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메마른 땅에도 꽃은 핀다(1)
“아오, 시바! 망할 할미 새끼!”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아픔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화가 날 뿐.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또 어디야?!”
곳곳에 뜬 청사초롱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게 보였다.
안개만 자욱하게 깔려 있었으면 귀수산에 위치한 이매망량으로 이동한 줄 알았을 거다.
“도대체 나를 어디로 보낸 거야?”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건 이곳이 사령의 숲이 아니라는 거다.
“불행 중 다행이네.”
“뭐가요?”
가까이서 들린 목소리에 숨을 들이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
그곳에서 들려온 목소리.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경직된 고개를 억지로 움직였다.
목소리가 들린 쪽에는 한쪽 눈에 안대를 착용 중인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입이 험한 꼬마 분.”
“아… 안녕하세요……?”
나의 인사를 받은 남자가 드러난 푸른 눈을 둥글게 접고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선비 씨, 어떻게 해요? 할미 씨가 사고를 크게 치신 것 같은데.”
“선비?”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어렵지 않게 선비로 추정되는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갈색 머리칼에 금색 눈을 지닌 남자가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이 망할 여자가……!”
긴가민가했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선비가 분명해 보였다.
선비가 짜증을 부리자 나를 놀래킨 남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할미 씨가 선비 씨를 많이 생각해 주고 있나 봐요. 이것 좀 보세요.”
덥썩, 남자에 의해 오른손이 붙잡혔다. 붙잡힌 오른쪽 손등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死.
죽음을 뜻하는 한자였다.
선비가 내 손등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을 구겼다.
“이 여자가 진짜…! 아이를 빼돌렸을 뿐만 아니라, 표식까지 훔쳤었다니……!”
“음? 지난번에 말씀해 주시려다가 말았던 할미 씨의 비밀에 관한 건가요?”
“당신은 알 것 없습니다.”
“네네, 그러시겠죠.”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쨌든 할미 씨도 알고 보면 착하다니까요? 탄생목에 공양으로 바칠 마지막 아이를 이렇게 찾아와 주시다니요.”
할미가 착한 것 같다니. 미친놈인가 싶었다. 그보다, 뭐?
“공양……?”
멍하니 읊조린 나의 목소리에 남자가 키득거렸다.
“네, 공양이요. 쉽게 말하면 산 제물이죠. 무슨 뜻인지 알겠나요?”
아주 잘 알겠다, 이 망할 새끼야!
선비랑 같이 있는 걸 보면 탈쟁이 새끼인 것 같은데 누구지?
“애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이매. 그 아이는 공양으로 바쳐서는 안 됩니다.”
아하, 이매였구나.
『각성, 그 후』에서 잊을 만하면 나왔던 탈쟁이 새끼를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영광은 아니었고 불안해졌다.
그야 『각성, 그 후』에서 이매의 등장은 하나의 떡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주연 중 한 명이 죽을 거라는, 그런 떡밥.
내가 그래서 저 새끼를 굉장히 싫어했었지! 저런 면상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예쁜 쓰레기 취급해 줬을 것 같다.
여전히 내 오른손을 붙잡고 있는 이매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선비에게 물었다.
“공양으로 바치면 안 된다니요?”
“당신도 그 아이가 윤사해의 딸이라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이매망량과 전쟁이라도 벌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조용히 돌려보내야 합니다.”
웃기는 소리였다.
선비는 나와 함께 사령의 숲에 떨어졌을 때, 사고로 치자니 뭐니 하면서 나를 내버려두고 갔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윤사해의 이름을 들먹이는 꼴이라니.
이매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선비에게 물었다.
“이 아이를 사령의 숲에 던져 준 적이 있지 않나요, 선비 씨?”
선비가 정곡에 찔린 듯한 얼굴로 이매를 쳐다봤다. 이매가 입꼬리를 올리고선 말을 이었다.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에요, 선비 씨. 단지 던져 줘야 하는 장소가 탄생목으로 바뀌었을 뿐.”
“그래도 안 됩니다.”
