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태풍이 온다더니(4)
제인 아일리가 사라지기 무섭게, 윤사해가 미간을 살포시 좁히고는 아들을 불렀다.
“리타, 리사랑 뭐하고 있었니?”
“네? 아, 그게…….”
윤리타가 두 눈을 데굴 굴리면서 쭈뼛거렸다.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 있었으니.
【각성자, ‘윤리타’에게 적용된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가 해제됩니다.】
스킬 해제되는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힌다 싶었다.
제인 아일리와 윤설아라는 그녀의 친구와 헤어지기는 했지만, 일단 제인 아일리의 뒤를 쫓기는 한 거니 스킬이 해제됐나 보다.
“어…? 뭐하고 있었지……?”
스킬이 해제되면서 윤리타의 기억에 혼동이 온 것 같다.
이런 걸 보면 [내 말이나 들어라!]도 꽤 위험한 스킬 같은데 말이지.
“리타, 왜 그러니?”
윤사해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윤리타를 살피려 들었다. 저러다 광혜원을 부를 것 같아, 나는 윤사해의 걱정을 덜어 주고자 말했다.
“리오 오빠가 깨소금을 사 오라고 했는데, 오빠가 원하는 게 동네 슈퍼에는 없어서 여기까지 왔어!”
내 말에 윤리타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그랬는데 밖에서 왜 이러고 있지?”
“리사가 바람 쐬고 싶다고 해서 나왔잖아.”
“그랬었어?”
윤리타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얼굴로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그래서, 리타. 깨소금은 어디 있니? 사지 않은 것 같은데.”
“헉, 맞다!”
윤리타가 아차 싶은 얼굴로, 입가를 만지작거리면서 웅얼거렸다.
“까먹었어요…….”
“괜찮단다. 아빠랑 같이 사러 가면 되지.”
윤사해의 다정한 한 마디에 윤리타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아요! 그런데 아빠는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리오가 참기름 좀 사 오라고 해서 왔는데, 이렇게 너희를 만났구나.”
깨소금에 이어 참기름이라니.
윤리오, 도대체 저녁으로 뭘 준비하려는 거지?
그런 의문과 함께 우리는 정답게 C-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트로 들어가기 무섭게, 윤사해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로 곤혹을 치를 뻔했지만.
“다녀왔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난관을 잘 헤치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윤리타, 왔어? 너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리사는!”
“리사는 여기 있지!”
나는 윤리타의 뒤에서 고개를 빼곰 내밀고는 활짝 웃었다.
“리사.”
윤리오가 그런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고, 나는 그대로 윤리오의 품에 안겼다.
“나도 좀 예뻐해 주면 안 돼?”
윤리타가 시무룩한 얼굴로 칭얼거렸지만, 윤리오는 그 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나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거실로 들어온 윤사해에게 인사했다.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부탁한 거는요?”
“여기 있단다. 리타에게는 깨소금을 사와 달라고 했다지?”
“네, 윤리타가 이렇게 늦게 돌아올 줄 알았으면 쟤한테 모두 맡기는 거였는데 말이에요.”
윤리오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윤리타를 쳐다봤다. 자신에게 닿는 시선을 느꼈는지, 윤리타가 불퉁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늦고 싶어서 늦은 거 아니야!”
“퍽이나.”
윤리타가 억울하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처연해 보이는 그 모습에 나는 윤리타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자 말했다.
오늘 나한테 뺨을 세게 얻어맞기도 했으니까 말이지!
“리오 오빠가 원하는 게 동네 슈퍼에는 없었어. 그래서 큰 길에 있는 마트까지 갔는데!”
“맞아, 그랬는데!”
윤리타가 내 말투를 따라하면서 억울함을 어필했다.
윤리오는 그제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슈퍼에 더는 들어오지 않나 보네. 다음에 장 보러 갈 때 참고해야겠다. 그래, 수고했어. 윤리타.”
