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해바라기 피어난 곳에서(4)
대낮에 귀신이라니.
헛것인가 싶어 두 눈을 세게 비볐지만, 그럴수록 눈앞의 남자는 더욱 선명하게 보이기만 했다.
‘선명하게’는 아니었다.
남자의 몸은 뚜렷하게 윤곽이 잡혀 있었지만 투명하게 바깥의 풍경들을 비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귀신처럼 말이다.
하지만 귀신치고는 혈색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아저씨 뭐예요?”
“보통은 ‘누구세요’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목소리 또한 분명하게 들려왔다.
공기를 울리는 고운 미성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럼, 아저씨 누구세요?”
“글쎄, 내가 누구일 것 같은데?”
이거, 스무고개도 아니고.
나는 미간을 좁히고는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붉은기가 도는 갈색 머리칼은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고, 기다란 속눈썹 아래에 자리한 은빛의 두 눈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귀공자와도 같은 외모가 꼭 누군가를 연상케 했는데…….
“서 비서님이랑 닮았어!”
그래, 서차웅을 생각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외모는 눈앞의 남자가 훨씬 더 뛰어났지만 말이다.
서차웅의 선조가 후손 좀 괴롭히지 말라면서 윤사해에게 한 마디 하려고 찾아온 건가 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내 말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걔가 나랑 어머니가 같거든. 우리 둘 다 어머니를 닮아서 그렇게 느끼나 보네.”
서차웅에게 형제가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에게 형제가 있다면 존재할 법한 이름을 하나 알고 있었다.
“서차윤……?”
“안녕, 리사.”
건네진 인사와 함께 더위를 한껏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살랑이며 이는 바람에 남자의, 서차윤의 결 좋은 적갈색 머리칼이 흔들거렸다.
서차윤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멍하니 중얼거린 내 말에 서차윤이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가오는 순간에 들리는 소리라곤 없었다. 그의 구둣발에 잎사귀가 짓밟히고, 그의 정장 코트에 꽃잎이 스치고 있는데도 그랬다.
아니, 아니다.
그의 구둣발에 짓밟힌 잎사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기 넘치게 고개를 들고 있었고, 떨어진 꽃잎은…….
‘멀쩡해졌어.’
주위의 풍경을 투명하게 비추던 서차윤의 몸은, 불투명하게 변해 내 앞에 멈춰 섰는데 말이다.
내 앞에 멈춰선 서차윤이 무릎을 굽히고선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우와, 이렇게 보니까 진짜 작다.”
“아저씨도 작은데요.”
“아니야, 나는 네 아버지보다 조금 더 큰걸?”
“아닌데요, 우리 아빠가 아저씨보다 조금 더 큰데요.”
“하하, 눈이 나쁜가 보네.”
은색의 두 눈에 오롯하게 담기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나는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허튼 짓을 할 것 같으면 당장에라도 서차윤의 얼굴을 향해 이를 휘두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서차윤은 내게 별 다른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말했을 뿐이다.
“여름 때까지 리사, 네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니. 이거 놀라운데.”
주먹 쥔 손이 절로 풀리는 말을.
***
여름날에도 변함없이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는 귀수산의 이매망량.
그곳의 주인이 휴가를 떠나 자리를 비운 가운데, 길드원들은 대낮에 술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럼, 그 별장이 부길드장이 잡혔었던 그곳이라고요?!”
“이보게, 혜원이. 목소리 줄이게.”
쉿쉿, 주의를 주는 목소리에 광혜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줄일 게 뭐가 있어요? 길드장님도 안 계시는데.”
“하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잖아요.”
“화홍아, 너는 아직도 안 갔니? 그러다 길드장님한테 혼난다.”
류화홍이 윤리사의 물놀이 옷을 가지런히 정리하여 종이 가방에 넣으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본 사야가 거대한 호랑이의 털을 손질하다 류화홍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길드장님께서 찾으신 지 꽤 되지 않았나요, 화홍?”
“그렇기는 하지만 가기 싫어요! 태운 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거기 귀신 나온다고!”
광혜원에게 주의를 줬던 길드원, 태운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그 귀신이 바로 부길드장님이라고 소문이 파다했었지.”
“아악! 그만 말해요!”
류화홍이 두 귀를 틀어막고는 술판이 벌어지는 평상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난리를 치는 그 모습에 광혜원이 짧게 혀를 찼다.
“너도 참 별나다니까? 이매망량이 있는 이곳 귀수산도 귀신이 득실거리는 곳이잖아?”
“하지만 길드 안은 안전하잖아요! 저기 저 부적들을 봐요! 귀신이 돌아다닐 수 있나!”
류화홍의 우는 목소리에 광혜원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화홍, 그러지 말고 길드장님께 빨리 다녀오셔요.”
“사야 님……!”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은 거짓이라더군요.”
“정말요?”
“네, 길드장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던 거랍니다.”
사야의 말에 류화홍이 크게 안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치만 귀신 보면 울 거예요. 태운 님을 길드 밖으로 던져 버리면서 울 거라고요!”
