지럽게 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배경으로 나의 시야에 시스템 창 하나가 나타났다.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이 활성화됩니다.】
새로운 스킬을 얻었다는 기쁨 따윈 누릴 새가 없었다.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
-찾고자 하는 대상의 위치를 파악하여 시야에 투시합니다.
-찾고자 하는 대상의 수적 제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단, 적용 대상의 ‘진명(眞名)’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 단, 적용 대상의 구체적인 생김새를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양반의 진실 된 이름은 설은.
그의 얼굴에 탈은 씌워져 있지 않기에 나는 양반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중이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에서 쩌적, 뭔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일순 흔들렸다. 나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선비가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제가 가진 스킬을 사용한 것을.
일그러지는 시야 사이로 백정의 검을 막아내고 있는 양반이 내게 소리 없이 인사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잘 가.
그러나 나는 그를 향해 마주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대신, 양반에게 걸려 있던 스킬,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가 유지되게끔 하였다.
【<[S, 숙련 불가] 인지의 눈>이 발동됩니다.】
【각성자, ‘설은’을 인지합니다.】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가 상대에게 적용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이를 적용하고자 하는 상대의 스킬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 단, 스킬이 적용된 대상자는 본인(윤리사)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해가 뜨려는 참인지, 여명이 도시를 감싸 안는 중이었다.
하지만 나의 두 눈은 여전히 하늘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던 유랑단의 은신처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설국의 왕.
내리는 눈을 벗 삼아 춤을 추고 있는 남자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