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메마른 땅에도 꽃은 핀다(4)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각시.
<[특수 스킬] 선견지명(先見之明)>를 이용해 수장에게 미래를 알려 주던 탈.
내 눈 앞에 있는 각시는 『각성, 그 후』에서 등장했던 ‘각시’가 아닐 거다.
그렇지마는.
“향화 언니, 지금 다 알면서 물은 거죠?”
각시는 『각성, 그 후』에서 등장했던 ‘각시’와 같은 스킬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마치 청(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같은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각시의 얼굴은 검은 너울에 가려져 있어 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지금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다.
마치, 정답이라는 듯이.
그렇기에 나는 말했다.
“네, 맞아요. 저는 각성자예요.”
줄곧 비밀로 부치고 있던 사실을.
나의 대답에 각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릎을 바로 폈다. 그러나 양반은 달랐다.
“그럴 리가 없어! 저런 꼬맹이가 각성자라니!”
“설은.”
“그렇잖아, 향화! 저런 어린애가 각성자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고!”
“그건 아니지 않느냐.”
각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양반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그런 양반을 향해 말했다.
“설은 오빠, 세상에는 ‘이상 각성자’라고 해서 어린 나이에 각성자가 되는 애들도 존재해요.”
“그게 너라고?”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나의 대답에 양반은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이상 각성자라고 해서 어린 나이에 각성자가 된 놈을 알고는 있지. 하지만.”
양반이 단번에 내 앞에 다가와서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 새끼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빌빌거렸었어. 그런데 너는 뭐야?”
“리사요.”
나는 각시의 옷자락을 꼭 끌어 잡고는 나의 이름을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윤리사.”
나의 대답에 양반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나는 네 이름을 물어본 게……!”
“설은, 그만.”
각시가 양반의 말을 가로막고는 내게 부드러이 말했다.
“어찌됐든 각성자라니 다행이구나. 표식을 지울 수 있게 됐으니.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단다.”
“무슨 문제요?”
“표식을 지우기 위해서는 아가, 네가 각성자임을 탄생목에 밝혀야 하는데…….”
“향화와 나는 탄생목 근처에 갈 수 없거든.”
양반이 각시의 말을 잇고선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니까 너 혼자서 탄생목으로 가야 한다는 거지. 네가 정말 각성자라면.”
아오, 진짜! 나는 각성자가 맞다니까?! 뺨이라도 때려서 ‘내 말이나 들어라!’를 사용할까 보다!
하지만 지금은 양반의 뺨을 때리는 것보다, 돌아가는 게 급선무였다.
“리사 혼자 갈 수 있는 곳이에요?”
“아니. 혼자 갔다가는 십중팔구 길을 잃어버릴걸.”
그 말에 선비가 이곳으로 나를 데려다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구는 좋아서 손을 잡아 주고 있는 줄 압니까? 유랑단에 속해 있지 않은 자들은 이 공간에 있어서 먹이일 뿐입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이 공간은 유랑단이 아닌 자를 ‘침입자’로 규정하여 길을 잃게 만든다고 한 것 같다. 그러면서 점점 말라 죽는다고.
하지만 이건 유랑단의 인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언니랑 오빠는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해도, 선비는 갈 수 있지 않아요? 선비한테 안내해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 자식이 잘도 도와주겠다.”
“도와줄 수도 있죠! 리사를 여기로 데려다준 사람도 선비인데!”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를 이곳에 데려다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어서 데리고 오세요!”
“싫어. 나는 그 새끼 얼굴도 보기 싫단 말이야.”
양반이 되도 않는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윤리오와 윤리타의 또래로 보이지만, 양반의 나이는 분명 그보다 배 이상일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철부지처럼 굴고 있다니!
절로 열이 뻗쳐서 이번에야말로 저 고운 뺨을 때릴까 하는데, 각시가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설은, 다녀오려무나.”
“응, 다녀올게.”
양반이 언제 고집을 부렸냐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뭐 저런 탈쟁이가 다 있지?
***
윤리사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양반을 쳐다봤지만, 그는 아이의 시선을 무시하고서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향한 곳은 수십 개의 청사초롱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곳. 선비가 언제나 죽치고 앉아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선비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이 새끼 어디 갔어? 이매 놈도 안 보이네.”
평소라면 왜 왔느냐고 얼굴을 붉힐 텐데 말이다. 이매 놈은 웃는 낯짝으로 인사를 건네고.
“망할 새끼. 필요할 때는 또 없지.”
“그 망할 새끼가 나는 아니겠지?”
낯이 익은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양반은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올리고선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야, 양반 님.”
“…….”
곱슬기가 심한 남청색의 머리칼 아래로 자주색 눈이 보였다.
양반 앞에 나타난 남자가 그를 향해 반갑게 아는 체를 하며 입을 놀렸다.
“아직도 각시 님과 세월아 네월아 오순도순 살고 계시나? 그 전에 각시 님은 건강하셔?”
다분히 놀리는 목소리였다. 남자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낡고 닳아 부서지기 일보 직전으로 아는데.”
