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해바라기 피어난 곳에서(5)
류화홍이 윤사해에게 내 물놀이 옷을 가져다준 보람도 없이, 계곡에서의 물놀이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갑자기 왜 비가 오고 난리야?”
“일기 예보에서는 오늘 저녁부터 비 온다고 그랬는데.”
“기상청이 맞는 걸 본 적이 없어.”
때늦은 장맛비가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청해진 덕분에 우리 가족은 비를 맞지 않고 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리사, 따뜻한 물 받아 놨으니 먼저 씻으렴.”
“네에!”
나는 온몸을 감싸고 있던 수건을 벗어던지고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가득 담겨져 있는 욕조에 몸을 담그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안녕, 리사.’
지옥에 가 있어야 할 사람이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곳이 천국일 리가 없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귀신처럼 배경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던 몸이 떠올랐다. 그 몸에 바스러졌던 잎사귀와 꽃잎은 순식간에 멀쩡해졌었지.
“마치, 서차윤에게 짓밟힌 적 없다는 듯이…….”
그렇게 돌아와 있었다.
내 눈으로 본 게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따뜻한 물로 얼굴을 적시며 웅얼거렸다.
“그 아저씨, 도대체 뭐야?”
무엇보다 윤사해랑 그의 아들들에게 한 짓이 있는데 태연하게 나한테 인사하는 꼴이라니.
“진짜 이상한 사람.”
그런 이상한 사람을, 나는 만나러가야 했다.
“그냥 가지 말까?”
그런 마음도 들었지만 서차윤이 내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여름 때까지 리사, 네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니, 이거 놀라운데.’
저세상도 내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왜 살아 있냐고 그랬었지.
저세상은 회귀자니까 내가 살아있는 걸 이상하게 여긴 걸 수도 있다. 그런데 서차윤은?
“그러고 보니 나를 어떻게 알아보고 그렇게 인사를 한 거지?”
‘윤리사’가 윤사해와 아무리 닮은 얼굴이라고 해도, 그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건 뭔가 이상했다.
“저세상도 아는 눈치였지.”
더욱이 우리 주인공님께는 분노라는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서차윤에게 미래 예지와 관련된 스킬이라도 있나? 그래서 죽기 전, 나와 저세상에 관한 것을 봤고?”
아니, 이건 말이 안 되는 가정이었다.
그런 스킬이 있었다면 윤리오와 윤리타를 납치해서 윤사해에게 그런 엿을 먹여서는 안 됐지.
“아오, 모르겠다.”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다시 한 번 더 따뜻한 물로 세수하는데,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사? 제대로 씻고 있니?”
“응? 응!”
욕실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윤사해가 걱정이 됐나 보다.
나는 욕조에서 후다닥 몸을 일으키고는 사워기를 틀었다.
생각은 나중에, 일단 씻고 보자.
그렇게 나는 온몸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고 나왔고.
“리사, 이리 오렴.”
곧바로 윤사해에게 붙잡혀 머리가 말려지게 되었다.
“자연 바람으로 말리면 되는데!”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드라이기의 더운 바람이 뒤통수를 간질거렸다.
나는 윤사해가 손에 쥐여 준 인형을 가지고 장난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윤리타, 세상이 옷 앞에 뒀으니까 애 깨끗하게 씻기고 나와.”
“형, 잠깐만!”
윤리타가 욕실 문을 빼꼼 열고는 윤리오를 붙잡았다.
“얍.”
“앗, 차가! 야!”
장난치려고 붙잡았던 건가 보다.
저세상은 지금 윤리타와 함께 씻는 중이었다. 저세상이 혼자서 씻겠다면서 답지 않게 고집을 부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대체 계곡물에서 어떻게 놀았는지 옷을 벗을 때마다 모래알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 혼자서는 씻을 수 없다고 판단. 윤리타가 저세상을 씻겨 주기로 했다.
저세상이 윤리타와 함께 욕실로 들어가기 전, 내게 살려 달라는 시선을 보냈었지만…….
“히힛.”
가볍게 무시했었다. 저세상이 그런 나를 보며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는 눈빛을 보냈었는데 말이지.
윤사해가 내 웃음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눈웃음을 지으면서 내게 물었다.
“리사, 개운한가 보구나?”
“응! 그런데 아빠.”
“응?”
물끄러미 올려다 본 얼굴에서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윤사해보다는 앳된 얼굴을 지니고 있던 사람. 20대의 중후반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던 서차윤.
나는 애써 그 얼굴을 지워내고는 실없는 질문을 던졌다.
“내일도 비 올까?”
“그렇다는 구나.”
“안 왔으면 좋겠는데.”
내 말에 윤사해가 잔잔히 미소를 그렸다.
“내일은 가지고 온 장난감으로 아빠랑 놀자꾸나. 계곡에서 노는 것보다 더 재미있을 거란다.”
“응!”
가지고 온 장난감이라고 해도 하나밖에 없지만, 아빠와 함께라면 뭐든 재미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비 때문에 바비큐는 못할 것 같은데.”
“으음, 그럼 안에서…….”