선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는 말 그대로 ‘사고’였기에 그런 겁니다.”
“사고요?”
“네. 사고 말입니다. 윤사해가 제 자식이 사령의 숲에 떨어진 것을 알고, 그 짓을 누가 벌였는지 알게 되더라도…….”
선비가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가 이내 분명하게 말을 끝맺었다.
“변명할 말이 있었기에 그런 거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이매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선비는 그런 이매를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가 윤사해의 자식을 노렸다는 것에 대해 어떠한 변명거리도 만들 수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선비는 그렇게 말하며 내 오른쪽 손등에 새겨진 표식을 가리켰다.
“윤사해가 이를 알게 된다면, 유랑단은 이매망량과 전쟁을 벌이게 될 겁니다.”
“네네, 무슨 뜻인지는 아주 잘 알겠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매는 선비에게 물었다.
“하지만 선비 씨, 아이를 어떻게 돌려보내려고요? 이렇게 표식도 새겨져 있는데.”
이매가 선비에게 내 손등을 보여 주며 선하게 웃음을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매의 뺨을 향해 당장에라도 손을 휘두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붙잡힌 손목에 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뚱한 얼굴로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이매를 노려보는데, 선비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표적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께 데려갈 겁니다.”
“데려가서 지우면?”
“당연히 돌려보내야지요.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을 뭘로 들은 겁니까?”
“제대로 듣기는 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생각이 들어서요.”
이매가 방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선비 씨는 이 아이를 돌려보낸 뒤에, 공양으로 바칠 다른 아이를 과연 구해 올까?’”
그러고는 선비를 놀리듯이 말을 덧붙였다.
“뭐, 그런 생각이요.”
선비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매가 그런 선비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선비 씨. 지금까지 공양으로 바칠 아이를 찾는 것을 미뤄 왔잖아요.”
“그건.”
“함과의 일로 바빴고, 또 서커스와의 일로 바빠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아무래도 정답이었는지, 선비가 입을 다물었다.
선비의 정곡을 찔러 버려서 기분이 좋은지, 이매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알죠, 선비 씨? 사실 그것들 선비 씨가 굳이 맡아서 처리하지 않아도 됐을 일이란 거.”
“수장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어련하시겠죠.”
이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그래도 좋았어요. 오랜만에 선비 씨가 맡은 일을 실패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입을 다물고 있던 선비가 두 눈을 낮게 내리깔고서 으르렁거렸다.
“암만 생각해도 당신 성격은 무척이나 더럽습니다, 이매.”
“칭찬 고마워요.”
이매가 능청스레 대꾸하고는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앗싸, 자유로워졌다! 이대로 이매 새끼의 뺨을……!
“망할! 이거 놔요!”
때리지 못했다. 선비가 이매 대신 내 손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선비는 내 외침을 무시하고서 이매를 지나쳐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놔요, 놓으라고! 리사는 혼자서 걸어갈 수 있어!”
“누구는 좋아서 손을 잡아 주고 있는 줄 압니까? 유랑단에 속해 있지 않은 자들은 이 공간에 있어서 먹이일 뿐입니다.”
먹이일 뿐이라니.
유랑단은 이곳에서 들짐승이라도 키우고 있는 걸까?
드는 의문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선비가 나를 흘긋거리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길을 잃게 만들어, 침입자를 점점 말라 죽게 하는 공간이란 말입니다.”
아하, 그래서 먹이라는 표현을 쓴 거구나? 공간을 유랑하다가 죽어서.
“하지만 아저씨는 리사가 길을 잃어도 리사를 찾을 수 있잖아요! 이 공간의 주인이니까!”
“누가 주인이랍니까?”
뭐야, 아니었어?
유랑단의 은신처는 모두 선비가 만들고 있을 줄 알았는데!
선비가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관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시고 빨리 따라오기나 하십시오.”
“아야……!”
강하게 끌어당기는 손에 앓는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이 망할 선비 새끼야! 아동 보호도 모르냐?!
선비라면 모를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비는 단예와 단아의 납치에 일조한 새끼였다. 이런 놈에게 ‘아동 보호’라니, 코웃음이 절로 나오는 소리겠지.
