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러나 꽃은 지기 마련(2)
나는 각시의 저택 마당에 피어 있는 붉은 꽃들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유를 모르겠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아가, 왜 그러느냐?”
“갑자기 불안해져서요.”
“음?”
나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생기가 가득한 붉은 꽃들을 두 눈에 가득 담으며 말했다.
“설은 오빠가 우리 아빠한테 잘 말해 줬을까요? 리사는 무사하다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내 말에 각시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이내 말했다.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구나.”
“이봐요, 각시.”
미래를 보고 온 듯한 각시의 말에 선비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엄한 곳에 힘을 쓰지 마십시오. 그러다 새로운 각시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죽겠습니다.”
설마, 저걸 걱정이랍시고 말한 건 아니겠지?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입을 벌리는데, 각시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청마루에 앉아 있던 선비는 그 웃음소리가 달갑지 않은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정하기는 싫을 정도로 고운 얼굴에 탈을 덮어쓰는 것은 덤이었다.
선비는 그렇게 제 얼굴을 탈 아래로 감추고선 대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아이야, 탄생목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란다.”
각시의 말에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선비의 고개가 각시에게로 향했다.
각시는 저를 보는 선비를 향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위해서도 힘을 써 봤는데, 이 역시 불만이니?”
선비에게서 대답이 나온 것은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네, 불만입니다.”
선비는 그 말을 남기고선 곧장 대문을 넘어 사라져 버렸다.
한겨울에 불어오는 시린 바람도 같이 차갑기 그지없는 쌀쌀맞은 태도였다.
나는 뚱한 얼굴로 선비가 사라진 쪽을 보다가 각시에게 말했다.
“향화 언니가 왜 선비랑 설은 오빠가 형제 같은 사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각시가 어디 한 번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팔짱을 끼고선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둘이 성격이 아주 지랄 맞은 게 꼭 닮았거든요.”
각시가 내 말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아가, 네가 본 것처럼 둘의 성격은 닮은 구석이 많단다.”
각시가 손을 들어 올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설은은 말했듯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라 제대로 된 세상을 접하지 못하였고, 선비…….”
각시가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가 이내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너만 할 때에 온갖 상처를 받아 이곳에 들어온 아이였지. 수장의 손에 이끌려서.”
그러면서 덧붙었다.
“수장에게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더 나은 길이 있었을 것을.”
‘선비’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살 수도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양반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다.
이딴 곳에서 나고 자라지만 않았다면, 그 역시 ‘양반’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겠지.
“그러나 동정하지 말거라.”
그렇게 말하는 각시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너의 동정을 받기에는 두 사람이 지은 죄가 너무나도 많거든.”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물었다.
“향화 언니는요?”
“나 역시 마찬가지란다, 아가. 그 두 아이가 그렇게 죄를 짓는데도 나는 말리지 않았으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 절대로 동정하지 말거라, 리사. 나도, 그 아이들도.”
검은 너울 아래에 가려져 있는 각시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을 것 같았다.
***
각시의 저택을 나섰던 양반은 다소 무거운 발걸음으로 귀가하는 중이었다.
그의 품에는 붉은 장미와 보라색 스타티스를 예쁘게 엮은 꽃다발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사온 것이었다. 유랑단의 은신처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면, 항상 각시에게 꽃을 선물했기에.
각시의 저택에 다다른 양반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하아… 바보 같아…….”
각시에게는 선비가 꼴 보기 싫어 나가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는 윤리사의 얼굴을 보는 것이 힘들어 저택을 벗어난 거였다.
각시의 뜻을 저버리고 몇 번이나 아이를 향해 검을 들이밀었건만, 아이는 겁먹은 기세라고는 없이 자신을 대했다.
그리고.
“뺨까지 때린 것 같은데.”
양반이 자신도 모르게 뺨을 만지작거렸을 때였다.
어둠을 밝혀야 할 청사초롱의 불빛이 닿지 않은 어둠. 그곳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돌아 버리겠네.”
가볍게 바닥에 발을 디딘 남자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왜인지 낯이 익어 양반은 자리에 멈춰 서서 눈가를 찡그렸다.
양반의 앞에 나타난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양반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러니까…….”
남자가 양반을 빤히 쳐다보다가 눈웃음을 지었다.
“유랑단의 ‘양반’이시군요.”
“뭐야, 너.”
양반이 한 쪽 눈가를 찡그렸다.
남자가 양반이 내비치는 경계에 방긋 웃는 낯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장천의라고 합니다.”
“장천의?”
“네, CW라는 작은…….”
“작기는 개뿔.”
양반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으며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와는 가장 접점이 없을 놈이 여기는 무슨 일일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들어온 걸까?”
“어떻게 들어왔기는요?”
장천의가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 같은 탈이야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지만, 다른 분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바깥에는 유랑단의 은신처로 향할 수 있는 입구가 여러 개 만들어져 있었다.
장천의는 그 중 하나를 통해서 이곳으로 왔다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걸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한데.”
“하하, 영업 비밀이라 어떻게 찾았는지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그보다 리사 양께서 이곳에 있는 줄로 압니다만, 맞는지요?”
