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그러나 꽃은 지기 마련(1)
해가 저문 지 오래인 늦은 밤.
국내 최고층 빌딩인 CW 본사의 건물 곳곳에는 여전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장천의의 집무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최설윤 길드장님과 관련하여 들어온 소식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습니까?”
“네, 회장님.”
비서의 대답에 장천의는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이맘때쯤이면 최설윤은 항상 바티칸 교황 측과 충돌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일을 수습하는데 도움을 보탰었고.
‘그런데…….’
잠잠하다니.
장천의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몇 번 두드리다가 비서를 향해 웃는 낯을 보였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분과 관련하여 들어오는 소식 있으면 바로 전달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물러간 뒤, 장천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너무 많이 바뀌는데.”
윤사해가 제 자식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까지야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한태극 의원의 세쌍둥이 손주가 무사하고, 진작 DMO의 소유가 되었어야 했던 팔라크의 둥지가 청 가문으로 넘어간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가장 문제는.
“저세상…….”
장천의가 앓는 듯이 그 이름을 내뱉고는 얼굴을 문질러 내렸다.
“여기서 더 얼마나 바뀔지 모르겠군. 부디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것이었음 하는데.”
그렇게 말한 장천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잡한 머리에 바람이라도 쐬고자 함이었다.
삐빅- 삐빅-
차고 있던 손목시계에서 울리는 경고음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코트 하나를 걸치고서 밖으로 나갔을 터였다.
[XX_X-ERRO-R]
시야에 잡히는 문자들의 나열에 장천의가 한 쪽 눈가를 찡그렸다.
“이건…….”
장소를 특정 지을 수 없는 유랑단의 은신처를 뜻하는 좌표였다.
“망할.”
장천의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지껄이고선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을 향해 신호를 보내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서차윤. 대부니 뭐니 하더니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군.”
윤사해의 딸, 윤리사.
그 아이가 왜 유랑단의 은신처에 있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고객님께 따로 연락이 온 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 건지.”
그렇다고 먼저 연락을 걸어 윤리사의 안부를 물을 수는 없었다.
‘괜한 의심을 사서는 안 되니.’
혹시나 지난번처럼, 윤리사가 아닌 다른 아이가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도 해 봤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 봐야지.”
분명한 것은 저세상이 보내는 신호는 아닐 거라는 것.
‘그 녀석이 보내는 긴급 신호는 그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도록 해 놓았으니.’
윤사해에게 이를 들키면 어쩌나 했지만, 그는 자신을 아직 믿고 있는 듯했다.
장천의는 씁쓸함을 머금은 미소를 짓고서 코트를 챙겨 입었다. 그러고는 곧장 집무실을 나섰다.
“회장님?”
“오늘 일정은 끝났지요?”
“네? 네, 회장님.”
들려온 대답에 장천의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럼, 내일 일정도 끝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장천의의 비서가 그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장천의가 말했다.
“내일 일정을 모두 비워 달라는 말입니다. 이왕이면 그 다음날까지 모두 비워 주셨으면 하군요.”
벼락같이 날아든 말에 비서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장천의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회장님, 잠깐……!”
비서가 황급히 장천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회장님? 장천의 회장님!”
그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
각시의 말대로 팔찌의 정중앙에 그려진 토끼를 눌러 봤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윤리오의 것이었을 팔찌.
그에게 이 팔찌를 준 사람은 장천의였을 거다.
‘덕분에 살았어, 리사. 네 말대로 강한 어른이 구하러 와 줬거든.’
단예가 말한 ‘강한 어른’이 바로 장천의였으니까.
단예와 단아의 납치 미수와 관련된 기사에서 그의 이름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장천의가 내 친구들을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각시는 그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백정이 나를 노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장천의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장천의.
그는 4대 길드 중 하나인 CW의 주인이었으나 『각성, 그 후』에서 그는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었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에 장천의는 이미 실종 상태였고, 주인을 잃은 CW는 몰락한 뒤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장천의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손익을 철저하게 계산하는 놈이었지. 장사치가 따로 없었단다.”」
윤사해와.
「“가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대기는 했지만 좋은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생각이 날 때마다 천의 씨 행방을 찾고 있는 거고.”」
그리고 최설윤.
장천의가 실종되기 전까지, 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던 두 사람의 이야기로 장천의의 성격을 유추해 볼 수는 있었다.
뭐, 그렇게 유추해서 내린 결론은.
“야, 망할 선비 새끼야. 이제 그만 이 집에서 나가지?”
“집주인께서는 조용히 계신데, 왜 당신이 난리입니까?”
유랑단의 아홉 탈에 속해 있는 양반과 선비보다는 꽤 성숙한 마음을 지닌 비즈니스맨이라는 것.
나는 나잇값 못하고 있는 두 어른을 짜게 식은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도 집주인이니까 그러지! 저 마당에 꽃들 안 보여? 다 내가 심은 거야! 빌어먹을 선비 새끼야!”
“고작 꽃 몇 송이 심은 걸로 이 저택의 공동 소유자라고 말하는 겁니까? 어이가 없군요.”
