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76)화 (76/500)

76화. 메마른 땅에도 꽃은 핀다(5)

다른 사람일까 했지만 아니었다.

“부탁이야, 향화.”

그 어느 때보다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분명 익숙한 누군가의 것이었다.

문제는 그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저 망할 탈 때문에 그런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나는 저 사람을 알고 있었다.

“설은.”

그래, 설은.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양반.

각시의 말이 전부인 양 굴었던 그의 것이었다.

그런 그는 지금 나를 향해 검을 치켜들고 있는 중이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각시가 나를 품에 꼭 끌어안고선 양반을 향해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검을 거두거라, 설은.”

“싫어.”

양반이 각시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백정 새끼가 돌아왔단 말이야.”

양반의 얼굴은 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보다 ‘백정’이라니.

윤리오 이전에 백정 탈을 가지고 있던 자를 말하는 거겠지.

“알잖아, 향화? 백정이라면 그 꼬맹이가 윤사해의 딸이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란 걸.”

양반의 말로 보아, 윤리오 이전의 백정도 성격이 꽤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좋아하고 있을걸? 곧바로 탄생목에 공양으로 바치려 할 거야. 그 다음에는 너를 잡아다가 새로 태어난 각시에게 먹이겠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냐, 설은?”

각시가 인자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 네가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란다.”

그러고는 품에 안고 있던 나를 대청마루에 내려놓았다.

“각시는 수장을 위해 미래를 봐야하는 존재지. 그것이 제 몸을 갉아먹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놀라 각시를 올려다보았다.

각시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알게 됐다.

각시는 가느다란 손을 들어 내 뺨을 매만지고선 말했다.

“그렇기에 탄생목에 어린 아이가 바쳐지는 거란다. 그 아이들이 본디 살았어야 할 수명을 각시에게 주고자.”

양반에게 일러주듯이 말하는 목소리였지만, 각시의 고개는 나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각시는 이전의 각시를 먹어 전대의 각시가 가지고 있던 것을 품게 되고, 그리고…….”

“그만!”

양반이 각시의 말을 가로막고선 우는 목소리를 내었다.

“제발 그만, 향화.”

양반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버렸다. 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선.

각시는 잔잔히 미소를 짓고서 양반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검은 너울과는 대조적인 붉은 한복이 그녀가 내딛는 걸음에 물결쳤다.

양반의 앞에 멈춰선 각시가 무릎을 굽히고선 가녀린 손을 그의 얼굴을 향해 들어 올렸다.

“설은, 그런데 말이다. 아이를 바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단다.”

각시는 들어 올린 손으로 양반이 덮어 쓰고 있던 양반탈을 벗기고선 말했다.

“각시가 가져야할 힘은 오직 단 하나, 미래를 내다보는 것. 이에 다른 힘이 섞여서는 안 되니.”

그 때문에 아이를 바치는 거였다.

어린 아이는 ‘각성자’일 확률이 거의 없으니까.

“이는 백정 역시 알고 있을 터. 그러니 백정이 리사가 각성자인 것을 알게 된다면.”

“공양으로 바치지 않을 거라고?”

양반이 제 탈을 벗겨낸 각시의 손을 잡고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설은 오빠.”

양반이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양반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나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던 그에게로 다가가.

“좀 자세요.”

있는 힘껏 손을 휘둘렀다.

쫘악-!

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양반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돌려졌다. 그것도 잠시.

“너, 이……!”

양반이 내게 무엇이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마는.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가 발동됩니다.】

【적용 대상은 ‘설은’입니다.】

내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와 함께 양반의 몸은 그대로 기울어졌다.

“설은?!”

각시가 급히 쓰러지려는 양반을 품에 끌어안고선 나를 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여 주었다.

“알잖아요, 언니? 리사가 각성자인 거. 설은 오빠 정신이 조금 나간 것 같아서 재웠어요.”

그런 속 편한 말을 하면서 말이다.