그렇게 선비에게 질질 끌려가는데,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경고가 들려왔다.
“거기, 더는 다가오지 마.”
그 목소리에 선비가 멈추었고, 나는 뒤늦게 선비와 함께 어느 저택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붉은 기와가 인상적인 한옥이었다.
우리를 멈춰 세운 사람은 남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하얀 눈과도 같은 남자.
남자가 은백색의 눈을 찡그리며 날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누군가 했더니, 선비 새끼였잖아? 옆에 애새끼는 뭐야?”
“탄생목에게 공양으로 바쳐질 아이입니다. 할미, 그 녀석이…….”
쐐액- 챙!
끝이 뾰족하게 선 단검 하나가 정확히 내가 서 있던 곳에 꽂힌 게 보였다.
시, 시바. 선비 새끼가 나를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난 이미 죽었을 거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나를 향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놔, 죽여 버리게.”
“드릴 생각입니다만, 죽이는 건 곤란합니다.”
이 망할 새끼들이 내가 물건인 줄 아나 보다.
“윤사해의 딸입니다. 그의 화를 감당할 수 있으시다면 죽여 보시지요.”
아니, 이 미친 탈쟁이 새끼가?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에 두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 와중에 남자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못 죽일 줄 알아? 아가야, 이리 오련. 내가 아프지 않게 단번에…….”
“설은.”
미친놈의 말을 누군가 끊어 버렸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나이스였다.
끼익-!
낡은 나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너울을 뒤집어 쓴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가 겁먹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 말했을 텐데. 아이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설은’이라고 이름 불린 남자가 시무룩한 얼굴로 꿍얼거렸다.
“아직 안 건드렸는데.”
거짓말! 건드리려고 했는데 선비 때문에 실패한 거잖아!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입을 벌리는데. 검은 너울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 있는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안녕, 아가. 못난 녀석들 때문에 험한 것을 많이 봤겠구나.”
내게 인사를 건넨 여자는 유랑단 내에서 몇 없다는 정상인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나를 물건처럼 여기고 있는 빌어먹을 탈쟁이 사이에서 나타난 구세주였다.
여자는 나를 보는 듯하더니, 이내 선비를 향해 고개를 움직였다.
“아이야, 그러게 내 말하지 않았느냐. 다른 이의 손에 피를 묻혀도, 결국 그건 네 손으로 피를 묻히는 일이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업보를 조심하라는 게다. 네가 이곳에 떨어진 이 작은 아이를 내게 데려다 준 것도 그 일환일 테니.”
여자는 선비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내밀어진 손에 쭈뼛거리다가 여자를 향해 다리를 움직였다. 선비가 때마침 내 손목을 놓아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자가 나를 조심히 안아 들고는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선비에게 말했다.
“그래도 아이를 이리 내게 데려다주어서 고맙구나.”
“이곳이 저 애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건 사양이니 말입니다. 제 할 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찬바람이 쌩쌩 느껴지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선비는 그 말을 남기고선 미련 없다는 듯이 걸음을 돌렸다.
양반이 그런 선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선비 새끼야. 영원히 오지 말고.”
“설은, 애 앞에서 그런 말은 쓰지 마려무나.”
여자의 타박에 양반이 입술을 삐죽였다.
저 남자가 진정 저를 아프지 않게 죽여 주겠다고 했던 새끼란 말입니까? 너무 다르잖아.
조금 전까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양반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는데 여자가 내게 물었다.
“아가, 이름이 무엇이냐?”
나긋하게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는, 여자를 향한 나의 경계심을 절로 풀게 하였다.
그렇기에 나의 이름을 답해 주었다.
“리사요. 윤리사.”
내뱉자마자 황급히 입을 가로막았지만 말이다. 여자가 내 행동이 귀엽다는 듯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내 이름은 혜향화.”
여자가 나를 안은 채, 낡은 문을 열었다.
끼익, 허공을 울리는 불유쾌한 소리와 함께 여자의 나긋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탄생목에서 태어난 각시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