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해바라기도 결국은 지나(3)
가족 여행의 마지막 날.
비는 그친 지 오래, 별장 주위에 가득 피어 있던 해바라기들 역시 진지 오래였지만.
“리사, 그만 가자꾸나!”
비가 쏟아지던 그 날 이후, 서차윤은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게 너무 기뻐 성불이라도 한 건가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아저씨 같으니라고! 우산이라도 돌려주러 와야 할 거 아니야?
그것도 아니면, 몸은 좀 괜찮으냐면서 얼굴이라도 보이던가!
설마, 내가 앓아누웠던 일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
“뭐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거야?”
“흐아악!”
가까이서 들린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 놀래라.”
“리사가 더 놀랐어!”
비명을 지르게 만든 주범인 저세상이 나를 비웃으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놀라?”
말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방긋 웃으며 저세상을 놀렸다.
“세상이 오빠 생각하고 있었지.”
저세상이 뭐 씹은 얼굴을 보이고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갔다.
“빨리빨리 움직여. 아저씨가 오라고 하잖아.”
잔소리는 덤이었다.
나는 챙겨 온 캐리어를 끌고 열심히 저세상의 뒤를 따라 별장을 나섰다.
“아버지, 겨울에도 오면 안 돼요?”
“맞아요! 그때는 청해진 없이 우리끼리만 와요!”
윤사해를 도와 차에다가 짐을 싣는 쌍둥이의 모습이 보였다.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윤리오와 윤리타의 말에 청해진이 우는 소리를 냈다.
“너희들! 나랑 즐거운 시간 보냈으면서!”
징징대는 목소리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매몰차게 답했다.
“하나도 안 즐거웠어.”
“맞아, 시간만 아까웠어.”
이럴 때는 죽이 잘 맞는 쌍둥이였다. 청해진은 상처받은 얼굴로 보였다가 저세상을 발견하고는 곧장 그를 안아 들었다.
“세상아, 너는 나랑 노는 거 즐거웠지? 내가 쟤들보다 더 즐겁게 놀아 줬지?”
“네? 어…….”
저세상은 두 눈을 데굴 굴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야! 세상이한테 엉겨 붙지 마!”
윤리타가 청해진의 품에서 저세상을 안아 들었고, 윤리오는 청해진의 옆구리를 슬쩍 발로 차 버렸다.
“아저씨! 지금 보셨어요?!”
“음?”
안타깝게도 윤사해는 내가 건넨 캐리어를 차에 싣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윤사해의 떨떠름한 반응에 청해진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기에 내 편 아무도 없어.”
“집에 가서도 없잖아.”
“시끄러, 윤리타.”
“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시끄럽다고 했지?!”
청해진이 깐죽거리는 윤리타에게 헤드락을 시전했다.
윤리오가 그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봤고, 윤사해는…….
과거에 잠긴 듯한 시선으로 아들이 친구와 노는 모습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윤사해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꼭 잡고서 물었다.
“아빠, 오빠들 말대로 겨울에도 오면 안 돼?”
“그래, 그러자꾸나.”
윤사해가 내 손을 마주 쥐면서 옅게 미소를 그렸다.
“겨울에는 더 근사하거든.”
다가올 겨울이 무척이나 기대되는 말이었다.
***
가로수길에 위치한 카페 중 한 곳.
“계속 여름이었으면 좋겠다.”
“여름 싫어하지 않아요?”
“해솔이 덕분에 좋아졌어.”
“제 스킬이 좋은 거겠죠.”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있는 두 여자가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해솔아, 바람 좀 일으켜 줘. 여기 에어컨 바람이 영 시원찮네.”
“몇 번이고 말씀드리는 건데, 저를 휴대용 선풍기 취급하는 건 그만둬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청해솔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시원한 바람을 불러다 일으켜 줬다.
“아, 시원해.”
캡을 쓰고 있는 여자가 기분 좋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었다.
“더우면 모자 좀 벗지 그래요?”
“안 돼, 머리 안 감았거든. 한 삼 일 됐을 걸?”
청해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여자가 물었다.
“그런데 본가에서는 언제 올라온 거야? 내려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올라오기는 어제 올라왔어요. 내려간 건 이번 주 월요일이었고요.”