***

“하하, 아하하하!”

붉은 기와를 올린 저택의 지붕 위에서 백정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양반 새끼, 지금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새끼한테 뺨 맞아서 기절한 거야? 이거 참 가관인데.”

“그보다 할미의 말이 맞았네요.”

각시의 저택, 그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라 둘이었다.

연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여자의 말에 백정이 입가를 쓸었다.

“그러게. 윤사해의 애새끼를 공양으로 바칠 수 있다니. 이거 너무 즐거운데.”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백정?”

“알면서 뭘 묻고 그래, 부네.”

연갈색 머리칼을 지닌 여자의 정체는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인 부네.

백정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탈이었다.

“산 제물로 이곳에 온 아이잖냐. 마땅히 그 역할을 수행하게 해 주는 게 도리지.”

“누구 마음대로 그러신다는 건지?”

짜증이 서린 목소리에 백정과 부네가 고개를 돌렸다.

“이거 누구야? 선비 새끼 아니야?”

“오랜만입니다, 백정. 그리고 부네. 당신들 얼굴을 영영 보지 말았으면 했는데…….”

선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눈가를 찡그렸다.

“이렇게 보게 됐군요.”

“그러게 말이야. 우리도 네 얼굴을 영영 보지 말았으면 했는데 이렇게 보게 됐네?”

백정이 눈웃음을 지으며 선비의 말에 태연스레 대꾸해 주었다. 그것이 마뜩찮은지, 선비는 얼굴을 찌푸리고선 입을 열었다.

“윤사해의 아이는 돌려보낼 겁니다. 유랑단에 괜한 피바람을 일으키려 하지 마십시오, 백정.”

“싫은데.”

백정이 선비를 향해 걸음을 내딛고선 눈가를 찡그렸다.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선비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저를 향해 다가오는 백정을 노려보았다. 선비의 코앞에 멈춰선 백정이 그를 깔보듯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수장님이라면 윤사해의 애새끼가 공양으로 선택됐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지.”

그렇게 말하고는 백정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조용한 것을 보면 그 애새끼를 공양으로 바쳐도 딱히 상관없다는 것일 텐데…….”

목소리의 끝이 흐려졌다가 이내 선명해졌다.

“왜 이렇게 난리지시? 수장님의 총애를 받으시는 선비 님께서.”

“말했듯, 이곳에 피바람이 불어오는 건 질색이라.”

따악-!

가느다란 손가락이 맞부딪치기 무섭게 각시의 붉은 기와집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허공을 딛고 서게 된 백정이 사납게 얼굴을 찌푸렸다. 선비가 드러나는 표정 없이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러니 난리인 거랍니다, 백정. 저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니까요.”

백정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비는 그를 물끄러미 노려보며 말할 뿐이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당신들을 억지로 이곳에서 내보내기 전에 말입니다.”

선비의 나지막한 경고에 몸을 움직인 것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부네였다.

“가죠, 백정.”

“그래, 가자고.”

백정이 순순히 몸을 돌리며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윤사해의 애새끼는 탄생목에서 만나 뵐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백정과 부네는 그렇게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붉은 기와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비는 각시의 품에서 눈을 뜰 생각을 않고 있는 양반을 보고선 짧게 혀를 찼다.

***

양반의 뺨을 때리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래, 그것까지는 아주 좋았다는 말이다.

“냄새.”

“몸에 좋은 겁니다.”

망할 선비 새끼, 담배가 어떻게 몸에 좋은 거야?

각시에게 안겨 잠든 양반을 어떻게 옮기나 고민하고 있을 때, 선비는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식 이리 넘기십시오.’

그러고는 양반을 방 안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그 과정에서 양반이 바닥에 머리를 크게 부딪쳤는데, 그는 깨어나지도 않고 잘만 잤다.

아닌가? 그대로 기절해 버린 건가?

어쨌든, 나는 지금 선비와 함께였다. 오늘의 적은 내일의 동료라니, 개뿔.

