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해바라기도 결국은 지나(2)
서차윤은 망할 아저씨다.
왜 그렇게 나를 붙잡아 말을 거나했더니, 돌아온 별장은 난리가 나 있었다.
“윤리사, 너……!”
“아버지! 진정하시고 리사 몸부터 닦아요! 윤리사, 우산은 어쨌어!”
“뭐야! 윤리사 찾았어?! 청해진, 내려와! 리사 찾았대!”
걱정 다음으로 이어지는 건 잔소리 폭격이라,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는 최대한 불쌍한 척을 했었다.
“윤리사, 뚝!”
씨알도 안 먹혔지만 말이지.
어찌됐든 지금 나는.
“얼마나 신나게 놀았으면 아가씨가 이렇게 아프세요?”
“신나게 놀기는 했지. 어젯밤에 몰래 뒷마당에 나갔더군.”
“어젯밤에요?”
지독한 감기 몸살에 걸려 콜록거리는 중이었다.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서차윤에게 우산을 주지 말 걸 그랬다.
괜히 억울해져서 코를 훌쩍이는데, 광혜원이 손수건으로 내 코를 닦아 주고는 윤사해에게 물었다.
“어젯밤에는 비가 안 왔나 봐요?”
“왔지. 지금처럼 아주 세차게.”
참고로 윤사해 소유의 별장이 위치한 강원도 동해에는 호우주의보가 내린 상태였다.
윤사해의 말에 광혜원이 경악했다.
“그런데 나가셨다고요?! 길드장님은 뭐하시고요!”
윤사해가 할 말이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를 보고는 윤리타가 말했다.
“혜원이 누나, 오신 김에 아버지도 좀 봐주세요.”
“길드장님은 왜요?”
“많이 피곤하셨는지 애가 일어나서 나간 것도 모르셨더라고요.”
“세상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몰랐을 거예요.”
윤리타가 그 입 좀 닫으라는 듯이 윤리오의 옆구리를 빠르게 찔렀다.
윤사해가 쌍둥이 아들들의 정다운 모습에 헛기침을 두어 번 터트리고는 입을 열었다.
“리오, 리타. 반성문은 다 썼니?”
“네, 여기요.”
윤사해가 윤리오와 윤리타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에 광혜원이 미간을 좁혔다.
“애들 반성문은 왜요?”
“어디에서 약초가 자란다는 것을 듣고, 야산을 올라가려고 하는 걸 잡아왔다네.”
“이 빗속을 뚫고 야산을 올라가려 했다고요?”
윤리오와 윤리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리사를 위해서였어요.”
“청해진이 아빠한테 일러바치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구해 왔을 텐데.”
거실에서 저세상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청해진이 방 안쪽을 향해 외쳤다.
“아저씨, 참고로 윤리오랑 윤리타 산삼 캐려고 나간 거예요!”
감기 몸살에 산삼이라니. 이 돌아버린 오라버니들 같으니라고.
청해진의 ‘산삼’ 소리에 광혜원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얼굴로 윤사해에게 물었다.
“길드장님, 휴가 제대로 즐기고 계시는 거 맞죠?”
윤사해는 피곤한 낯을 한 번 문지를 뿐이었다.
***
호우주의보가 내린 건 서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창을 세차게 두드리는 빗소리를 BGM 삼아 업무를 보고 있던 장천의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다들 잠깐 나가 주시겠습니까? 곧 중요한 연락이 올 예정이라.”
정중하게 예의를 차린 어조에 그의 비서들이 고개를 꾸벅이고는 방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히기 무섭게 장천의에게 있어서는 꺼림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나를 VVIP 취급해 주시다니 너무 감사한데.”
“VVIP 취급해 드려야지요.”
장천의가 허공에 떠올라 있는 여러 개의 화면을 아래로 내리고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나오실지 모르는 분이시니.”
“내가 조금 전에 나가신 네 비서 분들을 죽이기라도 할까봐? 걱정도 팔자셔라.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해쳐.”
“해칠 수 있는 방법이야 많지요.”
장천의가 두 손을 깍지 끼고서는 싱긋 웃었다.
“그보다 못 본 사이에 괴상한 취미가 하나 생기셨습니다? 그 우산은 뭡니까?”
“선물 받은 거야. 예쁘지?”
예쁘고 자시고.
우산에 맺힌 물방울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고인 것들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마는, 장천의는 집무실에 등장한 남자를 향해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중이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당신과 나는…….”
“만나서는 안 되지. 그런데 만나도 딱히 상관없잖아?”
남자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장천의에게 물었다.
“어디서 데리고 온 애야?”
가리키는 대상이 분명치 않은 말이었으나, 장천의는 남자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장천의가 표정을 굳히고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는 그 시선에 눈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어디서 데리고 온 애인지 딱히 상관없어. 누군지는 몰라도 사해랑 너무 닮았더라고.”
겉도, 속도.
“서차윤 씨, 그 아이는.”
“안 말해 줘도 된다니까?”
남자, 서차윤이 장천의의 말을 끊고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네, 장천의 씨?”
묻는 목소리에 장천의가 입술을 떼기도 전에 서차윤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아니다, 설명하려고 들지 마. 들으면 불쾌해질 것 같아. 그런데.”
서차윤이 제게 나타난 시스템 창을 장천의에게 내보였다.
【각성자, 서차윤에게서 <[특수 스킬] : Plologue Story>가 제거되었습니다.】
붉게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를 읽은 장천의의 두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서차윤이 그런 장천의를 보며 키득거렸다.
