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대신 온 것은 가뭄인지라(3)
설마 윤사해가 거절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오늘 나를 데리러 유치원에 온 사람은 윤사해였다. 윤리오와 윤리타는 교실 청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아직 학교라고 했다.
그렇게 윤사해와 함께 유치원에서 돌아와 저세상과 사이좋게 간식을 먹고 있던 나는 스푼을 내려놓았다.
“왜? 리사는 단예랑 단아랑 그리고 단이네 할아버지 만나고 싶은데.”
“그 영감이.”
“영감?”
윤사해가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어르신께서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거든.”
거짓말.
내 시선을 피하면서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한태극과의 대화가 불편해서 저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윤사해를 한 번 떠볼 겸, 미끼를 던져 보았다.
“그런데 아빠, 그 던전에서 엄청 좋은 아이템이 나온다고 했는데 필요 없나 보네?”
“응?”
“오빠들 아프면 바로 나을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했는데!”
윤사해라면 팔라크의 둥지에 관한 정보를 옛적에 입수했을 터.
아니나 다를까, 윤사해가 내 말에 고뇌에 찬 듯 눈가를 찡그렸다. 나는 거기에 유효타를 먹이기로 했다.
“리타 오빠는 매년 크게 한 번씩 감기 몸살을 앓잖아? 그리고 세상이 오빠도 저번에 아팠었어!”
“나는 다 나았어.”
안 물어봤어, 주인공님.
윤리타가 매년 크게 한 번씩 앓는다는 건, 『각성, 그 후』에서 나왔던 정보였다.
그러고 보니 윤리타와의 첫 만남 때, 함께 있던 윤사해가 그에게 열이 내렸다느니 뭐니 했었지?
윤사해도 이를 기억하는지,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고는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후에 나온 대답은.
“그래도 거절하렴.”
……이었다.
뺨이라도 때릴까 했지만, 나는 윤사해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를 깨닫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윤사해가 열심히 미끼를 물어 준 덕분에 깨달은 것이었다.
‘청 가문 때문인가 보네.’
현재 L급의 회복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던전인 팔라크의 둥지는 청 가문의 것이었다.
청해솔과 청해진이 속해 있는 가문, 남해의 청 가문은 자신들이 거주자의 후손이란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각성, 그 후』에서 저세상이 그들의 본관인 남해를 방문했을 때에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네가 감히’와 ‘너 같은 인간이’였었지?
그런 이들의 것을 건드리면 굉장히 피곤해질 게 뻔했다.
윤사해는 그것을 알고 한태극과의 만남을 꺼려하는 거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팔라크의 영약이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청 가문과는 얽히지 않는 게 최고였다.
「“우리 집안의 인간들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지 않아.”
“그럼,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득히 먼 곳에 계시는 거주자와 다를 바 없는 아주 진귀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지.”
청해솔이 저세상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고는 푸른 눈을 휘게 접었다.
“그들과는 다르게, 너나 나 같은 ‘인간’을 아주 손쉽게 죽일 수 있는.”」
그런 인간들인데 건드려 봐. 아주 이를 갈고 복수하려고 들 터였다.
실제로 저세상은 청가의 사람들을 건드렸다가 곤혹을 꽤 치렀었다. 청해솔이 없었다면 진작 죽었을 만큼.
“뭐야, 왜 그렇게 봐?”
“세상이 오빠가 너무 잘생기고 예뻐서 쳐다봤어. 우와! 세상이 오빠 얼굴에서 빛이 난다, 빛이 나!”
“아저씨, 윤리사 이상해요.”
망할 놈.
어쨌든 청가는 그런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집안이니, 최대한 얽히지 않는 게 좋았다.
윤리오와 윤리타의 친구가 ‘청해진’이란 것에서 이미 얽힌 것 같지만 말이지.
나는 테이블 위에 놓았던 스푼을 다시 들고는 말했다.
“알았어, 단예한테는 힘들 것 같다고 리사가 말할게.”
“미안하구나, 리사.”
