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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73)화 (73/500)

73화. 메마른 땅에도 꽃은 핀다(2)

“각시……?”

‘각시’라면, 유랑단 내에서 수장 다음으로 큰 권력을 가졌던 탈쟁이로 기억한다.

<[특수 스킬]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는 미래 예지 스킬로 수장의 곁에 찰싹 붙어 있었지?

그의 옆에서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던 게 정말 장관이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각시는 유랑단을 뒤집어엎으려던 저세상의 계획에 몇 번이나 훼방을 놓은 탈쟁이기도 했다.

그런 각시에게 이름이 있었다고?

무엇보다 『각성, 그 후』에서 언제나 수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던 것과는 달리, 각시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그리고 저 녀석은 설은. 할 일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나의 집을 찾아오는 녀석이지.”

“‘할 일 없이’라니? 나는 우리 고운 향화의 얼굴을 보기 위해 매일 대문을 넘는 중이라고.”

양반뿐이었다.

혹시나 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붉은 기와집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각성, 그 후』의 내용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특수 스킬] : C+F=검색창>을 사용해서, 『각성, 그 후』의 텍스트라도 확인해 봐야 싶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에 각시가 입을 열었다.

“설은, 아이 앞에서 실없는 소리 말거라.”

각시의 매몰찬 말에 양반이 울먹였다.

“너무해…….”

정말, 저 새끼가 조금 전까지 저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라고요?

주인의 손길을 바라는 한 마리의 강아지를 보고 있는 기분인데요.

나는 짜게 식은 얼굴로 양반에게 물었다.

“오빠도 탈쟁이에요?”

“우와, 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오빠라고? 내 나이가 몇인지는 알고 그 소리 하는 거야?”

“그럼,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탈쟁이예요?”

양반이 잠깐 당황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탈쟁이야.”

그러고는 각시의 허리에 손을 감고는 미소를 그렸다.

“각시님을 사랑하는 양반님이지.”

“아가, 실없는 소리는 듣지 말고 한 귀로 흘려버리려무나.”

안 그래도 그러는 중이에요.

그보다 양반이라니.

『각성, 그 후』에서 저세상에게 가장 먼저 죽었던 탈쟁이가 눈앞의 오빠, 아니. 할아버지라고?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아닌 것 같아? 나한테 불만 있으면 구시렁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그런데 성격을 보면 맞는 것 같다.

『각성, 그 후』에서 양반은 성격이 지랄 맞기로 소문난 녀석이었으니까 말이지.

“설은, 내 분명 아이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 그리 말했을 텐데.”

“향화! 내가 언제 걔를 함부로 대했다고 그래? 그냥 불만이 있으면 바로 말하라는 거지. 고치게.”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조금 전까지 나를 죽이려고 했으면서 나를 함부로 대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양반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

“있잖아, 꼬맹아. 염치없지만 그냥 오빠라고 해 주면 안 될까? 아니면 아저씨도 괜찮아. 할아버지 소리 들으니까 엄청 늙은 것 같거든.”

“늙은 것 맞지 않으냐.”

“향화!”

양반의 우는 소리에 나는 그를 칭하는 호칭을 바꿔 주기로 했다.

“그럼, 오빠.”

어떻게 봐도 윤리오와 윤리타의 또래로 보이는 외모에, 차마 양반을 ‘아저씨’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아량을 베푼다고 해서 안 놀리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오빠는 리사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리사한테 친근하게 구네요?”

“그… 그건…….”

양반이 식은땀을 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각시는 그런 양반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각시의 품에 꼭 안긴 채 방긋 웃었다.

“리사는 오빠가 리사한테 사과 한 마디 없는 게 불만인데.”

사실, 양반이 내게 하려던 짓을 생각하면 사과 한 마디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있는 힘껏, 양반의 저 희고 고운 뺨을 때린 뒤에 머리를 박으라고 외쳐야만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내가 사과만 들먹인 건.

“내가 대신 사과하마, 아가. 설은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거든. 그렇기에 성격이 모난 구석이 많단다.”

나를 구해 준 각시 때문이었다.

그런데요, 각시. 양반의 성격이 모났다고 말하기보다는 지랄 맞는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요?

일곱 살 난 애를 향해 검을 들이밀면서 단번에 죽여 주겠다니 뭐니 했었는데 말이에요.

자신을 대신하여 내게 사과한 각시에게 미안한지, 양반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하지만, 향화. 너도 들었잖아. 공양으로 바쳐질 아이라고.”

변명했다.

아니, 저 망할 탈쟁이가? 변명할 시간에 미안하다고 나한테 사과나 하라고!

양반의 말에 각시가 그를 타이르듯이 달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이를 위협하면 안 되지. 그리고 선비가 이 아이를 왜 내게 데려다 주었을 것 같으냐, 설은?”