“내가 뭐 했다고……?”
막걸이를 마시려던 태운이 억울하다는 얼굴을 보였지만, 류화홍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광혜원이 태운의 잔을 빼앗아 들고는 사야에게 말했다.
“사야 님, 화홍이 어리광 너무 받아주지 마세요. 사야 님이 자꾸 그러니까 애가 안 크잖아요.”
“혜원이, 화홍이의 성장판은 이미 닫혔다네. 그보다 그거 내 잔인데.”
광혜원은 태운의 말을 무시하고서 그의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러고는 사야에게 물었다.
“그런데 별장에 귀신 나온다는 소문은 어쩌다 만들어진 거래요?”
“그곳은 부길드장이었던 서차윤이 잡힌 곳이기도 하지만, 죽은 곳이기도 하거든요.”
사야의 나긋한 목소리에 광혜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곳에 애들을 데리고 갔다니, 길드장님도 참…….”
“인제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겠죠.”
사야가 자신이 그 무엇보다도 아끼는 마수, 거대한 호랑이의 형상을 지닌 금강호의 털을 다시 빗질하기 시작했다.
“자자, 그러지 말고 술이나 어서 한 잔씩 들자고! 죽은 사람 이야기를 뭣하러 꺼내!”
태운의 이야기에 술자리가 다시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시끌시끌한 분위기 속에서 금강호의 털을 손질하고 있던 사야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죽은 사람이라…….’
태운의 말대로 서차윤은 10년도 전에 죽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사람이란 말이지.”
지은 죄가 워낙에 커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떠난 빈자리가 워낙에 커서 그런지는 모를 일.
사야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금강호의 부드러운 털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길드장님께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신 것인지 모르겠군.”
그건 서차윤의 목숨을 직접 거뒀던 윤사해, 그만이 알 수 있을 일이었다.
***
서차윤.
윤사해의 아들들인 윤리오와 윤리타를 납치하여 서커스에 넘겼던 자.
그리고.
「“아직도 차윤이를 원망하고 있니, 사해야?”
“증오하고 있습니다.”」
윤사해가 믿었던 친구.
『각성, 그 후』에서도 그리고 이 세계에서도 윤사해가 자식들을 멀리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서차윤이 내게 한 말은, 저세상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서 들었던 것과 결이 같은 말이었다.
‘네가 왜 살아 있어?’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선 서차윤을 노려봤다.
“노려보는 얼굴은 사해랑 똑같네. 아주 똑같아.”
“아빠 딸이니까요.”
풀렸던 힘이 다시금 온몸에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두 손을 다시 주먹 쥐고는 서차윤을 노려봤다.
“그러다 레이저라도 쏘겠는데?”
“레이저는 못 쏴도, 주먹은 휘둘러 줄 수 있어요.”
그렇게 서차윤과 기싸움을 이어갈 때였다.
“리사, 어디 있니!”
나를 찾는 목소리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윤사해가 서차윤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안 돼.’
화목하기 그지없던 가족 여행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게 뻔했다.
서차윤이 내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네 아버지는 나 못 보니까.”
“못 본다고요?”
“응, 참고로 리오랑 리타도 나 못 봐. 해진이라고 했나? 리오랑 리타의 친구인 청가의 아이도.”
서차윤은 그렇게 말하고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걔는 아닐 거거든.”
“걔……?”
별장에 있는 사람 중에 서차윤이 저렇게 칭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저세상이요?”
정답인가 보다.
서차윤이 내가 꺼낸 이름에 말없이 웃음을 보였다. 은빛을 띠고 있는 두 눈은 차가우리만치 내리 깔고 있었지만 말이다.
언뜻, 서차윤의 두 눈에서 분노의 감정을 읽은 것도 같다.
서차윤이 죽었을 당시, 저세상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다. 즉, 둘은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란 뜻.
그런데 왜 저런 감정을 내비치는 거지?
드는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윤사해의 목소리가 거듭 들려왔다.
“리사! 어디 있니!”
나를 찾는 다급한 목소리에 서차윤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버지가 너 하나 찾겠다고 여기를 불태워 버리기 전에 빨리 가 봐. 저러다 울겠다.”
“안 그래도 갈 거거든요?”
나는 걸음을 돌리고는 서차윤에게 말했다.
“다시 찾아올게요.”
“언제?”
“밤에요. 귀신은 원래 밤에 나타나야하는 거거든요.”
내 말에 서차윤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귀신이 아닌데.”
“귀신으로 해요.”
당신, 10년 전에 죽은 사람이니까. 나는 뒷말을 삼키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윤사해에게로 달려갔다.
“아빠!”
“리사……!”
윤사해가 곧장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윤사해의 뺨에 얼굴을 비비고는 그에게 물었다.
“화홍이 오빠는?”
“리사 옷만 가져다주고 갔단다. 원한다면 다시 부르마.”
“으응, 괜찮아.”
나는 고개를 살짝 젓고는 해바라기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곳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차윤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