“그게 끝이야?”
“뭘 더 원해?”
“아니, 원하는 건 없는데…….”
거짓말. 윤리오가 조금 더 자신을 제대로 칭찬해 주기를 원하면서.
윤리타도 이렇게 보면 참 솔직하지 못한 오빠였다.
윤리타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윤리오가 그런 윤리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빨리 말해.”
“없어! 이 바보 같은 형아야!”
“저게 지금……!”
윤리오가 윤리타를 향해 뒤집개를 들었다. 윤리타는 윤사해의 뒤로 날래게 몸을 숨겼다.
“메롱이다.”
그러고는 윤리오를 향해 혀를 날름댔다.
“아오, 저걸 진짜!”
“리오, 리타. 사이좋게 지내야지.”
“하지만 아버지!”
윤사해가 제 뒤에 숨은 윤리타의 머리를 투박하게 쓰다듬고는 윤리오에게 말했다.
“동생이잖니.”
“맞아, 동생이잖아.”
우와, 진짜 얄미워.
“하지만 열심히 저녁을 준비 중인 형을 놀리면 안 되지, 리타.”
윤사해가 그렇게 말하고는 윤리타의 등을 윤리오에게로 살짝 밀었다.
“아빠……?”
“아버지, 나이스.”
윤리오는 그대로 윤리타에게 헤드락을 걸었고, 윤리타는 윤사해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윤사해는 그런 아들을 애써 외면하고는 이 자리에 없는 아이를 찾았다.
“리오, 세상이는 어디 있니?”
“방에서 자고 있어요. 오늘 받아쓰기 시험 봤다는데, 그거 때문에 피곤한가 봐요.”
우리 주인공님, 한글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머리가 지끈거리시나 보다.
“저녁 다 되면 제가 깨울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손이나 씻으세요. 리사, 너도. 윤리타, 너는 아닌 줄 알아?”
“쳇.”
윤리오가 윤리타의 이마에 딱밤을 먹이고는 그를 놓아 주었다. 윤리타는 울상이 가득한 얼굴로 이마를 문지르며 욕실로 향했다.
“리타 오빠, 바보. 그러게 왜 리오 오빠한테 까불어?”
“까분 거 아니거든? 그보다 뭐라고? 윤리사, 너 지금 오빠한테 바보라고 했지?”
“응!”
나는 윤리타를 향해 혀를 날름거려 주고는 욕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윤리오가 그걸 또 어떻게 봤는지, 나를 차분하게 타일렀다.
“리사, 욕실에서는 뛰면 안 돼.”
“네에!”
나는 힘차게 대답해 주고는 뽀드득 뽀드득 열심히 손을 씻고 나왔다.
그 사이에 윤리오는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오이와 단무지, 당근과 시금치 등등.
쟁반에 놓인 재료가 너무나도 익숙해서 무슨 요리를 하는가 싶었더니.
“갑자기 웬 김밥?”
김밥이었다.
그래, 김밥에 참기름과 깨소금은 필수지.
윤리오가 햄 하나를 빼먹으려는 윤리타의 손을 찰싹 때리고는 말했다.
“아버지 내일 아침 겸으로 만들었어. 아버지, 내일 길드에 일찍 나가신다고 하셨죠?”
“응.”
윤사해의 대답에 윤리오가 열심히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윤리타가 윤리오의 옆에서 그 모습을 반히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나는 유부 초밥이 좋은데.”
“네 의사는 필요 없어.”
윤리오의 매몰찬 대답이 돌아왔다.
윤리타는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고, 나는 그런 윤리타의 옆에서 햄 하나를 주워 먹으며 말했다.
“리사도 유부 초밥이 좋은데.”
“다음에 해 줄게, 리사.”
윤리타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윤리오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리오는 맑게 웃으면서 내 입에 햄 하나를 더 넣어 주었다.
“그런데 김밥 쉬면 어쩌려고?”
“안 쉬어.”
