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태풍이 온다더니(2)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건 강 건너 싸움 구경.
그보다 더 신이 나는 건 남의 사랑싸움에 관한 이야기였다.
도윤이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는데?”
“맞아, 도윤아. ‘누나’라면 삼촌 분의 여자 친구분이시지?”
단예의 말에 도윤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응, 맞아. 그게 말이야, 아빠하고 삼촌하고 누나하고 다 같이 거제도로 여행을 간 건 좋았거든?”
도윤이는 거제도에서 가족과 함께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를 한껏 들뜬 얼굴로 말해 줬다.
그러나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삼겹살 파티가 끝나고였나? 누나한테 친구가 찾아왔었어.”
“친구?”
단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윤이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단이는 모르겠구나. 우리 누나가 엄청 친하게 지내는 분이라고 했어! 삼촌이랑 나 다음으로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이래.”
그리고 그건, 도윤이가 말하고 있는 그 ‘친구’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도윤아, 그 친구라는 사람이 언니를 따라온 거야?”
“아니.”
도윤이가 내 말에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누나를 따라온 건 아니었고, 우연히 거제도에 방문했다가 누나가 있는 걸 아셨대.”
그것 참 기막힌 우연이네.
“어쨌든, 누나가 친구랑 잠깐 시간 좀 보내고 오겠다고 나갔는데…….”
“안 돌아오셨구나?”
“응! 리사, 어떻게 알았어?”
척하면 척이지.
괜히 뿌듯해져서 입꼬리를 올리는데, 흥미진진한 얼굴로 도윤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단예가 말했다.
“그리고 삼촌 분께서는 여자 친구 분을 찾으러 나가셨겠구나?”
“헉! 단예는 그걸 또 어떻게 알았어? 리사랑 단예 대단해!”
도윤이의 말에 단아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나도 한단예랑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어!”
“단아도? 우와, 다들 대단해!”
“나는 잘 모르겠네.”
단이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도윤이가 계속 말을 이었다.
“어쨌든, 삼촌은 누나를 찾아서 데리고 왔는데. 그거로 둘이 엄청 싸웠지 뭐야!”
“언니가 친구분을 만나느라 연락이 끊겼던 걸로?”
도윤이가 내 말에 맞는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나는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집착남은 매력 없는데.”
“집착남?”
“도윤이랑은 상관없는 그런 남자가 있어.”
나는 도윤이를 향해 방긋 웃어 주고는 물었다.
“그런데 시진이 아저씨는 제인 언니를 왜 그렇게 찾으신 거야?”
“나는 잘 몰랐는데, 숙소 근처에서 엄청 무서운 일이 있었대. 그래서 삼촌이 누나를 그렇게 찾은 거라고 아빠가 말해 줬었어.”
엄청 무서운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시진이 제인 아일리의 연락에 집착할 만도 했던 것 같다.
백시진, 미안. 집착남 속성은 없던 것으로 해 줄게.
“그런데 누나가 말하기를, 삼촌한테 자신은 연락을 몇 번이나 했었다는 거야!”
“삼촌은 거짓말이라고 하셨겠네.”
단예의 말에 도윤이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단예가 이번에도 맞춘 듯싶었다.
그보다 우리 단예, 어디서 저런 촉을 얻게 된 걸까?
문득 단예가 가지고 있을 로맨스 지식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런 내 궁금증과는 별개로, 도윤이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나를 데리고 갔던 친구분의 얼굴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서 난리였어.”
“백도윤, 너도?”
“응.”
도윤이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분명, 누나의 친구가 찾아왔었는데 얼굴을 모르겠는 거 있지?”
뭔가 이상했다.
제인 아일리를 직접 찾아왔다는 ‘친구’라는 사람의 얼굴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니.
『각성, 그 후』에서 그랬던 것 같은데. 탈쟁이들의 얼굴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맨얼굴을 봤다고 해도 그들이 탈을 덮어쓰면 기억에서 지워지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던 것 같다.
제인 아일리의 친구가 굉장히 수상쩍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미간을 좁히는데, 단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백도윤, 네가 멍청해서 그래. 나중 되면 네 아빠 얼굴도 잊어버리고, 네 삼촌 얼굴도 잊어버리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나는 멍청이도 아니야!”
도윤이가 단아를 향해 씩씩거렸다. 그런 도윤이가 우습다는 듯이 단아는 코웃음을 쳤지만 말이다.
“그래서 도윤이네 삼촌이랑 제인 언니는 지금 냉전 중이야?”
“냉전?”
무슨 말인지 모르나 보다. 나는 최대한 풀어서 다시 말해 줬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는 중이셔?”
“응, 일주일 동안 서로 연락 안 하고 지내기로 했대.”
오, 이별 각이 세게 섰는데? 그보다 도대체 얼마나 심하게 싸웠으면 서로 연락을 끊기로 한 거야?
머릿속으로 연인의 싸움을 한껏 그려내고 있는데, 도윤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울먹였다.
“누나 계속 못 보면 어쩌지? 나는 누나가 엄청 좋은데.”
도윤이의 두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에 나도 모르게 도윤이를 달랬다.
“괜찮아, 도윤아! 시진이 아저씨도 제인 언니도 금방 화해하실 거야!”
하지만 은근 바랐다. 제인 아일리가 백시진과 헤어지는 것을.
아니, 솔직히 제인 언니가 몇 배는 더 아깝단 말이야!
***
각성자 관리 기구, AMO의 현장 제 1팀의 백시진은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팀장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누가 제 욕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여자 친구분이 욕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싸우셨다면서요?”