저딴 탈쟁이 새끼, 동료로 원한 적 없수다.

불퉁한 얼굴로 선비를 노려보는데, 그가 갑자기 묻지도 않은 것을 답해주었다.

“약초를 태우는 겁니다.”

이 독한 냄새가 약초를 태우고 있어서 그런 거였나 보다. 하지만 나는 괜히 선비를 놀려댔다.

“독초가 아니라요?”

“…….”

선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방긋 웃어 주기는 개뿔, 불퉁한 얼굴로 선비를 마주 보았다.

각시는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알아볼 것이 있다는데, 아무래도 이전의 각시들이 남긴 것을 한 번 더 살펴볼 모양새였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선비와 단 둘이 남겨져 있는 상태였다.

“으음.”

정확히는 잠든 양반을 포함하여 셋이서 사이좋게 있는 중이었다.

곧 양반이 사납게 얼굴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두 눈을 떴다.

그리고 선비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선비……!”

양반이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들 듯이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나는 심드렁하게 말해 주었다.

“향화 언니가 집 어지르면 그대로 쫓아낼 거래요.”

양반이 녹슨 기계처럼 삐걱거리는가 싶더니, 손에 쥐었던 검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리사한테 할 말 없어요?”

양반이 흠칫, 몸을 떨고는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없어.”

들린 말에 나는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저 망할 양반 새끼는 뺨을 한 대 더 맞아야할 것 같았다.

그렇게 양반을 향해 이를 가는데, 선비가 물고 있던 곰방대를 빼내고선 입을 열었다.

“각시에게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윤사해의 아이의 손에 그려진 표식을 지울 방법을 찾았다고요.”

“그래, 그러기 위해서는.”

“탄생목에 가야하고요. 각시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선비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양반을 보며 말했다.

“탄생목까지 아이를 데려다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백정 새끼를 만났나 보네.”

“네, 재수 없게도요.”

그 대답에 양반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니까 쟤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윤사해의 아이라고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의 화를 어찌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선비가 한심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고선 말했다.

“그래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다음의 아이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양반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얼굴로 선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선비가 태연한 얼굴로 그렇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죽이면 죽이는 만큼, 저는 공양으로 바칠 마지막 아이를 계속해서 데려올 텐데.”

“너……!”

양반이 당장에라도 선비의 멱살을 잡으려는 듯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양반은 허공을 배회할 뿐이었다.

양반이 선비의 멱살을 잡기 전에, 그가 능숙하게 스킬을 사용해 자리를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탄생목을 베려고 했을 때 확실히 베지 그러셨습니까? 수장님께 들키지 마시고.”

양반이 왜 탄생목 근처에 갈 수 없는가 했더니, 저런 이유에서였나 보다.

선비가 곰방대를 한 번 물었다가 연기를 뱉어내며 말했다.

“그러니 그 꼴이지 않습니까?”

양반이 분하다는 얼굴로 선비를 노려보았다. 선비는 그 시선이 우습다는 듯이 콧방귀를 뀔 뿐이었고.

그때였다.

“아이야, 설은을 너무 놀리지 마려무나.”

누군가 반쯤 열렸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각시의 등장에 양반과 선비는 서로 노려보는 것을 멈추고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각시는 둘을 보지 않고 곧장 내게 다가왔다.

“아가, 네 손목에 그것.”

각시가 가리키는 것은 팔찌였다. 정중앙에 토끼가 그려진 앙증맞은 팔찌.

“그것을 눌러 주지 않겠느냐? 내 본 것이 있어 그러니.”

각시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검은 너울 아래로 살굿빛이 도는 조각들이 잘게 떨어진 것이 보였다.

‘각시는 수장을 위해 미래를 봐야하는 존재지. 그것이 제 몸을 갉아먹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문득,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도자기 인형과도 같았던 각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어떤 미래를 보고 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네, 향화 언니.”

각시는 나를 위한다는 거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