“네게 엿은 먹여야 할 것 같거든.”
“당신……!”
서차윤이 제 멱살을 잡으려는 장천의의 손을 잡고선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이번 회차에서 엔딩을 볼 생각 아니었어? 그러려고 그딴 짓을 벌인 줄 알았는데.”
“그럴 생각이기는 했습니다만. 실패할 것 같으면, 이번에도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던지라.”
“못 할걸.”
서차윤이 장천의의 손을 으스러뜨릴 듯이 쥐고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다시 시작될 일 없을 거래.”
장천의가 미간을 좁혔다,
“그냥, 그렇게 알아 두라고.”
서차윤이 장천의의 손을 놓아 주고는 걸음을 살짝 뒤로 물렀다,
“그럼 다시는 보지 말았으면 해. 그 낯짝.”
“그럴 겁니다.”
장천의가 한 쪽 눈가를 찡그리고는 서차윤을 비아냥거렸다.
“당신이 그 스킬을 포기한 이상, 이 세계에서 당신의 역할은 더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내가 한 말을 뭐로 들은 거야?”
서차윤이 눈웃음을 짓고는 장천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너는 프롤로그가 끝난 이 세계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움직여야 한다니까?”
서차윤은 조금 전에 시스템에 의해 제거된 스킬을 떠올렸다.
<[특수 스킬] : Prologue Story>
수도 없이 윤사해를 배신하게 만들었던 스킬.
자신이 그의 손에 죽는 순간, 그 스킬은 지독한 메시지를 제 눈앞에 보내면서 종료를 알렸었다.
[프롤로그(Prologue)가 끝을 맺었습니다.]
더는 볼 일이 없는 메시지이나, 수없이 본 것은 흉터처럼 기억 속에 남아 버렸다.
서차윤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내 역할은 진작 끝났어.”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 아니지. 아니야. 사해가 나한테서 마지막까지 거둬가지 않은 게 하나 있거든.”
그간 잊고 있었던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아이들 대부(代父)야.”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져 있던 것.
서차윤이 잊고 있었던 제 역할을 머릿속에 아로새기며 싱긋 웃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 말대로 이번 세계를 ‘마지막’으로 여길 생각이라.”
장천의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허투루 움직일 생각은 없답니다, 고객님.”
다소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서차윤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돌렸다.
분명한 형체를 지녔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천의는 서차윤이 사라진 곳을 말없이 노려보다가 한숨을 토해냈다.
***
[장천의 : 친구분을 정말 잘 두셨습니다, 고객님^^!]
머리 옆에서 울린 진동에 잠이 깨고 말았다.
누가 매너 없게 잠든 사람 옆에 휴대폰을 놓았나 했더니, 윤사해의 것이었다.
윤리타가 내 옆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들고선 밖으로 나갔다.
“아빠, 시준이 삼촌이랑 천의 삼촌 서로 아는 사이예요?”
“그럴 리가.”
윤사해의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흐느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아는 사이일 수도 있잖아.”
밖에서 들려오던 윤사해와 윤리타의 목소리가 뚝 끊겨 버렸다. 다행히도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리사!”
윤사해와 윤리타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가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가, 괜찮니?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이거 몇 개인지 보여?”
“두 개.”
나는 윤리타의 두 손가락을 손등을 향해 접어 주고는 윤사해에게 두 팔을 벌렸다.
“아빠, 리사 목말라.”
내 말에 윤사해가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부엌으로 나갔다.
“천천히 마시렴.”
죄송합니다, 아버지. 소녀 너무 목이 말라서 천천히 마실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물을 단번에 비우고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리오 오빠는?”
“2층에서 자는 중.”
윤리타가 내가 꺾었던 두 손가락을 찜질하며 말했다.
“어제 밤새도록 너 간호하다가 조금 전에 지쳐 잠들었어.”
우리 첫째 오라버니께 걱정을 크게 끼쳐 버린 것 같았다.
“해진이 오빠랑 세상이 오빠는?”
“계곡 물에 밤 담그러. 그 둘도 네 걱정 엄청 했어.”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청해진과 저세상은 돌아왔다.
그리고 윤리타는 청해진이 돌아오기 무섭게 그를 데리고 뒷마당으로 향했다.
“밖에 엄청 더운데!”
청해진이 우는 소리를 냈지만, 윤리타는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사진 하나 찍어야 되지 않겠냐고 그랬다.
“그럼, 윤리오도 깨워!”
“윤리오랑은 나중에 찍을 거야.”
그렇게 윤리타는 청해진을 붙잡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정답기 그지없는 모습에 흐뭇해하고 있는데, 저세상이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아저씨가 엄청 걱정하셨어.”
“리사도 이렇게 아플 줄 몰랐어.”
“그렇게 비를 맞고 왔는데, 아플 줄 몰랐던 거야?”
저세상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테이블에 뺨을 묻고는 뒷마당을 빤히 바라보았다.
“해바라기, 벌써 다 죽었네. 가을까지는 피어 있을 줄 알았는데.”
“죽었네가 뭐야. 진 거지.”
“진 거나 죽은 거나.”
“다르지.”
저세상이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내년에 오면 또 피어 있을걸? 그러니까 죽은 거랑 달라.”
“죽었으면 보지 못할 테니까?”
“응.”
다소 늦은 대답이 뒤이어졌다.
“그러니까 죽은 거랑 다른 거야.”
저세상의 말에 나는 바닥을 향해 고개 숙이고 있는 해바라기들을 빤히 쳐다봤다.
지고 있는 꽃들 사이에 서차윤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