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태풍이 온다더니(1)
월요일에 온다던 대형 태풍은 제주도 근처에서 소멸됐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리사도 오빠들이랑 유치원 다녀오겠습니다!”
우리들이 정상 등교하게 됐다는 말이었다. 나는 등원이지?
어쨌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우리는 나란히 가방을 멨다.
“세상이 오빠, 한글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초등학교 입학이 보류된 저세상은 제외하고서 말이다. 저세상이 얼굴로 욕하면서 내게 인사했다.
“응, 윤리사 너는 유치원가서 재미있게 놀아. 저번처럼 친구랑 싸우지 말고.”
끝에서 들린 말에 나 역시 저세상을 향해 얼굴로 욕해 주었다.
그렇게 서로 말없이 욕설을 주고받고 있는데, 윤사해가 그런 우리들이 기특하다는 듯이 말했다.
“리오랑 리타는 어릴 때 툭하면 싸웠었는데, 리사랑 세상이는 사이가 좋아서 다행이구나.”
아빠, 쟤 얼굴 좀 봐요.
하지만 저세상은 윤사해의 말에 깔끔하게 표정을 갈무리한 상태였다. 이럴 때만 주인공의 면모를 보이는 저세상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윤리오와 윤리타가 내 손을 하나씩 잡고는 자라나리 유치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윤리타, 청해진은 오늘 당번이라서 먼저 갔지?”
“응, 리사 데려다주고 최대한 빨리 와 달래.”
“최대한 늦게 가자.”
“좋아.”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기막힌 우정에 감탄하고 있는데, 윤리타가 문득 기억났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윤리사, 저번에 너랑 싸웠던 애 이름이 뭐라고?”
“유성우.”
“유성우가 아니라 우성운.”
내 말을 고쳐 준 사람은 윤리오였다. 맞다, 그런 이름이었지.
“유성우든 우성운이든, 걔가 또 시비 걸면 가랑이 사이를 차 버려.”
윤사해의 아들 아니랄까 봐, 윤리타가 그와 똑같은 말을 하며 내게 당부했다.
“고자로 만들어 버려.”
“애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윤리오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 술을 더 떴다.
“리사, 먼저 눈을 노려. 다리 사이를 노리는 것도 상대를 보이지 않게 만든 다음에 해야…….”
“리사가 알아서 할게.”
오빠들, 리사를 범죄자로 만들지 말아 줘.
하지만 윤리오와 윤리타는 알아서 하겠다는 내 말을 듣지 않은 것 같았다.
“주변에 목격자가 있으면 곤란하니까, 상대를 처리할 때는 공간도 분리시켜야해.”
“공간계 각성자는 이동계 각성자만큼이나 구하기 어렵잖아.”
윤사해가 들으면 기겁할 만한 소리를 내게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지, 윤사해라면 역시 내 아들들이라면서 좋아하려나?
어쨌든 윤리오와 윤리타의 ‘당신도 할 수 있다, 완벽 범죄!’ 강의는 자라나리 유치원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렇게 도착한 유치원.
“그럼, 리사. 우리는 이만 가 볼게.”
“윤리사, 세상이 말대로 친구들이랑 싸우지 말고 재미있게 놀고 있어야 해.”
“응!”
장담은 못해, 오빠들!
나는 윤리오와 윤리타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어 준 뒤, 곧장 꽃님반으로 달려갔다.
“도윤아!”
도윤이와 함께 방학 동안 있었던 일을 주고받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도윤이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내게 인사를 한 사람은.
“리사야, 방학 끝나자마자 우리가 아니라 도윤이부터 찾는 거니?”
“윤리사 너무해! 우리는 잊었지?!”
아니, 사람들은 단예와 단아였다.
서로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쌍둥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면서 두 팔을 벌렸다.
“단예야! 단아야!”
나는 그대로 둘을 꼭 끌어안고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보고 싶었어!”
단예와 단아가 나를 밀어내면 어쩌나 했지만, 둘은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우리도 보고 싶었어.”
“나는 딱히…….”