윤리오가 그렇게 말하면서 주방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CW에서 이번에 낸 신제품이라는데. 여기 넣어 두면 안 쉴 거야.”
냉장고에 넣지 않더라도 음식을 보관할 수 있게 한, 냉장 기능이 탑재된 반찬통이라고 했다.
“이런 걸 어디서 산 거래?”
“인터넷 쇼핑.”
윤리타가 크게 감명을 받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용돈 받은 걸 어디다 쓰나 했더니 주방 용품 사는데 쓰는구나?”
참고로 윤리타는 용돈의 대부분을 군것질로 탕진 중이었다.
윤리오가 스물 다섯 개의 김밥을 말고 난 후, 이중 다섯 개만을 두고 나머지는 모두 반찬통에 넣었다.
“아버지, 김밥 여기 안에 둘 테니까 내일 출근하실 때 꺼내 가세요.”
“그래, 고맙구나. 이제 세상이 깨우면 되니?”
“네.”
윤리오가 다섯 개의 김밥을 먹기 좋게 썰기 시작했다. 탁탁, 도마에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왜인지 듣기 좋았다.
“리사, 아.”
“아.”
윤리타가 먹기 좋게 썰린 김밥 하나를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미미(美味)가 따로 없는 요리에 감탄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안 먹을래요, 더 잘래…….”
“세상아, 그래도 조금만 먹자꾸나.”
윤사해가 저세상을 받쳐 안고서는 그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아니, 저 자식이? 받아쓰기가 얼마나 고되다고 하지도 않은 잠투정을 하고 있는 거야?
윤리타가 그런 저세상이 귀엽다는 듯이 사진을 한 번 찍고는 작은 입에다가 김밥을 밀어 넣었다.
“아, 맞아! 나 오늘 영어 선생님 만났어.”
“제인 쌤?”
“응, 친구 분이랑 같이 계시더라고. 리사랑 같이 인사할까 했는데…….”
윤리타가 목소리의 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잠깐만, 뭐지?”
“뭐야, 왜 그래?”
“아니, 누구한테 뺨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라서.”
“뺨?”
“응, 뭐지? 진짜 누구한테 뺨 맞은 기분인데.”
윤리타는 그렇게 말하고는 제 뺨을 문질렀다.
헉, 나한테 맞은 걸 기억해내면 안 되는데?!
나는 황급히 윤리타의 관심을 돌리고자 빼액 소리를 질렀다.
“마트에서 제인 언니를 만났는데, 그때는 인사 못했어! 그치만 나중에 마트 밖에서 다시 만나서 제인 언니랑 인사했어! 그치, 리타 오빠?”
“응? 어, 어어, 그랬어.”
윤리타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런데 영어 쌤 친구 분, 최설윤 길드장님 많이 닮으셨더라?”
“어떻게 생기셨길래?”
“그냥… 외모는 모르겠는데, 분위기가 많이 닮았었어. 그렇지 않아요, 아빠?”
“글쎄, 잘 모르겠구나.”
윤사해는 지금 저세상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윤리타의 말에 미간을 살포시 좁히고는 원작 속 ‘최설윤’에 관한 정보를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적당히 다듬은 검은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핏빛보다도 붉은 눈을 찡그렸다.」
『각성, 그 후』에서 최설윤은 언제나 사나워 보이는 인상을 지닌 여자로 묘사됐었다.
오늘 만난 윤설아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란 말이었다.
하지만 윤설아가 최설윤과 분위기 말고 닮은 것이 하나 있었다.
「최설윤의 붉은 눈이 저세상의 발끝으로 향했다가, 이내 그의 머리끝으로 옮겨졌다.
그러다 저세상과 시선이 마주친 최설윤은.
잔잔히 미소를 그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낯선 이와 맞닥뜨렸을 때 보이는 최설윤의 습관.
제인 아일리의 친구 윤설아는, 그녀의 습관을 그대로 행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