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러나 꽃은 지기 마련(3)
각시의 말대로 탄생목을 살피러 갔다던 선비는 금방 돌아왔다.
돌아온 선비에게 양반은 자신이 탄생목에 갈 수 있음을 밝혔고, 선비는 그럴 리가 없다는 얼굴로 양반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당신 혼자서는 수장님께서 거신 금제를 풀지 못할 텐데요?”
금제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양반이 탄생목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한 일종의 장치를 말하는 것 같았다.
선비의 말에 양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푼 거 아니야.”
“그럼……?”
선비가 그렇게 되묻고는 나를 쳐다봤다.
뭐야, 왜 날 봐? 나는 수장이 양반에게 걸었다는 금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거든?
양반은 선비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애는 왜 쳐다봐? 어쨌든, 풀렸으니 얼마나 좋아?”
“하긴, 시기를 기가 막히게 맞추셨군요.”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선비는 양반의 금제에 대해 더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탄생목에 아무도 없더군요. 백정 놈이 죽치고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잠깐 자리를 비운 거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탄생목으로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 겁니다.”
선비가 그렇게 말하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이 공간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 아시잖습니까? 탄생목으로 향하는 길을 모두 틀었습니다.”
“오랜만에 쓸모 있는 일을 하네?”
선비가 불쾌하다는 듯이 양반을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양반은 그를 놀리는 게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릴 뿐이었다.
“어쨌든, 윤사해의 아이를 돌려보내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그런 것 같네.”
드디어 이 빌어먹을 공간을 벗어날 때가 다가온 것 같았다.
“아가.”
“향화 언니.”
나는 각시에게 쪼르르 달려가서는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고마워요, 언니.”
“내게 그런 인사를 할 필요는 없단다. 오히려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하여 미안할 뿐이지.”
각시 역시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양반과는 달리 각시는 여전히 탄생목에 접근이 불가능한 것 같았다.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각시는 이 저택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탄생목은 악몽과도 같은 장소일 테니.
나를 꼭 끌어안고 있던 각시가 돌연 나의 어깨를 잡고선 말했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테니, 내 너에게 당부하마.”
그 힘이 다해가고 있으나, 각시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존재였다. 나는 각시의 입에서 들려올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장천의를 조심하거라.”
“장천의를요……?”
“그래.”
각시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태어난 각시는, 제일 먼저 수장이 원하는 미래를 그려본단다.”
주어진 수명이 충분한 경우에만 내다볼 수 있는 미래이기에 그러는 거라면서 각시는 말을 덧붙였다.
“수장이 원하는 미래에 아홉 탈은 단 한 명도 없었다만, 그 대신 존재하는 사람이 있었지.”
그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해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장천의란다.”
CW의 장천의.
『각성, 그 후』에서는 진작 실종된 상태로 등장했던 그.
바깥으로 돌아가자마자 할미를 족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다른 일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장천의에 대해 알아봐야겠네.’
<[특수 스킬] C+F=검색창>으로 『각성, 그 후』의 텍스트 본에서 장천의를 조사해 보는 것.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겼다.
“수장이 그리는 미래가 뭔데요?”
유랑단의 수장,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각성, 그 후』에서 제대로 밝혀진 적이 없었다.
나의 질문에 각시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굉장히 곤란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말했다.
“알겠어요, 언니. 꼭꼭 약속할게요. 장천의를 조심하기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각시를 안심시켜 줄 말을.
***
윤리사는 그렇게 양반의 품에 끌어안긴 채 탄생목으로 길을 떠났다.
원래 선비의 안내가 필요했지만, 그는 자신의 대신으로 까치 한 마리를 둘에게 붙여 주었다.
선비, 그는 각시의 붉은 기와집에 남아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결계를 쳐 줄 필요는 없단다, 아이야.”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입니다.”
붉은 기와집 주변으로 금빛의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윤사해나 최설윤과 같은 S급 각성자가 아니고서야 함부로 깰 수 없는 견고한 결계가 그렇게 완성됐다.
각시가 저택 주변에 펼쳐진 결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선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야. 아니, 하현.”
선비가 미간을 좁히고서 각시를 쳐다보았다. 닿는 시선에 각시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너울을 걷고선 말했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지 않겠느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뭐가 마지막이라는 겁니까?”
다소 날선 목소리가 돌아왔으나, 각시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는 입을 열었다.
“설은을 리사, 그 아이와 함께 윤사해에게 보내다오.”
“뭐라고요?”
“그리고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해 주었으면 하는구나.”
선비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이봐요, 각시.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내 너에게 부탁하는 거겠지.”
싱그러운 녹음을 품은 두 눈이 둥글게 접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가에 잘게 난 금이 파스슷, 소리를 내며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다.
당장에라도 부서질 듯한 얼굴.
선비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가 각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 않을 겁니다.”
“내 부탁임에도?”
“네, 당신 부탁임에도.”