청해솔이 그러고는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원래, 이틀 전에는 올라올 생각이었는데…….”
“팔라크의 둥지 때문에 본가에 붙잡혀 있었구나?”
팔라크의 둥지.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 등장한 신규 던전의 이름에 청해솔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모르는 게 뭐가 있겠어?”
“그래요, 운조 언니가 모르는 게 뭐가 있겠어요.”
청해솔의 시큰둥한 반응에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여자, 이운조가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웃지 마세요. 그 던전 때문에 지금 얼마나 골치 아픈데요.”
청해솔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곧 언론에 뿌려질 내용이지만, 팔라크의 둥지에서는 L급의 회복 아이템을 얻을 수 있어요.”
“오호라, L급의 아이템이라니. 본가에 붙잡혀 있었을 만도 하네.”
던전 내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은 그 종류가 무척이나 다양했다.
그것들의 가치는 각성자의 등급과 마찬가지로 매겨졌지만, L급이라고 하여,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라 여겨지는 것도 있었다.
대개 거주자의 부산물이 그러했다.
하지만 거주자의 부산물이 아니더라도 L급으로 책정되어 귀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었는데, ‘회복’과 관련된 것들이 그런 경우였다.
“L급의 회복 아이템이 나오는 던전은 중국 산시성의 화산(華山)에 있다는 ‘현무의 무덤’ 이후로 처음이지 않아?”
더욱이 그곳은 중국 당국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는 곳.
타국의 각성자들이 함부로 넘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이운조의 말에 청해솔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네, 처음이에요.”
“공략은 이뤄졌지? 최초 공략자가 그 아이템을 얻었겠네.”
“얻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어요.”
청해솔의 말에 이운조가 떠보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한태극 의원님?”
“알면서 묻지 마세요.”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이운조가 즐겁게 물었다.
“순순히 그걸 넘겨줬네?”
“한태극 의원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청(淸)의 맹세]를 사용한 모양이더라고요.”
“약속 안 지키면 죽는 그거?”
“네, 한태극 의원님이 이번 일에 거금을 투자하셨는데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그랬나 봐요.”
청(淸)의 맹세.
청 가문의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스스로의 심장을 내걸고 하는 ‘약속’이었다.
“‘공략에 실패해도 투자한 것에 대한 손해 배상을 청구하지 않는다. 대신 공략에 성공한다면, 얻은 모든 것을 넘긴다.’”
“모두라니.”
이운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DMO에서 추정 등급 S급의 신규 던전이라고 알렸던 것 같은데.”
“언니, 우리네 늙은이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알잖아요.”
청해솔이 비스듬하게 팔꿈치를 괴며 중얼거렸다.
“스스로 특별하다고 여기는, 거주자의 후손들.”
평범한 인간이 내민 보고서 따윈 간단히 무시하는 자들이 청가의 인간들이었다.
“약속에는 ‘당신을 비롯한 혈육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라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어서 암살도 못 한다고 하더라고요.”
‘당신’이라고 함은, 당연히 팔라크의 둥지를 청가의 재산이 되게 만들어 준 한태극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 일 때문에 본가에 붙잡혀 있었어요. [청(淸)의 맹세]를 해제할 방법 없냐면서요.”
“너도 참 고생이 많다.”
“알아줘서 고마워요. 아무튼, 만나자고 했던 건 다른 게 아니라요.”
청해솔이 이운조에게 두꺼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청가의 족보예요. 진본은 아니고 복사본인데.”
이운조가 청해솔이 내민 것을 뭣도 모르고 건드렸다가 황급히 손을 거뒀다.
파지직-!
일어나는 전기에서 강한 저주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운조가 청해솔을 향해 설명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진본이랑 같은 수준의 보안이 걸려 있더라고요. 그것 좀 풀어 주세요.”
“우리 해솔이, 언니한테 어려운 걸 부탁하네.”
남해 용왕, 청(淸).
거주자의 피를 타고난 모든 인간의 이름이 기록된 책에 보안을 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거주자의 힘을 내가 가지고 놀 수 있을지 모르겠네.”
