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대신 온 것은 가뭄인지라(4)
스킬이 해제됐다니?
나타난 메시지에 얼굴을 찌푸리고는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에 관한 것을 살펴보았다.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
-지능을 가진 생명체에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발동 조건: 뺨을 때린 후, 원하는 바를 말하십시오.
※ 소리 나게 때릴수록 스킬 효율이 올라갑니다.
눈앞에 뜬 푸른 시스템 창은,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만 알려 주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는 뺨을 맞은 사람이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자동적으로 해제됐다.
아니, 잠깐.
‘아빠 마음 싹 다 표현하는 거야!’
윤사해에게 이 스킬을 적용했을 때 스킬이 얼마나 지속됐었지?
분명한 건 백시진보다 일찍 해제됐던 것 같다.
나는 미간을 한껏 좁혔다가 도윤이에게 물었다.
“도윤아, 시진이 아저씨는 A급 각성자지?”
“응? 응! 그리고 우리 아빠도 A급 각성자야!”
얼떨결에 백시준의 각성 등급도 알게 됐다.
어쨌든.
‘내가 원하는 것을 한 번에 이뤄 주기 힘들 경우에는, 각성 등급이 낮은 만큼 스킬이 지속되는 건가?’
일리가 있는 추측이었다.
망할 내 추측이 맞는다면 앞으로 저런 류의 바람을 말할 때는 시기를 특정지어야 하잖아.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 상대의 뺨을 때려야 하는 것도 서러운데, 뺨 때리면서 언제까지 뭐 어떻게 해 달라고도 말해야 한단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 정말.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에서 머리를 끌어 쥐는데, 도윤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게 물었다.
“리사야,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봐?”
“갑자기 궁금해졌나 보지.”
도윤이의 물음에 답해 준 사람은 저세상이었다.
저세상이 스콘 하나를 콕 집어 입에 넣고는 내게 물었다.
“아니야?”
“마, 맞아!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랬어!”
그러면서 윤사해의 각성 등급도 알려 줄까 했지만, 자랑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대신, 나는 저세상 몫으로 나온 사이다를 홀짝 거리고는 괜스레 창밖을 흘긋거렸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사?”
도윤이도 한태극 의원의 세쌍둥이 손주들도 의문에 가득 찬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윤리사, 왜 그래?”
저세상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그와 친구들의 부름에 일일이 답해 줄 정신이 없었다.
넓게 난 창밖으로 정답게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 때문이었다.
“왜……?”
라는 의문이 절로 나오는 조합이었다. 백시진과 함께 즐겁게 데이트 중일 제인 아일리가.
“어? 제인 누나다! 그런데 옆에는 누구지? 우리 삼촌은 어디 갔고?”
윤설아와 함께였기 때문이다.
나는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리고는 곧장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저세상이 그런 나를 붙잡기 위해 소리 질렀다.
“윤리사? 야! 어디 가!”
“화장실!”
……이 급한 건 당연히 아니었고, 나는 화장실 쪽에 있는 비상구로 향했다.
물론, 나가는 건 쉽지가 않았다.
“잠깐만요. 친구 어디 가려고요?”
비상구 근처에 있던 키즈 카페의 직원이 나를 붙잡고는 물었다.
“아빠가 밖에 있어서요!”
내 대답에 직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긴, 밖에 아빠가 있다면서 멀쩡한 출입문을 두고 비상구로 나가려하고 있으니 못 믿을 만도 했다.
하지만.
“친구, 이름이 뭐예요?”
이렇게 잡혀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키즈 카페의 직원에게 내 이름을 답해 주는 대신 있는 힘껏 손을 휘둘렀다.
“리사를 밖으로 나가게 해 줘요.”
쫘악-!
울린 소리와 함께 직원에게 스킬이 걸렸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직원은 내가 나가기 쉽게 비상구의 문을 열어 줬고, 나는 그대로 키즈 카페를 벗어났다.
다행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제인 아일리와 윤설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서로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게 보기 좋…… 기는 개뿔.
“백시진, 그 자식은 여자 친구 놔두고 어디로 간 거야?!”
만나기만 해 봐! 뺨이 아니라 머리통을 때려 줄 거야!
나는 그렇게 다짐하고는 제인 아일리와 윤설아의 뒤를 몰래 밟았다.
문득, 저 둘의 뒤를 쫓아가도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뭐든 되겠지.”
내게는 스킬 발동 조건이 뭣 같은 S급 스킬이 다수 있었다.
윤설아가 제인 아일리를 위협하려고 들거나, 내 존재를 알아차려 나를 잡으려고 들면 바로 사용해야지.
하지만 내가 스킬을 사용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서로 웃고 떠들며 정답던 제인 아일리와 윤설아가 교차로에서 헤어진 것이다.
윤설아는 건너편으로 횡단보도를 건넜고, 제인 아일리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가던 길을 계속 가는데.