팀원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백시진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에 백시진의 팀원이 눈치껏 말했다.
“네, 얌전히 짜져 있을게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팀장님, 그냥 먼저 연락하시지 그래요?”
얌전히 짜져 있는다더니.
백시진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팀원을 노려봤다.
“팀장님, 우나 씨를 왜 그렇게 노려보세요?”
“그러게요, 우나 씨는 맞는 말을 한 것 같은데.”
“맞아요! 그러다 여자 친구분과 헤어지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제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라고요!”
곳곳에서 깐죽대는 목소리들에 백시진이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헤어지면 그냥 헤어지는 거죠.”
“그렇게 팀장님은 몇날 며칠을 술에 빠져 사셨다고 한다.”
“미우나 씨.”
“네, 진짜로 얌전히 짜져 있을게요.”
타다다, 울리는 키보드 소리에 백시진이 피곤한 눈가를 짓눌렀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제 형에게서 같은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마, 시진아.’
백시진이 백시준의 목소리를 떠올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위에 탁 놓이는 서류철이 있었다.
“백시진 팀장, 제 1팀 분위기가 왜 이렇게 우중충하나 했더니 자네 때문이었군.”
“……태지인 부장님.”
AMO 내의 모든 현장 팀을 감독 관리 중인 태지인이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자네의 개인적인 일로 팀의 분위기를 망치는 일은 없도록 하게.”
현장 제 1팀의 분위기는 태지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무척이나 좋았지만 백시진은 말했다.
“네, 부장님.”
“그럼, 이것들 오늘 저녁까지 처리해서 보고 올리게.”
“오늘 저녁까지 말입니까?”
“그래.”
태연한 대답에 백시진이 곤란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부장님, 오늘 제가 조카를…….”
“데리러 가려면 일을 빨리 끝마쳐야겠군. 수고하게.”
태지인은 그렇게 백시진에게서 몸을 돌렸다.
백시진이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되는 일이 없네.”
“사랑도, 일도 말이죠.”
“우나 씨, 제발.”
“네, 지금부터 진짜로 얌전히 짜져 있도록 해 볼게요.”
다시금 울리는 키보드 소리에 백시진은 피곤한 낯을 문질렀다.
***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나는 자라나리 유치원 꽃님반에서 가장 먼저 하원했다.
“리타 오빠, 리오 오빠는?”
윤리타의 손을 잡고서 말이다.
“윤리오는 지금 집에서 세상이랑 같이 저녁 준비 중. 오는 길에 깨소금 좀 사 오래.”
그렇게 도착한 동네 슈퍼에서 우리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윤리오가 원하는 브랜드의 깨소금을 팔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달부터 C-마트에서 독점으로 런칭해서 팔고 있다고 하네?”
C-마트라면 20여분은 걸어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리타 오빠, 갈 거야?”
“가야지. 대충 아무거나 사 갔다는 네 첫째 오빠가 나한테 엄청 잔소리해댈걸?”
그럴 것 같았다.
나와 윤리타는 정답게 손을 잡고서 번화가에 위치한 C-마트로 향했다. 가는 길에 윤리타는 뚱한 얼굴로 몇 번이고 고민했다.
“그냥 아무거나 사 갈까?”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C-마트에 도착하고 말았다.
저녁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가운데, 윤리타가 바구니를 들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암만 생각해도 아무거나 사 갈 걸 그랬어. 리사, 네 첫째 오빠는 재료 하나하나에 왜 그렇게 정성일까?”
“요리에서 제일 중요한 건 정성이라서?”
“그래서 그런가?”
윤리타가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내게 물었다.
“유치원은 어땠어?”
빨리도 물어본다 싶었다. 나는 윤리타의 손을 잡고 마트를 이리저리 구경하며 대답해 주었다.
“재미있었어! 오늘 단이라고, 새 친구도 사귀었어.”
“단이? 남자애야, 여자애야?”
“남자애! 단예랑 단아네 오빠야.”
윤리타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한단이를 찾아가 유치원 옮기라고 말할 기세였다.
그것도 아니면, 윤사해가 그랬던 것처럼 유치원 옮기지 않겠냐고 물어보든가.
“리사, 있잖아?”
아니야, 없어.
윤리타는 윤사해와 똑같이 유치원 옮기는 게 어떻겠느냐고 내게 물어볼 작정인 것 같았다.
윤리타가 개소리를 하는 걸 가만히 둘 수는 없지! 나는 황급히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그리고 오늘 도윤이가 말해 줬는데, 도윤이네 삼촌이랑 오빠네 영어 선생님이 엄청 싸웠대.”
“시진이 삼촌이랑 영어 쌤이?”
다행히도 윤리타는 내 말에 단이의 존재를 금방 머릿속에서 잊었다.
“어쩐지,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시더라.”
“진짜?”
“응,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 보이시네? 다행이다.”
그 말에 나는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지금은 괜찮아 보이신다고? 리타 오빠, 여기에 제인 언니가 계셔?”
“저기, 카페에 앉아 계시잖아.”
마트 한구석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카페에 제인 아일리가 웃는 낯으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진짜네……?”
“왜, 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
“아니, 그냥 놀라서 그랬어.”
여기서 제인 아일리의 이름이 나올 줄 몰랐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영어 쌤 앞에 앉아 계시는 분은 누구시지? 친구 분이신가?”
곱슬기가 도는 검은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붉은 눈을 휘게 접으며 제인 아일리와 마주보고 있었다.
“사이 엄청 좋아 보이시네.”
제인 아일리는 도윤이가 말한 예의 그 ‘친구’라는 사람과 함께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