윤사해가 내 머리를 말리던 것을 멈추고 윤리오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차피 젖었던 머리칼은 모두 마른 뒤라, 나는 그대로 윤사해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툭- 투둑-!
비는 열심히 창밖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청해진, 카드 내놔! 내가 먼저 눌렀잖아!”
“내 손! 내 손부터 걱정해 줘!”
“멍청이들아, 아버지랑 애들 깨우면 죽을 줄 알아.”
정정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잠들어 버린 늦은 밤에 나는 슬그머니 별장을 나왔다.
세찬 빗줄기에 우산 하나를 챙겨드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달칵, 창문을 닫기 무섭게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악! 내 손!”
“청해진, 시끄러! 아버지랑 애들 깨니까 그 입 좀 닥쳐!”
윤리오가 제일 시끄러웠다.
나는 조용히 다리를 움직여 별장을 벗어났다. 향한 곳은 해바라기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뒷마당이었다.
“이 망할 아저씨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가 말한 ‘망할 아저씨’가 혹시 나야?”
가까이서 들린 목소리에 흠칫,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진짜 찾아왔네?”
“찾아온다고 했잖아요.”
여우처럼 휘게 접힌 은색 두 눈에 나는 우산을 꼭 끌어 쥐고서 남자를 노려봤다.
내 시선에 서차윤이 키득거렸다.
“무서워라.”
거짓말.
나는 뚱하게 입술을 씰룩였고, 서차윤은 그런 내게 물었다.
“사해는 어쩌고? 이렇게 늦은 시간에 애를 혼자서 돌아다니게 둘 녀석이 아닌데.”
“뺘…….”
“뺘?”
뺨 때려서 재웠다는 말은 못하지.
“아저씨는 알 거 없어요.”
내 말에 서차윤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고선 무릎을 굽혔다.
“낮에 보면서 느낀 건데, 너는 너무 겁이 없는 것 같아.”
마주친 시선에 나는 고개를 살짝 뒤로 빼며 말했다.
“리사는 귀신 같은 거 안 무서워하거든요.”
“나는 귀신이 아닌데.”
“그러니까 귀신 같은 거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차윤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저씨가 리사를 해치려면, 만났을 때 해쳤겠죠. 아니에요, 아저씨?”
서차윤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이내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랬겠지.”
자괴감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서차윤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도 잠시.
“낮에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질문을 내던졌지만 말이다.
두 눈을 낮게 내리깔고서 젖은 땅을 보고 있던 서차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제가 여름까지 살아 있는 거, 처음 본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신기하다면서요.”
“그 말 그대로인데?”
서차윤이 키득거렸다.
“걔가 그렇게 어릴 때에 사해랑 같이 있는 것도 처음 봤어.”
“저세상이요?”
“그래, 걔. 그 녀석 이름은 언제 들어도 참 신기해.”
그러면서 서차윤은 미친 사람처럼 저세상의 이름을 여러 번 읊조렸다. 그러다가 그는 말했다.
“내가 부모라면 애 이름을 그렇게 안 지었을 거야.
그 말에 나는 물었다.
“아저씨, 저세상을 어떻게 알아요? 저세상은…….”
“내가 죽은 후에 태어났지.”
서차윤이 내 말을 끊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나도 하나 물어보자. 너는 나를 어떻게 아는데?”
말문을 막히게 하는 질문이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닫는데 서차윤이 그런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사해가 네게 내 이야기를 해 줬을 리는 없고, 너는 나를 어떻게 알아봤을까?”
“서 비서님이랑 닮았으니까요.”
“내 이름은?”
들린 질문에 입술을 닫았다. 서차윤이 그런 나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해 주기 싫으면 됐어. 답해 주기 싫은 질문에 입 닫는 것도 제 아빠랑 똑같네. 리오랑 리타도 그러는데.”
서차윤이 왜인지 모르게 그리움에 잠긴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윤사해를 그런 식으로 배신했으면서, 그를 그리워하는 듯한 얼굴이라니.
남들이 봤으면 뻔뻔한 낯짝이라고 손가락질했을 거다. 나 역시 당장에라도 가운뎃손가락을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사실, 지금 엄청 신기하거든?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놀라운데 나를 볼 수도 있다니.”
묻는 말에 나는 중지를 드는 대신, 우산을 꽉 쥐었다. 서차윤이 그런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너 뭐야? 사해의 딸이 맞기는 한 거야?”
“맞는데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그러는 아저씨는요?”
“응?”
고개를 갸웃거리는 낯짝을 향해 나는 질문을 쏟아냈다.
“아저씨는 진짜 ‘서차윤’이 맞아요? 맞다면, 어떻게 여기 있는 거고 리사랑 대화를 나누는 거예요?”
“네가 말하는 ‘서차윤’이 네 오빠들을 서커스에 넘겼던 사람을 말하는 거라면 내가 맞고.”
자조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떻게 여기 있는 거냐면 여기서 죽었으니까 여기 있는 거겠지? 그런데 너랑 대화는 어떻게 나누고 있는 걸까?”
서차윤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그건 나도 궁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