“닥쳐.”
양반이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들 듯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남자가 키득거렸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라고. 무서워서 지리겠네.”
남자는 양반을 향해 한 걸음 내딛고선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양반님께서는 누구를 그렇게 찾고 계셨을까? 나랑 같은 놈을 찾고 계시나?”
묻는 말에 양반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턱 언저리를 한 번 쓸고선 말했다.
“나는 지금 선비 새끼를 찾는 중이거든.”
“선비 새끼를, 왜…….”
“아니, 글쎄. 할미 녀석이 아주 재미난 것을 선비한테 보냈다지 뭐야? 그래서 보려고 이렇게 찾아왔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양반이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남자는 그런 양반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찾을 수가 없으니, 원.”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였으나.
“그러니 양반 님. 혹시 공양으로 바쳐질 애새끼가 어디 있는지 알아? 할미 녀석이 말해 준 아주 재미난 것이 바로 그거거든.”
이어진 말에서 느껴지는 건 광기에 찬 웃음기였다.
남자가 양반이 알아차리지도 못할 새에 그의 앞에 다가와 키득거렸다.
“네 각시님을 헌각시로 만들어 줄, 탄생목의 마지막 공양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반은 검을 뽑아 이를 휘둘렀다.
후웅-!
양반이 베어낸 것은 허공이었다.
양반의 검을 가볍게 피해낸 남자의 양손에는 어느새 날카롭게 벼린 각기 다른 두 자루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양반 님, 나랑 한 번 해 보려고? 나한테는 안 될 텐데?”
“그거야 모를 일이지.”
양반의 말에 남자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 위에서 달갑지 않은 목소리만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그대로 손에 쥐어진 두 자루의 검을 휘두르려고 했을 테다.
“거기 두 분,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주세요. 이곳은 제가 좋아하는 곳이란 말이에요.”
다소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두 명의 탈이 고개를 들었다.
“이매.”
“오랜만이에요, 백정 씨. 영영 돌아오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요.”
“웃기는 소리.”
양반의 속을 긁어대던 남자, 백정의 손에서 두 자루의 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자리한 것은 탈이었다.
다른 탈들에 비해 주름이 가득한 백정탈.
“이렇게 탈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왜 이곳을 떠나?”
백정이 손에 쥔 탈을 얼굴에 덮어쓰고는 걸음을 돌렸다.
“양반 님, 그럼 나중에 보자고.”
백정이 남긴 말에 양반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양반이 그런 그를 보며 안타깝다는 얼굴을 보였다.
“백정 씨가 돌아오셨다니, 이거 곤란하게 됐네요. 할미 씨가 보낸 아이의 정체도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고.”
그러나 그는 즐겁다는 듯이 양반에게 물었다.
“윤사해의 아이를 돌려보낼 방법은 찾으셨나요, 양반 씨?”
양반은 답하는 대신 칼자루를 손에 쥔 채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겼다.
향하는 곳은 각시의 저택.
이매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선비 씨가 돌아오면 찾아가라고 할게요. 그럼, 양반 씨. 조심히 돌아가시기를.”
양반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손에 꼭 끌어 쥔 채, 다른 손으로 제 얼굴에 탈을 쓸 뿐이었다.
***
붉은 기와가 놓인 저택.
“그러면 언니는 단 한 번도 하늘을 본 적 없어요?”
“그래.”
나는 각시와 함께 저택의 대청마루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표식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은 찾게 됐지만, 당장 그 방법을 행할 수는 없으니 이러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각시의 대답에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니지, 하늘이 아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까맣게 칠해진 천장 같은 것이었다.
각시가 나를 따라 위로 고개를 올리고선 말했다.
“설은, 그 아이가 말해 주는 대로 그저 하늘을 그려보기만 했단다.”
“어떻게요?”
“하늘이란 것은, 도화지와도 같이 그리는 대로 물드는 것이구나…….”
각시가 목소리의 끝을 흐리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 생각하며 그려 보았지.”
들려오는 목소리에서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각시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다른 것을 그려 본 적은 없어요?”
“무엇을?”
“언니가 이곳을 벗어나, 하늘을 보는 그 순간을요.”
각시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보았지. 나뿐만이 아니라, 나 이전의 각시들 모두가.”
각시의 고개가 굳게 닫혀 있는 저택의 대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볼 수가 없더구나.”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이곳을 벗어나는 미래 따윈, 절대 볼 수가 없었지.”
검은 너울에 가려져 있는 각시의 얼굴은 분명 울고 있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각시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가,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도 하나 본 것이 있단다.”
“뭐를 봤는데요?”
“내가 가장 친애하는 이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었지.”
“설은 오빠요?”
각시는 말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짓고서.
“그런데요, 언니. 설은 오빠는 언니 없이는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거라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향화.”
소리도 내지 않고 돌아온 양반이.
“그 꼬마를 내게 넘겨줘.”
양반탈을 제 얼굴에 덮어쓴 채 나를 향해 검을 겨누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저 망할 새끼가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