각시는 내 손목에 새겨진 ‘死’를 조심스럽게 매만지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바깥으로 다시 돌려보내기 위해서 이 표식을 지워 달라는 거겠지.”

정답이에요, 각시님. 곁에 있는 양반님과는 다르게 엄청 똑똑하시네요?

아니면 가지고 있는 <[특수 스킬] 선견지명(先見之明)>를 이용해 선비의 뜻을 읽은 건가?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스킬이니, 선비가 어떤 의도로 나를 자신에게 데려왔는지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각시는 내가 알고 있는 『각성, 그 후』의 각시와 다른 것 같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각시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니, 설은. 이 아이는 나의 귀한 손님인 게다. 알겠느냐?”

양반이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네네, 알겠습니다. 그 꼬맹이는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을게. 향화의 귀한 손님이니까.”

“그래, 고맙구나. 이왕 그러기로 한 거, 아이에게 사과하렴. 내가 너를 대신하여 사과를 했다고 하나.”

“진정성이 안 느껴질 거라는 거지? 알았어, 사과하면 되잖아.”

양반이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미안, 꼬맹아. 네가 마지막 공양으로 바쳐질 아이라기에 정신이 잠깐 훼까닥 했었어.”

“무서웠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놀란 거라면 몰라도.”

“설은.”

각시의 부름에 양반이 단번에 태도를 고쳤다.

“그래, 많이 무서웠겠지. 나 같아도 무서웠을 거야.”

각시, 양반을 다루는 실력이 아주 수준급인데?

하지만 각시의 양반 다루는 솜씨에 감탄하고 있을 겨를은 없었다.

“언니. 리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할미에 의해 이곳에 떨어진 지 수십 분은 지났을 터였다.

지금쯤 저세상과 친구들은 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겠지. 엄청 찾고 있을 텐데…….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각시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답해 주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게끔 해 주마. 다만, 네 손목에 새겨진 표식은 지우기 까다로운 것이라 시일이 걸릴 수도 있단다.”

“왜요?”

빨리 안 돌아가면 윤사해가 엄청 걱정할 텐데.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윤사해라면 나를 찾기 위해 무슨 일이든 저지를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선비의 걱정대로 유랑단에게 전쟁을 선포한다거나 그런 거 말이지.

유랑단이 아니더라도 나를 납치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지하 길드 모두에게 전쟁을 선포하거나.

윤사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언니, 왜 빨리 지워 줄 수 없는 건데요? 빨리 지워 주면 안 돼요?”

“향화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꼬마.”

양반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내 오른쪽 손등을 가리켰다.

“네 손등에 새겨진 표식은 네가 마지막 공양인 것을 뜻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왜…….”

“왜기는 왜야?”

내 말을 끊은 양반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뭐든지 가장 귀한 것을 마지막에 바치기 마련이거든. 그런데 그 귀한 것이 도망을 가려고 한다? 잘도 도망가게 해 주겠다.”

그러니까 내 손목에 그려진 표식은 일종의 족쇄란 말이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마지막이란 건 무슨 뜻이에요?”

이매도, 눈앞의 양반도 그랬다. 내가 마지막으로 바쳐질 공양이라고.

그러니까 이 말은 나 이전에 공양으로 바쳐진 아이들이 있다는 뜻.

각시는 입을 다물었고, 양반은 그런 각시의 눈치를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마지막이라는 거지. 너 이후로는 탄생목에 아이를 안 바쳐도 된다는.”

“도대체 뭘 위한 산 제물인데요?”

그보다.

“지금까지 몇 명을 바친 거예요? 살아 있는 아이를.”

“야, 꼬마.”

양반이 짜증이 서린 얼굴로 입을 열려는 찰나.

“바쳐진 아이는 지금까지 총 세 명이란다. 모두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팔아 버린 아이들이었지.”

각시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대답에서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저세상.

지금쯤, 윤사해와 함께 애타게 나를 찾고 있을 주인공.

……생각해 보니 걔는 나를 애타게 찾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각시는 나를 품에서 내려 주고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무엇을 위한 제물이냐면…….”

각시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너울이 가냘픈 손에 의해 걷어졌다.

“바로, 나.”

드러난 얼굴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이 곳곳이 깨져 있었다.

그래, 마치 딱딱한 바닥에 부딪쳐 깨지기 일보 직전의 도자기 인형처럼 말이다.

각시가 붉은 눈을 휘게 접으며 자조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나를 새로 탄생시키기 위해 아이들은 탄생목에게 바쳐졌단다.”

파스슥-

잘게 금이 간 고운 얼굴에서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각시.

『각성, 그 후』에서는 수장의 곁에 찰싹 붙어 앉아 그를 위한 미래를 점지하던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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