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대신 온 것은 가뭄인지라(1)
백시진의 뺨을 때리는 일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이 됐다.
바쁜 직장인을 어떻게 만나 그 뺨을 때릴 수 있을까 했더니.
“삼촌……!”
운 좋게도 백시진이 도윤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러 왔다.
혹시나 하여 교실로 들어가지 않고 신발장 앞에서 도윤이를 기다리고 있기를 잘했다.
“삼촌, 괜찮아?! 리사야! 우리 삼촌은 갑자기 왜 때린 거야!”
도윤이의 울먹거림에 나는 준비해 뒀던 변명을 꺼냈다.
“벌레가 있어서 그랬어.”
“벌레?”
“응!”
나는 보란 듯이 손을 탈탈 털어주고는 힘이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백시진에게 다가갔다.
“시진이 아저씨, 많이 아팠어요?”
“어? 아니, 아프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그게…….”
“제인 언니한테 가 봐야겠죠?”
백시진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스, 스킬 한 번 잘 걸렸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방긋 웃었다. 도윤이는 내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삼촌, 제인 누나랑 화해하려고?”
“화해…….”
백시진이 도윤이의 말을 넋이 나간 얼굴로 읊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누가 붙잡을 새도 없이 유치원을 나가 버렸는데.
“우와! 삼촌이 철들었어!”
도윤이는 아쉬워하기는커녕 두 눈을 반짝거리며 환호했다. 그런 도윤이에게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누가 철들었다는 거니, 도윤아?”
“단예야!”
때마침 경호원과 함께 자라나리 유치원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단예였다. 단아랑 단이는 어디 있지?
보이지 않는 세쌍둥이 중 첫째와 셋째를 찾는데, 단예가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 인사했다.
“안녕, 도윤아. 리사도 있었네?”
“윤리사가 있다고? 어디에! 어디에 있는데?”
“셋째야, 도윤이도 있단다.”
“백도윤은 필요 없어!”
단예의 뒤를 따라 단아가 등장했다. 허겁지겁 유치원 안으로 들어온 단아가 나와 도윤이를 보고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너희 둘이서 뭐하고 있었어?”
“우리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말한 사람은 단이였다.
단이의 말에 나는 도윤이와 서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도윤이랑 같이 단예랑 단아랑 그리고 단이 기다리고 있었어!”
“응! 단이 말대로 리사랑 같이 단예하고 단아, 그리고 단이 기다리고 있었어!”
새삼스레 부르는 이름이 많이 늘어났다 싶었다.
한태극 의원의 세쌍둥이 손주들이 우리의 말에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그럼, 다 같이 교실로 갈까?”
“내가 먼저 갈래!”
단예의 말에 단아가 신발을 내팽개치고 교실로 달려갔다.
“단아야!”
유치원 선생님이 뛰면 안 된다면서 단아를 잡으려고 했지만.
“내가 단아보다 먼저 갈 거야!”
“도윤아! 뛰면 안 돼!”
도윤이가 단아의 뒤를 따르면서, 유치원 선생님은 아무도 잡지 못하게 됐다.
나는 신발장 앞에서 단예와 단이랑 키득거리고는 꽃님반으로 향했다.
“윤리사! 이것 봐봐! 백도윤이 보석을 주웠대!”
꽃님반에 먼저 들어와 있던 단아가 내게 하얀 진주알 하나를 건네줬다.
“우와! 도윤아, 이거 진주지? 어디서 난 거야?”
“거제도에서 아빠랑 같이 주운 거야! 조개 캐다가 발견했어!”
시준이 삼촌은 동생이 사랑싸움을 할 때, 도윤이와 생태 학습을 했었나 보다.
“백도윤, 이거 가짜 아니야?”
“아니야! 아빠랑 같이 주운 건데 가짜일 리가 없잖아!”
“가짜면 어떻게 할 건데?”
“그… 그럼…….”
단아의 말에 도윤이가 우물쭈물거리다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가짜 아니라니까!”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소리를 질러! 놀랐잖아!”
“아야!”
단아가 도윤이의 머리통에 꿀밤을 먹였다.
“셋째야, 제발 함부로 주먹 좀 휘두르지 마렴.”
“백도윤이 먼저 소리 지른 거 봤잖아! 그치, 윤리사?”
“으, 응?”
아니, 불똥이 왜 갑자기 저한테 튀는 것 같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사는 모르겠는데?”
단아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래봤자, 일곱 살. 나는 단아가 하나도 무섭지가…….
“지금 백도윤 편을 들겠다는 거지, 윤리사?”
……않은 게 아니라 무섭다.
나는 단아의 시선을 피하면서 단예의 뒤로 몸을 숨겼다. 단예가 나를 흘긋거리고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단예야, 그러고만 있지 말고 네 동생 좀 말려 봐.
이 상황에서 나선 사람은 세쌍둥이 중 맏이인 단이였다.
“단아야, 그러지 말고 도윤이가 가지고 온 진주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확인해 볼까?”
“확인할 수 있어?”
“응,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거든. 그전에 단아는 도윤이에게 사과해.”
단아가 냉큼 도윤이에게 사과했다.
“머리 때려서 미안, 백도윤.”
영혼이라고는 1g도 담겨 있지 않은 담백한 사과였다.
단아의 사과에 도윤이는 잠깐 불퉁한 얼굴을 보였지만, 이내 단이에게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단이야, 어떻게 확인할 건데?”