“아니야, 리사. 셋째도 너를 많이 보고 싶어했어.”
“아니야! 그런 적 없어!”
단아가 귓불을 붉게 물들이고는 내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면서도 나를 끌어안은 손은 놓지 않았다.
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단아의 손을 꼭 잡았고, 단아는 얼굴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쭈뼛거렸다.
“……조금은 보고 싶었어.”
“응!”
“그리고 리사를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지.”
단예가 검지를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은빛의 머리칼을 지닌 남자애가 웃으며 서 있었는데.
“안녕, 리사.”
도윤이와 마찬가지로 미래가 무척이나 기대되는 아이였다.
***
서울특별시 유영구 양달로 15길.
유영구 내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 위치한 윤사해의 대저택에서 저세상은 느닷없이 드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뭐지? 이 꺼림칙한 기분은?’
감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저세상은 나름대로 사건을 감지하는 촉이 있는 편이었다.
‘백정을 처음 맞닥뜨리기 전에 들었던 기분과 똑같은데.’
백정, 윤리오.
유랑단의 아홉 탈 중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졌던 남자.
저세상은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이고는 테이블에 놓인 액자를 바라보았다.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삼아 청해진과 윤리타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윤리오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저런 얼굴이 아니었는데.”
맞기는 했다.
그러나 기억 속의 윤리오는 저렇게 맑은 웃음을 보인 적이 없었다.
시종일관 냉소적인 미소로 검을 휘둘러대던 살인귀. 그게 저세상이 기억하는 윤리오였다.
‘달라진 게 너무 많아.’
그 변화가 달갑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두려웠다.
스무 살, 다시 시작할 때에 자신이 달라진 그 모든 것들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릴까 봐.
저세상의 시선이 액자 너머의 창밖으로 향했다.
“세상아, ‘안자써요’가 아니라 ‘앉았어요’라고 적어야지.”
류화홍의 지적에 창밖을 바라보던 저세상의 시선이 일순 흔들렸다.
“그리고 ‘발따’가 아니라 ‘밝다’야.”
“저도 알아요… 알고 있는데…….”
“혼내는 거 아니니까 천천히 다시 해 보자.”
저세상이 시무룩한 얼굴로 연필을 움직였다.
그것도 잠시, 그는 조금 전에 들었던 오한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에 국제적으로 크게 문제가 됐던 일이 일어났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문제의 중심에 서있던 사람은 4대 길드 중 하나.
아래아의 최설윤이었다.
‘바티칸 교황청에서 일어난 충돌로 한국과 바티칸 사이에서 외교 문제가 일어났고, 거기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엄청 시끌시끌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빈 집에서 죽은 듯이 지냈던 자신에게까지 그 소식이 들려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일에 아저씨가 엮이나?’
그래서 그런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 건가 싶었다.
저세상이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선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톡톡, 그 소리에 류화홍이 타이르듯이 목소리를 내었다.
“세상아, 집중해야지.”
“네에…….”
저세상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테이블을 두드리는 것을 멈췄다.
***
자라나리 유치원 꽃님반.
다섯 살 이상의 아이들, 총 열둘이 있었던 꽃님 반에 새 친구가 왔다.
“이름은 한단이. 저기 있는 단예와 단아랑은 형제 사이로 일곱 살이야. 다들 안녕.”
한단이.
한태극 의원의 세쌍둥이 손주 중 맏이인 아이였다.
『각성, 그 후』에서는 앓고 있던 병이 악화되어 어린 나이에 죽었다고 했었지.
그 사실을 기억해낸 나는 옆에 앉아있는 단예에게 속닥거렸다.
“단이는 이제 괜찮은 거야?”
“응, 할아버지께서는 스위스에서 조금 더 요양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신 것 같았지만…….”
“한단이가 싫다고 했어!”
단아가 단예의 말을 가로채고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랑 떨어져서 지냈는데, 몸도 나은 지금 또 헤어지는 건 싫다고 말이야!”
“셋째야, 그걸 기억하고 있었니?”
