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해바라기 피어난 곳에서(3)
이렇게 수많은 해바라기가 피어있는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는데, 윤사해가 부드럽게 나를 불렀다.
“리사, 들어가자꾸나.”
“조금만 더 구경하고 싶은데!”
“구경은 나중에 아빠랑 하고, 들어가서 짐부터 풀자꾸나.”
그리고 선크림도 바르자면서 윤사해가 내 손을 잡고 별장으로 향했다. 다른 한 손에는 저세상의 손을 꼭 쥐고.
저세상도 별장 곳곳에 피어 있는 해바라기들이 아름다운지, 시선을 떼지 않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하긴, 저세상도 윤사해가 소유하고 있는 별장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거다.
여기서 처음이 아닌 사람은…….
“우와! 어릴 때랑 그대로야! 윤리오, 저기 봐! 저기 기억나? 너 저기 올라가려다가 굴러 떨어졌었잖아!”
“기억 안 나.”
윤리타와 윤리오, 그리고 윤사해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해도 피곤하다면서 청해진이 놀자는 소리에 난색을 표하더니, 쌍둥이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신난 모습이었다.
청해진이 윤리타가 가리킨 굴뚝을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기를 올라가려고 했었다고? 윤리오, 너 어릴 때 대단했었구나?”
“그러니까 기억 안 난다고!”
정답게 노는 아들과 친구의 모습에 윤사해가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그렇게 들어선 별장.
지어진 지 10년도 더 됐다고 들었는데, 별장은 새 것처럼 깨끗했다.
꾸준히 관리라도 된 모양새인데?
“얘들아, 각자 원하는 방 하나씩 잡으렴.”
윤사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윤리오와 윤리타, 그리고 청해진이 사이좋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2층 내 거야!”
“그럼 2층에 있는 침대 내 거! 너희는 바닥에서 자!”
“윤리오가 바닥에서 잔대! 윤리타, 빨리 침대 차지해!”
참으로 떠들썩한 자라나는 청소년들이었다.
그보다 윤리오랑 윤리타는 청해진이 이번 가족 여행에 따라오는 걸 그렇게 싫어하더니!
“아, 청해진 때문에 윤리타한테 침대 뺏겼어!”
“청해진 나이스!”
청해진이 안 따라왔으면 저 둘은 어떻게 놀았을까 싶었다.
“리사는 어느 방에서 지내고 싶니? 어디든 고르렴.”
그렇게 말해도 1층에 마련된 방은 큰 방과 작은 방. 이렇게 두 곳 뿐이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묘책을 떠올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리사는 아빠랑 지내고 싶은데!”
내 말에 윤사해가 기분 좋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고, 저세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사해가 그 모습을 보고는 저세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상이도?”
“네? 네…….”
저세상이 우물쭈물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아저씨랑 지내고 싶어요.”
눈치껏 꺼져 줬으면 하는데, 안타깝게도 저세상에게는 그런 눈치가 없었다.
아니면 있는데 애써 무시하는 거거나.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드는 주인공님이셨다.
“그럼, 다 같이 큰 방에서 지내는 것으로 하고. 작은 방에 짐을 몰아넣자구나.”
윤사해가 그렇게 말하고는 거실에 놓여 있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빠, 뒷마당 구경 다녀와도 돼?”
“조금 있다가 아빠랑 가자꾸나.”
“리사는 지금 가고 싶은데!”
뒤로 나 있는 넓은 창문 밖으로 해바라기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앞에 앉아서 불어오는 여름 바람에 물결치는 해바라기를 얌전히 구경했다.
그때였다.
2층에서 여럿이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2층에서 시끌벅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아래로 내려와 윤사해에게 물었다.
“아빠! 저희 먼저 계곡에 가서 놀고 있어도 돼요?”
윤리오가 윤사해를 향해 안 된다고 해 달라는 시선을 간절하게 보냈다. 윤리오는 우리와 함께 움직이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윤사해는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말했다.