“언니라면 가지고 놀 수 있을 거예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런 걸 가진다고 될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이운조가 차오르는 말을 삼키고선 청해솔에게 물었다.
“비나리 고등학교에서의 일과 관련된 거야?”
“네……?”
“맞나 보네.”
이운조가 청가의 족보를 조심스레 안아 들며 말했다.
“익명의 의뢰자로부터 한 가지 부탁받은 일이 있었거든.”
“부탁이요?”
“응, 네 이름을 좀 팔아 달라더고. 작년 졸업생 몇몇한테.”
“그걸 또 들어주셨어요?”
이운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계좌는 어떻게 알았는지, 성공 보수 포함해서 입금시켜 놨더라고. 그래서 가볍게 비나리 고등학교의 전산을 건드려 줬지.”
“언니……!”
청해솔이 앓는 목소리를 내고는 머리를 짚었다. 류화홍에게 왜 그런 메시지를 받았나 했더니!
“너한테 딱히 해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그래도 말은 해 줄 걸 그랬네?”
이운조가 청해솔이 쥐여 준 것을 소중하게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해솔이, 네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줄 알았으면 돈만 먹고 날랐을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지난 일인데.”
청해솔이 짜증스레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는 말했다.
“하지만 일 좀 가려다면서 받아요. 비나리 고등학교의 전산망을 건들다니요?”
AMO가 알게 된다면 골치 아파질 일이었다. 청해솔의 걱정에 이운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괜찮아, 아저씨가 축제 때 떠들썩하게 일을 벌여 주시는 바람에 전산 오류 건은 묻혔더라고.”
조금 걱정했는데 말이야.
“여하튼간에 도움이 참 많이 되는 아저씨라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금요일이죠?”
“응, 나랑 만나는 것 말고 다른 약속 있나 봐?”
“아니요, 그건 아닌데.”
청해솔이 얼음이 다 녹은 아메리카노를 단번에 비우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진이가 아저씨네 여행에 따라갔거든요. 오늘 돌아온다던데 도착했을까 싶어서요.”
“뭐야, 동생이랑 같이 본가에 갔던 거 아니었어?”
“늙은이들이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제가 아저씨 여행에 따라 보냈어요.”
청해솔이 그렇게 말하고는 이운조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네네, 우리 해솔이 부탁인데 뭐든 들어줘야지.”
청해솔은 그렇게 이운조와 헤어져 카페를 나섰다.
***
“우와! 집이다!”
대략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집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저씨,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조심히 들어가게나. 해솔 양에게 안부 전해 주고.”
“네! 일주일 동안 감사했습니다!”
청해진이 자신의 짐을 양손 가득 들고는 쌍둥이에게 인사했다.
“윤리오, 윤리타! 월요일에 학교에서 보자!”
그러고는 나와 저세상에게도 인사했는데, 나는 대충 손만 흔들어 주고는 내 방으로 향했다.
“너무 좋아……!”
푹신한 이불의 감촉에 절로 두 눈이 감겼지만.
“리사, 손 씻어야지.”
“네에.”
각종 병균을 씻어내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윤리오, 우리 월요일에 학교갈 수 있을까? 태풍 온다는데.”
“소형? 중형?”
“대형이래.”
“학교 안 가겠는데? 이대로 방학 더 연장했으면 좋겠는데 학교가 그럴 리가 없겠지.”
윤사해를 따라 부지런히 짐을 옮기고 있는 쌍둥이가 방학의 끝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가을이 찾아오겠지. 벌써 계절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야, 윤리사. 비켜.”
우리 차애님을 죽였던 망할 주인공님과 반년의 시간을 함께 하는 중인데, 이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나는 괜히 저세상의 발목을 차고는 아직 볕이 강한 여름의 낮으로 뛰어갔다.
그때.
“그러다 얼굴 탄다?”
갑자기 들려온 고운 미성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보이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리사, 모자라도 쓰렴.”
윤사해가 밀짚모자 하나를 내게 내밀 뿐이었다. 나는 윤사해한테서 모자를 받아들고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윤사해가 집으로 들어간 후,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저씨, 여기 있죠?”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말했다.
“꼭 성불하세요.”
그러니까 자기는 귀신이 아니라고, 그렇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