“아니야!”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는 않고, 나는 방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단예랑 단아랑 단이네 할아버지랑 만나겠지!”
***
그렇게 맞이한 다음날.
나는 유치원에서 단예를 만나자마자 윤사해가 거절했음을 밝히면서 사과했다.
“괜찮아, 리사. 네가 사과할 게 뭐가 있어.”
“그치만.”
“정말 괜찮아. 리사네 아버지라면 거절하실 줄 알았거든. 할아버지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게. 대신…….”
단예가 목소리의 끝을 흐리고는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우리랑만 만나는 건 리사네 아버지가 허락해 주실까?”
“허락해 줄 거야!”
그건 허락해 줘야지! 나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나만 믿어, 단예야!”
단예가 뭘 믿으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잠깐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 리사야. 너만 믿을게.”
그리고 윤사해는 다행히도 이를 허락해줬다.
“미워할 거야! 리사는 친구들이랑 놀고 싶은데, 못 놀게 하면 리사는 아빠 미워할 거라고!”
협박과도 다름없는 나의 애원이 잘 먹힌 듯했다.
그렇게 나는 한태극 의원의 세쌍둥이 손주와 함께 주말을 이용하여 유명한 키즈 카페 프랜차이즈점에서 시간을 보내게 됐다.
“세상이 형이다! 형아!”
“윽…….”
도윤이와 함께 말이다. 저세상은 덤이었다. 왜 저세상과 함께 친구들을 만나게 된 거냐고 묻는다면.
‘우리 리사가 친구들이랑 놀고 싶다는데 당연히 허락해 줘야지. 하지만 세상이 오빠도 데려가려무나. 그리고 아빠 미워하지 말고.’
윤사해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저세상을 데려가라니, 끔찍하게 싫었기 때문에 나는 친구들에게 의사를 물어봤었다.
불행히도 한태극 의원의 착한 세쌍둥이 손주분들께서는 저세상의 합류를 흔쾌히 허락해 줬다. 물론, 도윤이는 엄청 좋아했다.
“형아! 내 옆에 앉아!”
“싫어.”
저세상은 도윤이를 싫어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비나리 고등학교 축제 때, 내가 사라진 걸로 도윤이가 많이 울었다고 했었지?
저세상이 그런 도윤이를 달랬다고 했고.
그때 많이 힘들었었나 보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저세상의 차가운 대답에 도윤이가 울상을 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망할 주인공님이 애를 울리려고 하네?! 도윤이네 아버지한테 한우까지 얻어먹었으면서!
나는 저세상을 억지로 도윤이의 옆에 앉혔다.
“야! 윤리사!”
저세상이 질색했지만, 나는 가볍게 그것을 무시하며 그의 옆에 자리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기 무섭게 들려오는 인사가 있었으니.
“안녕하세요, 세상이 오빠.”
“세상이 형, 안녕하세요.”
언제 어디서나 예의 바른 단예와 단이였다. 단아가 둘의 인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가 왜 오빠고 형이야?”
“리사가 우리보다 두 살 많다고 했잖아, 단아야.”
단이의 말에 단아가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두 살 많으면…….”
열 개의 손가락 중 아홉을 접은 단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초등학생이야?!”
“으, 응…….”
“그런데 세상이 오빠는 지금 초등학교 안 다니고 있어.”
저세상이 왜 그런 걸 말하느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단아는 저세상이 아홉 살이란 것에 적지 않게 놀란 듯한 얼굴로 저세상에게 물었다.
“헐! 그럼 우리랑 같이 내년에 초등학교 가는 거야? 1학년으로?”
“아니, 3학년으로.”
웃기시네. 한글도 제대로 못 뗐으면서 삼 학년은 무슨.
나는 내 몫으로 나온 딸기 주스를 홀짝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못 들어갈 것 같은데.”
그 작은 목소리를 저세상이 들은 것 같았지만,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저세상, 너는 왜 그렇게 키가 작아? 아홉 살이라면서?”
“셋째야. 오빠라고 불러야지.”