“바로 보여 줄게. 리사, 네가 가지고 있는 진주 좀 줄래?”
나는 두말 않고 단이에게 진주를 넘겼다. 단예는 단이가 어떻게 진주를 감별할지 예상이 간다는 듯이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단이가 내게서 건네받은 진주를 꼼꼼하게 살피더니.
“으악! 단이야, 안 돼!”
“한단이! 그거 먹는 거 아니야!”
그대로 하얀 진주알을 깨물었다.
***
까드득-!
검은 머리칼에 붉은 눈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제 발밑에 떨어진 수많은 진주알을 보며 이를 갈았다.
“선물 받은 건데 어쩔 거야?”
공격을 막아내느라 손목을 든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여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그녀에게 공격을 가했던 근위병들이 주춤거렸다.
“Non tirarti indietro(물러서지 마라).”
그러나 근엄하고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근위병들이 다시금 여자를 향해 총을 들도록 하였다.
저를 향한 총구를 보면서도 여자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말했다.
“자기네들은 물러서 있으면서 밑에 따까리들한테는 물러서지 말라고 하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근위병 뒤로 서 있던 몇몇의 신부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탈리아의 로마 북서부에 위치한 교황령.
전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라고 하는 바티칸시국에는 각지의 언어를 자동으로 번역해 주는 아이템이 광범위하게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점잖지 못한 발언에 근위병 뒤로 근엄하게 서 있던 신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 레메게톤의 조각을 순순히 넘겨주시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저희도 이 성스러운 곳에서 누군가 피를 흘리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레메게톤의 조각을 넘겨주시지요.”
레메게톤(Lemegeton).
현재 그들이 서 있는 산피에트로 광장의 지하에서 발견됐던, 거주자의 부산물로 추정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흔두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물건이 발견되자, 그 과정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홀린 듯이 그것을 서로 강탈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 중 하나의 조각을 가지고 있는 여자, 한국의 4대 길드 중 하나인 아래아를 이끌고 있는 ‘최설윤’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얼씨구, 잘도 지랄들이야?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지만 여기는 로마가 아니잖아?”
최설윤의 주위로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화르륵-!
이는 불꽃과 함께 산피에트로 광장에서 자라나고 있던 푸른 잔디들이 빠르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언제 서로 맞부딪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자매님, 화를 거둬 주시지요.”
누군가 생기를 잃고 죽어 버린 잔디를 밟으며 최설윤에게 다가왔다.
“로저?”
“당신이 왜 여기에…….”
최설윤보다는 색이 옅은, 붉은 눈을 가진 남자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6월의 마지막 주일에 보낸 봉헌금에 문제가 있어서요. 꽤 큰 문제라 이렇게 찾아왔는데 여기서 다들 뭐하고 계십니까?”
“자네는 알 것 없네.”
“알 것 없다니요.”
남자의 이름은 로저 에스테라.
교황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남자로, 5년마다 열리는 주교회의의 일곱 자리 중 하나가 로저 에스테라의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
“이국에서 만난 우리 자매님께서 이리 곤란해 하시는데, 제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저 에스테라는 최설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4대 길드 중 한 곳을 이끌고 있는 중이었다.
4대 길드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속해 있는 길드, 가호(加護).
로저 에스테라는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과 함께,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구하는 데에 관심이 많은 자였다.
최설윤이 그런 로저 에스테라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웃었다.
“우리 로저 신부께서 나타나시니 다들 꿀 먹은 병아리가 됐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저 에스테라, 그를 건드리면 교황의 화를 감내해야했다.
절대 권력자의 화를 감내하면서까지 로저 에스테라의 뜻에 반기를 들려는 신부는 없었다.
로저 에스테라가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신부들을 보며 방긋 웃었다.
“자매님의 안내는 제가 맡도록 하지요. 다들 일들 보러 가십시오.”
그러고는 최설윤을 데리고 산피에트로 광장을 벗어났다.
그렇게 최설윤을 위협했던 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기 무섭게 로저 에스테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매님, 이곳의 모든 인간들이 당신을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
최설윤이 제 눈가를 건드렸다.
“이 눈이 불길하던가? 웃기는 양반들이야. 눈 좀 붉은 게 뭐 어때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최설윤 길드장님께서는…….”
“생(生)을 볼 수 있지.”
최설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나온 삶, 나아갈 수 있는 미래.”
그러고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 보게 된 지 꽤 됐는데 말이야. 너희 쪽도 입수한 정보인 걸로 아는데.”
“그렇습니다만, 자매님께는 저분들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니까요.”
“레메게톤의 조각 말이지? 그것 좀 포기하라고 해! 자기네들이 잃어버려 놓고 나한테 지랄들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로저 에스테라가 방긋 웃고는 최설윤에게 물었다.
“그래서 제가 어디로 안내해 드리면 될까요, 자매님? 원하시는 것이 있으셔서 이곳을 방문했을 것 같습니다만.”
“역시, 로저 신부.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니까?”
최설윤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쪽에서 재미난 물건을 주워 왔다면서? 그거 꼭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왔어.”
“재미난 물건이라…….”
로저 에스테라가 입가를 살짝 만지작거리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이 무엇일지요? 이곳에 재미난 것들이 워낙에 많아서.”
“솔로몬의 열쇠.”
최설윤을 안내 중이던 로저 에스테라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그와 함께 자리에 멈춰선 최설윤이 미소가 만발한 얼굴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레메게톤을 말하는 거 아니란 거 알지, 로저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