선비는 그렇게 말하고는 얼굴에 탈을 뒤집어썼다.
“양반, 그 자식이 어차피 원치 않을 텐데 제가 뭣하러 한답니까?”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선비.
그는 그 말을 남기고선 각시의 저택을 벗어났다.
각시는 그렇게 홀로 남겨졌다.
“드디어 혼자 남겨지셨네요, 각시.”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대청마루 안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각시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쩌다 보니 홀로 남겨졌단다.”
각시가 나긋하게 대답하자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각시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듣다가 모습을 감추고 있던 불청객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부네. 백정과 함께 돌아온 모양이지?”
“네, 그렇답니다.”
부네가 각시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선 미소를 지었다.
각시는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소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이 저택에 결계를 칠 필요는 없다 했는데도.”
쓰러져가는 각시가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자신의 양반이 이곳을 영영 벗어나는 것.
염치없게도 원하는 것은 오직 그 뿐이었다. 그렇기에 각시는 윤리사를 위해 움직였다.
그래야만, 제게 이름을 붙여 주었던 양반이 살아남을 수 있기에.
***
선비가 붙여 준 까치가 하얗게 죽어 있는 나무의 나뭇가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게 탄생목이에요?”
“그래. 참고로 저거 죽은 거 아니야. 죽어가고 있는 것뿐이지.”
누가 봐도 죽은 나무였다.
하얀 거목 주변에는 물이 잔뜩 고여 있었는데, 얼마나 맑은지.
“시, 시바.”
아래에 잠겨 있는 해골이 또렷하게 두 눈에 들어왔다.
양반은 나를 한쪽 팔로 받쳐 안은 채, 수면 위로 가볍게 걸음을 내디뎠다.
“향화가 말하기를, 이 나무 앞에서 네가 각성자임을 증명하면 된다고 했는데…….”
양반이 나를 보며 물었다.
“스킬 뭐 있냐? 아무거나 써 봐. 그럼 바로 손등에 새겨진 표식이 사라질 걸?”
“으음.”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당한 것은 뺨 때리기였다. 아니, 뺨 때리는 건 스킬 발동 조건이었고.
정확한 명칭은, <[숙련 불가, S급] 내 말이나 들어라!>지.
나는 양반을 물끄러미 보았다.
“왜?”
“오빠, 뺨 때려도 돼요?”
“될 것 같아?”
안 되겠지.
그러니 나는 양반 몰래 그의 뺨을 있는 힘껏 치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나타날 줄 알았지.”
탄생목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올렸던 손을 급히 내렸다.
하얀 나무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남자였다. 심하게 곱슬곱슬한 남청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
양반이 남자를 보고선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망할 선비 새끼. 아무도 없을 거라더니 순 거짓말이었어.”
“그렇게는 말 안 했어요. 백정 새끼가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수를 써 놨다고 했죠.”
“꼬마, 말조심 해. 저 새끼가 바로 백정 새끼니까.”
“알고 말한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타난 남자를 노려보았다.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백정.
『각성, 그 후』에서는 윤리오가 맡았던 자리였다.
어쩌면 윤리오보다 더 잔혹한 성정을 가지고 있을 백정이 우리를 향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애새끼랑 많이 친해졌나 봐, 양반님? 뭘 그렇게 쑥덕거리는 거야?”
“너는 알 필요 없는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중이지.”
“어련하실까.”
백정이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를 향해 걸음을 디뎠다.
“좋은 말로 할 때 그 애새끼를 내놔. 탄생목에 바쳐 버리게.”
“싫은데. 그리고 바치지 못할 거야. 얘 각성자거든.”
“웃기는 소리를.”
백정이 양손에 두 자루의 검을 쥐었다.
양반은 나를 받치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이와 함께 그는 백정을 비아냥거렸다.
“그렇게 탄생목에 이 아이를 바치고 싶으면, 나한테서 뺏어 보든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못 뺏어갈 줄 아나 봐?”
저기요, 리사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빌어먹을 탈쟁이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같은 탈쟁이라고 해도 아군과 적군은 확실하게 구분해야했다.
“네가 어떻게 탄생목에 들어섰는지 모르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한 번 싸워 보자고.”
우리를 향해 검을 치켜들고 있는 백정은 적군.
“꼭 싸워야 할까? 그냥 조용히 얘를 보내 주는 방법도 있는데.”
백정을 향해 검을 내밀고 있는 양반은 나의 아군이었다.
나는 양반의 어깨를 꼭 끌어안은 채 <[S, 숙련 불가] 클리셰면 뭐 어때 현자의 눈!>을 사용했다.
스킬을 사용하기 무섭게 오른쪽 손등에 새겨진 표식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양반의 스킬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양반은 내가 알고 있던 『각성, 그 후』의 ‘양반’이 아니었다.
그렇지마는.
【<[S, 숙련 불가]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가 발동됩니다.】
양반은 내가 아는 유일한 양반이 될 거다.
【적용 대상, 설국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