장천의의 입에서 들린 이름에, 양반은 검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윤사해가 아니라 네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양반이 말을 하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향화가 이걸 봤나 보네. 네가 이곳에 찾아오는 걸.”
장천의가 말없이 미소를 그렸다.
양반은 그가 보여 주는 미소가 불쾌하다는 듯이,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이는 아직 데려갈 수 없어. 걔한테 귀찮은 표식이 새겨져 있거든.”
“당신처럼 말입니까?”
그렇게 말한 장천의가 양반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러고는 양반이 어떻게 할 새도 그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장천의에게 붙잡히지 않은 다른 한 손에 꽃다발만 없었더라면, 양반은 장천의를 베었을 거다.
‘아니지, 굳이 검을 휘두를 필요는 없잖아?’
양반이 그런 생각과 함께 다리를 들려던 참이었다. 장천의에게 붙잡힌 손목에서 따뜻한 기운이 번져나갔다.
이내 장천의는 양반의 손을 놓아주었고, 그러기 무섭게 양반은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장천의에게 붙잡혔던 손목이었다.
양반은 소매를 걷기 무섭게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천의가 그의 놀란 표정을 보며 말했다.
“향화라면 각시겠지요. 그분께서 보신 건, 제가 당신에게 걸려 있는 제약을 풀어 버리는 광경이었을 거랍니다.”
양반의 두 눈이 일순 흔들렸다. 그는 곧장 다른 한쪽의 손목도 확인하였다.
‘금제가 풀렸어.’
양반이 탄생목에 접근할 수 없도록, 수장이 직접 걸어 놓은 그의 금제가 풀렸다.
양반이 걷었던 소매를 내리고선 장천의를 노려보았다.
“네가 무슨 스킬을 사용한 건지 모르겠지만, 너라면 그 꼬맹이에게 새겨져 있는 표식을 지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겠죠.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겁니다.”
장천의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주인공이 죽을 것 같지만 않다면, 그의 일에 너무 깊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라서요.”
“뭐?”
“그리고 당신 말을 들어보니 리사 양의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는 것 같으니…….”
장천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선 웃었다.
“그럼, 리사 양을 우리 고객님의 품에 무사히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장천의는 자신이 나타났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봐, 장천의!”
양반이 급히 그를 붙잡으려고 했지마는.
“설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장천의를 잡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곱게 차려입은 붉은 한복, 그와는 대조적인 검은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각시가 보였다.
“붙잡는다고 될 사내가 아니니 이리 오거라.”
장천의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양반은 장천의가 사라진 쪽을 말없이 노려보다가 각시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
바깥으로 외출을 나갔던 양반은 생각보다 이르게 돌아왔다.
그리고 귀가와 동시에 그는 내게 놀라운 소식을 하나 전해 주었다.
“탄생목으로 갈 수 있게 됐다고요? 못 간다면서요!”
“그래, 원래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는데 말이야.”
양반이 그렇게 말하고는 이름 모를 보라색 꽃 한 송이를 내 귀에 꽂아 주었다.
뭐지, 이 오빠가 미쳤나? 갑자기 꽃은 왜 꽂아 줘?
양반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꼬마야, 너 진짜 이상한 녀석이랑 엮인 것 같더라.”
“갑자기요?”
대화의 주제가 왜 그렇게 튀는 거죠, 설은 오빠?
하지만 양반은 나의 의문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불쌍한 꼬맹이.”
뭐래.
그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데, 굉장히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양반의 손을 쳐낼 수가 없었다.
나를 보고 있는 은백색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꼬맹아, 그거 알아? 너 진짜 특이한 녀석인 거.”
“오빠도 특이한 사람이잖아요.”
내 말에 양반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나도 좀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 그런데 너처럼 나를 죽이려고 드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지는 않아.”
그런 말을 하면서 자기 좋을 대로 내 머리를 쓰다듬던 양반이 뒤늦게 집에서 보이지 않는 이를 찾았다.
“향화, 그 자식은?”
“선비를 말하는 거라면 탄생목을 살피러 갔단다. 금방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보거라.”
“향화가 그리 말하면 기다려야지.”
양반이 그렇게 말하고는 각시에게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각시는 양반이 건넨 꽃을 받아 들고는 비어 있던 화병에 단정하게 꽂아 넣었다.
양반에게서 꽃을 받는 것이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뭐,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선비는 갑자기 왜요?”
“왜기는.”
양반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내게 말했다.
“너를 네 아버지한테 데려다주려고 그러지.”
가슴이 절로 벅차오르게 만드는 말을 말이다.
“진짜요? 리사 이제 아빠한테 돌아갈 수 있어요?!”
“그래, 싫어도 보낼 거야. 윤사해가 살짝 미친 것 같더라고. 나는 분명 네가 무사하다고 제대로 알려 줬는데 말이지.”
“……?”
설은 오빠, 우리 아빠를 제대로 만나고 온 것 맞겠지? 괜히 갔다가 신경만 긁고 온 것 같은데.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니!
나가면 곧바로 할미를 찾아 뺨을 때려 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