나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유랑단의 아홉 탈이란 것을 몰랐다면, 거참 어른들이 유치하게 싸운다면서 놀려댔을 텐데 말이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탈이고 뭐고 리사 앞에서 뭐하는 짓들이냐면서 한 소리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탈쟁이 새끼들이 내 앞에서 거리낌 없이 싸우고 있는 건…….’
나를 경계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겠지.
윤사해에게 돌아가서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별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여기는 걸 거다.
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됐다.
어쨌거나 유랑단의 아홉 탈에 속한 자들이었다.
지금에야 나를 바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서로 협력 중인 것 같지만, 그들이 언제 마음을 바꿔 내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를 일이었다.
당장, 저 망할 양반 새끼만 하더라도 죽이겠다니 뭐니를 반복 중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나이를 허투루 잡수신 어른들의 말다툼을 조용히 구경하고 있는데, 각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해 주었다.
“형제 같은 사이라, 만나기만 하면 저리 싸운단다. 서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서 그런 거겠지.”
“형제 같은 사이라니, 향화!”
양반이 끔찍한 것을 들었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듣기 거북하군요.”
선비는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양반을 경멸어린 시선으로 보는 건 덤이었다.
그 눈빛이 불쾌하다는 듯이 양반이 험상궂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딴 눈으로 보지 말지?”
“제가 뭘 어쨌다고.”
선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양반이 험상궂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은? 어디 가려고 그러느냐?”
“잠시 바깥 좀 다녀올게. 계속 여기 있다가는 향화의 집을 어지를 것 같아서.”
그러니까 선비 새끼의 낯짝이 보기 싫어서 바깥바람 좀 쐬고 온다는 말이었다.
바깥이라고 하면…….
“설은 오빠, 잠시만요!”
나는 황급히 양반의 옷자락을 붙잡고서 물었다.
“밖이라면, 이 공간의 밖을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하늘이 제대로 보이는 ‘밖’을 말하는 거잖아?”
나는 맞는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있으면 사다 줄 거예요?”
“아니.”
시바, 왜 물어 본 거야?
순간 욱해서 양반의 따귀를 때릴 뻔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또랑또랑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우리 아빠한테 다녀와 줄 수 있어요?”
양반에게는 어려운 부탁이 될 거다.
아니나 다를까,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나를 보며 물었다.
“지금 나보고 죽으라는 거지?”
“에이, 설마요.”
나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유랑단에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밝히지 마세요.”
그랬다가는 윤사해는 곧장 유랑단을 치려고 할 게 분명했다.
“그냥.”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양반을 향해 간절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리사는 괜찮다고, 곧 돌아가겠다고만 해 주세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윤사해라면 걱정하다 못해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을 게 뻔했다.
양반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암만 봐도 그냥 나 죽으라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나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힘드실 것 같으면 거절하셔도 돼요. 하지만.”
나는 두 눈을 올망졸망하게 뜨며 양반을 쳐다봤다.
“설은 오빠도 양심이 있다면 리사의 부탁을 받아 주겠죠? 지금까지 리사만 보면 죽이겠다고 그랬으니까!”
“내가 언제 너만 보면……!”
양반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스스로도 찔리는 게 굉장히 많은 것 같았다.
성격이 지랄맞기는 해도 양심에 털은 안 돋았나 보네.
결국 양반은 사납게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내게서 몸을 돌렸다.
“그래. 간다, 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도 잠시, 양반이 대문을 넘어가려다 말고 각시를 보며 말했다.
“다녀올게, 향화.”
“다녀오거라.”
각시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양반은 대문을 넘어 사라졌다.
양반이 그렇게 사라진 뒤, 그가 바깥으로 나서는 데 큰 몫을 한 선비가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묻기 죄송스럽습니다만. 윤사해의 아이에게 양반 녀석을 다루는 법이라도 가르쳐 줬답니까?”
그가 질문을 던지는 대상은 각시였다.
각시가 선비의 질문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그러고는 기특하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 혼자서 터득한 것이겠지. 본디 아이들은 배우는 것이 빠르니.”
맞아요, 언니. 리사가 배우는 게 좀 빨라요.
그래서 말이 안 통하면 손을 휘둘러야하는 것도 그 누구보다도 먼저 습득했죠.
그러니까 설은 오빠가 부디 우리 아빠를 찾아가 줬으면 하는데 말이에요.
‘찾아가겠지.’
말했듯, 양반의 양심은 아직 무사한 것 같았기에.
***
하지만 윤리사의 기대와는 달리 양반은 윤사해를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 그에게 쪽지를 보냈다.
<네 따님께서는 무사하시다. 그러니 잠자코 기다리고 있어.>
오해가 다분한 쪽지를.
콰광-!
양반이 윤사해에 의해 키즈 카페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역시, 윤사해 앞에 모습을 안 드러내기를 잘했어.”
모습을 드러냈다면 죽었을 거다.
양반은 그렇게 생각하며 윤사해가 있는 키즈 카페에게서 몸을 돌렸다.
어서 바깥에서의 일을 끝마치고 몇 분이라도 더 빨리 각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빌어먹을 백정.’
그 망할 탈쟁이 새끼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