“싫어! 나보다 작잖아! 그런데 왜 오빠야?”
타이밍 좋게도 단아가 저세상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한단이보다 작은 것 같은데? 한단이, 일어나 봐. 쟤랑 키 좀 재 보자.”
“단아야, 세상이 형한테 실례야.”
“뭐가 실례야?!”
단아의 질문을 줄곧 무시하고 있던 저세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단이라고 했지? 일어나 봐! 나랑 너 중에서 누가 더 큰지 보자!”
병약했던 단이는 세쌍둥이 중 맏이임에도 가장 키가 작았다. 그렇지만 나보다는 키가 컸다.
즉, 이 말은.
“우리 집 첫째가 더 크네요, 세상이 오빠.”
“우와, 세상이 형 진짜 작다!”
나와 키가 비슷한, 아니 그보다 작은 저세상은 단이보다 작다는 말이었다.
단예와 도윤이의 말에 저세상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럴 리가 없어! 다시 재 봐!”
다시 쟀어도 단이가 마디 하나 정도 더 컸다. 이쯤 되니 우리 주인공님이 불쌍해졌다.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저세상을 안쓰러워하며 말했다.
“세상이 오빠, 그냥 포기해.”
저세상이 치욕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보였지만, 키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저세상은 패배를 인정하고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괜찮아요, 세상이 오빠. 키는 언제든 클 수 있거든요.”
“맞아요, 세상이 형. 남자는 스무 살 넘어도 키 큰다고 했으니까 희망을 가지세요.”
“너희 둘 다 시끄러!”
단예와 단이가 방긋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는 사이에 단아와 도윤이가 서로의 키를 쟀다.
승리는 단아의 차지였다.
단아보다 작다는 것에 도윤이가 울적해했지만, 그것도 잠시. 도윤이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맞아! 우리 삼촌 어제 누나랑 화해했어! 삼촌이 누나를 엄청 귀찮게 했다나 봐.”
“진짜?!”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응! 삼촌이 오늘 여기 근처에서 누나랑 만날 거라고 했어!”
오호라, 조카가 친구들과 놀고 있을 동안에 알콩달콩 연애를 즐기시겠다는 거지, 지금?
하나 말하자면 나와 저세상을 키즈 카페로 데려다 준 사람은 류화홍이었다.
윤사해와 쌍둥이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서로 대련하자는 약속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 모두 나랑 저세상을 키즈 카페로 데려다 주겠다면서 그 약속을 내일로 미루려고 했지만…….
‘싫어! 아빠랑 오빠들은 집이나 지키고 있어!’
내가 거부했다. 물론, 저세상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나는 세 사람이 우리 없이 정다운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그리고 저세상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한 거겠지.
아빠랑 오빠들, 서로 안 싸우고 잘 지내고 있겠지? 괜히 걱정되네. 싸우기만 해 봐,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그런 다짐을 하고 있는데 저세상이 도윤이에게 물었다.
“삼촌이라면 시진이…… 삼촌?”
“응! 제인 누나랑 싸웠었어! 형아, 제인 누나 기억해?”
“응, 기억해.”
저세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지난 세계를 떠올리는 듯했다.
나는 그런 저세상의 눈치를 몰래 살피면서 딸기 주스를 마셨다.
그보다 백시진에게 걸어 놓은 <[숙련 불가, S급] 내 말이나 들어라!>가 열심히 일해 줬나 보다.
도대체 제인 아일리를 얼마나 귀찮게 한 거야?
어쨌든 다행이었다. 백시진과 화해했으니, 제인 아일리가 윤설아와 붙어 있는 시간이 줄어들겠지.
커플 지옥, 솔로 천국을 외치는 내가 연인을 구하게 되다니!
백시진, 너는 도윤이가 네 조카인 것에 감사해해라! 아니었으면 안 도와줬을 거야!
하지만 도와줬겠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딸기 주스를 단번에 비웠다.
그렇게 창밖을 보는데.
【각성자, ‘백시진’에게 적용된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가 해제됩니다.】
달갑지 않은 메시지가 내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