단예가 놀랍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 단아는 뿌듯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단예야, 단이는 왜 아팠던 거야?”
단이가 자기소개를 하기 직전에 유치원에 등원한 도윤이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저렇게 물었다.
그 질문에 단예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미소를 그렸다.
“그게…….”
“이상 각성자라서 아팠던 거라고 했어.”
이번에도 단아가 단예의 말을 가로채고 말았다. 단예가 단아를 나무라듯 말했다.
“셋째야.”
“왜? 비밀도 아니잖아!”
“그렇기는 하지.”
단아의 말에 태연하게 맞장구를 친 사람은 단이였다.
자기소개를 끝마치고 온 단이가 내 옆에 앉고는 말했다.
“나는 ‘이상 각성자’거든.”
“이상 각성자?”
“응.”
단이가 고개를 끄덕였고, 도윤이가 한 손을 번쩍 들었다.
“나 알아! 원래 열일곱 살에 각성을 해야 하는데, 그보다 어린 나이에 각성을 하는 거!”
잠깐만, 그렇다면 나도 '이상 각성자'로 분류되는 걸까?
하지만 도윤이의 말을 계속해서 들어 보니, 열일곱 이전에 이뤄지는 각성은 하나의 ‘불치병’이자 ‘희귀병’으로 여겨지고 있는 듯 했다.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힘이 불안정해서 언제 폭주할지도 모르고, 또 그 힘을 몸이 감당하지를 못했거든.”
때문에 스위스의 인적 드문 시골에서 요양했던 거라고 단이는 말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럼, 단이는 각성자라는 거네?”
“응, 등급은 비밀로 할게. 미안해, 리사.”
“아니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사과할 게 뭐 있다고!
황급히 손을 내저었는데, 단이가 고맙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으며 물어왔다.
“그보다 저번 주에 유치원 방학이었다고 들었는데, 도윤이랑 리사는 뭐했어?”
“맞아! 뭐했어? 나랑 한단예 없이 둘이서 재미있게 놀았냐?”
단아의 말에 나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재미있게 놀았지만, 단아랑 단예가 없어서 조금 심심했어.”
“맞아! 나도 리사랑 재미있게 놀았지만, 단예랑 단아가 없어서 엄청 심심했어!”
나와 도윤이의 말에 단아가 기분 좋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 둘 다 이제 심심할 일 없겠네? 내가 돌아왔으니까!”
“우리 셋째는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아. 그렇지 않니, 첫째야?”
세쌍둥이 중 첫째인 한단이가 맑은 얼굴로 웃었다.
“밑도 끝도 없이 자신감이 넘치는 게 단아의 자랑인걸.”
아닌 것 같은데.
단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단이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방학 때 뭐하고 지냈니, 리사야? 도윤이도 뭐하고 지냈어?”
“여행! 아빠랑 오빠들이랑 강원도 동해로 여행 다녀왔어!”
“나는 거제도!”
도윤이가 해맑게 말하고는 물었다.
“단예랑 단아는 부산에 갈 거라고 했었지? 부산에 갔었어?”
도윤이의 물음에 단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 달 동안 거기서 지냈어.”
“다시는 안 갈 거야!”
단아가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바다가 바로 앞에 있었는데 놀지 못했단 말이야!”
그러면 더더욱 다시 가야하지 않을까, 단아야?
하지만 이어진 단예의 말에 나는 단아가 왜 그렇게 말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청가에서 나오신 분들의 감시가 너무 심했었거든.”
팔라크의 둥지 관련으로, 한태극이 그들에게 손주들의 안전을 부탁했었나 보다.
“그래도 두 사람은 방학을 즐겁게 지낸 것 같아서 다행이야.”
단예의 말에 나는 활짝 웃었다.
“응! 즐거웠…….”
“아니야, 안 즐거웠어.”
내 말을 끊은 사람은 도윤이었다.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도윤이를 쳐다봤다.
나뿐만이 아니라 한씨 집안의 세쌍둥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의 시선에 도윤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삼촌이랑 누나가 여행 가서 싸웠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