“제인!”
저 멀리서 백시진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두 손에 커피를 한 잔씩 들고서 말이다.
“뭐야…….”
여자 친구 놔두고 어디 갔나 했더니 커피 사러 간 거였어?
절로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걸음을 돌렸다. 저세상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키즈 카페로 가기 위해서였다.
“또, 너네?”
머리 위에서 짜증이 서려 있는 목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나는 키즈 카페를 향해 열심히 달려갔을 거다.
분명, 제인 아일리와 헤어져 건너편으로 길을 건넜던 윤설아의 목소리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주친 건 그녀의 핏빛보다도 붉은 눈이었다.
“왜 자꾸 따라다니지? 성가시게. 그래도 오늘은 너 혼자라서 다행이네, 정말로.”
윤설아는 웃고 있는 낯이었지만,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선비 새끼가 공양에 바칠 아이를 제대로 찾고 있던가? 아닌 것 같았는데.”
윤설아가 무릎을 굽히고는, 붉은 눈에 웃음기를 가득 담으며 내게 물었다.
“그거 아니, 애기야?”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지만 왜인지 소름이 돋아났다.
“네 아버지가 주변에 없으니 령들이 떠들어대고 있어. 너를 먹어 치우라고.”
령(靈).
그 말에 나는 확신했다. 눈앞의 여자가 유랑단 아홉 탈 중 하나인 ‘할미’라고.
그보다 그 전에 ‘선비’의 이름을 꺼냈었다. 이건 의심할 여지도 없지.
할미가 나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이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하나.
“마! 자신……!”
있냐고 외치기도 전에 몸이 뒤로 떠밀리고 말았다.
아니, 저기요! 스킬 사용하기 전에 밀치기 있기, 없기?!
***
쿠웅, 쿵!
점심이 지난 무렵의 키즈 카페는 소란스러웠다.
그 소란 가운데서 책을 읽고 있던 한단예가 입가에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리사가 너무 늦는 것 같지 않니, 첫째야?”
“그러게.”
한단예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고 있던 한단이가 읽던 것을 접고는 저세상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저세상이 제 몫의 사이다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변비라도 걸렸나 보지. 아니면 휴지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거나.”
윤리사가 들었다면, 장난하느냐면서 저세상의 뺨을 때렸을 소리였다.
어쨌거나 윤리사는 지금 이 자리에 없다. 백도윤과 한단아는 키즈 카페 내에 마련되어 있는 놀이방으로 놀러간 상태.
저세상은 한단예, 그리고 한단이와 함께 셋이서 남겨진 이 상황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그렇다고 백도윤과 한단아가 있는 놀이방으로 가기에는…….
‘절대로 싫어.’
정신 연령의 수준이 맞지 않았다.
‘차라리 윤리사랑 소꿉놀이나 인형놀이하면서 놀고 말지.’
저세상이 타는 속에 반쯤 남아 있던 사이다를 단숨에 비워 버리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그런데 윤리사 얘는 도대체 화장실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변기통에 빠지기라도 했나?’
만약 그랬다면 큰일이었다.
그럴 일이 일어날 리가 없건만, 저세상은 슬슬 걱정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단예야, 어디 가려고?”
“혹시 모르니까 화장실 좀 다녀올게, 첫째야.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으니까.”
“조심히 다녀와.”
한단예가 먼저 일어나지만 않았더라면, 저세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을 찾아갔을 거다.
애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고 있는데, 살펴봐 줄 수 있겠냐고 말이다.
저세상이 화장실로 향하려는 한단예를 보면서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글쎄요, 그러지 않을 수도 있죠.”
한단예가 저세상을 향해 눈웃음을 지어 주고는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저세상이 그 뒷모습을 쫓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단예.
한태극 의원의 세쌍둥이 손주 중 한 명으로 지난 세계에서는 만날 일이 없던 아이였다.
그야, 일곱 살이란 어린 나이에 죽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랬는데 말이지.’
저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의문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사령의 숲에서 윤리사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친구들 구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것뿐이야.’
윤리사가 친구 하나는 기가 막히게 구한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찾으러 가려고 하다니.’
한단예가 가지 않았더라면 본인이 직접 윤리사 좀 살펴봐 달라고 직원을 부르려고 했으면서, 저세상은 그렇게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쟤는…….’
저세상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한단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닿는 시선을 느꼈는지, 한단이가 저세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세상이 형?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아무것도 없어.”
저제상이 고개를 내젓고는 마지막으로 남은 스콘 하나를 콕 집었을 때였다.
“세상이 오빠, 지금 당장 아저씨를 불러 주세요. 리사네 아버지요.”
윤리사를 살피러 화장실로 향했던 한단예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입을 열었다.
“리사가 사라졌어요.”
벼락같이 날아든 말에, 저세상은 집어 들었던 스콘을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