“깊은 곳 조심하렴.”
윤사해의 말에 윤리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고, 청해진이 그런 윤리오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웃었다.
“에이, 제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다녀올게요! 세상아, 리사! 나중에 봐!”
청소년들께서 순식간에 별장을 나가 버렸다. 윤리오가 도중에 나가기 싫다고 살짝 버텼지만.
“윤리타, 윤리오 들어.”
“오케이.”
“아악! 알았어, 내 발로 갈게!”
윤리타와 청해진에게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께서 계곡으로 떠나시고, 윤사해는 남은 짐을 마저 정리한 뒤에 우리에게 물었다.
“리사, 세상아. 계곡은 내일 가고 우리는 뒷마당이나 구경할까? 어떠니? 싫으면 싫다고 말해도 된단다.”
짐 정리가 무척이나 고되었던 모양이다. 하긴, 3시간 30분 동안 운전한 다음에 짐도 정리했으니.
‘힘들 만도 하겠지.’
더욱이 짐도 정리하면서 중간중간 청소하는 것도 봤다.
우리 아버지, 저러다 몸살 나시면 큰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리사는 해바라기만 봐도 좋아!”
“저도요. 계곡은 내일 가도 되니까 괜찮아요.”
우리의 대답에 윤사해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펴졌다.
하지만 우리는 이내 내뱉은 말을 후회하게 됐는데.
“리사, 세상아. 웃어 보렴.”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윤사해가 사진기를 들이밀면서 나랑 저세상을 찍어댔기 때문이었다.
“서로 조금만 더 가까이 붙고.”
나는 질색하면서도 윤사해가 원하는 바를 들어줬다.
윤사해의 입장에서도 몇 년 만의 가족 여행일 텐데, 그가 원하는 건 최대한 맞춰 주고 싶다.
하지만 아빠, 사진 인제 그만 찍으면 안 될까?
여기서 더 찍었다가는 아빠 뺨에 손을 휘두르는 패륜을 저지를 것 같아.
다행히도 윤사해는 내 기분이 저조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저기서 마지막으로 한 장만 더 찍고 돌아가자꾸나.”
“마지막이야.”
“그래, 마지막.”
윤사해가 가리킨 곳은 키가 제일 높은 해바라기 앞이었고, 나와 저세상은 그 앞에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다.
“얘들아, 조금 더 웃어 보렴.”
입꼬리가 파르르 떨릴 정도로 웃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빠도 찍어!”
“맞아요, 아저씨도 찍으세요. 저희가 찍어 드릴게요.”
저세상이 윤사해에게서 사진기를 뺏어 들었다. 나도 이에 질세라, 윤사해를 해바라기 옆에 세웠다.
저세상이 제법 전문가 느낌이 나는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아저씨, 웃어 보세요.”
“아빠, 해바라기 꽃잎 살짝 만져 봐. 아니, 그렇게 말고!”
윤사해가 우리의 주문에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쭈뼛거렸다.
“세상이 오빠, 지금! 지금 저 모습을 찍어!”
“안 그래도 찍었어.”
저세상이 뿌듯하게 웃으면서 내게 사진을 보여 줬다.
“오.”
자식, 잘 찍었는데?
“얘들아, 끝났니?”
“응!”
“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윤사해에게 조르르 달려갔다.
윤사해가 우리가 찍은 것을 보고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잘 찍었구나. 인제 그만 돌아갈까?”
나와 저세상은 고개를 끄덕였고, 윤사해는 그대로 우리를 안아 들고서 별장으로 향했다.
별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우리를 반긴 사람은 윤리오와 윤리타였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계곡에 왜 안 오셨어요? 물 엄청 시원하고 좋았는데!”
윤리오와 윤리타는 사이좋게 젖은 머리에 수건을 올려놓고 있었는데, 방금 막 씻고 나온 듯 했다.
윤사해가 그런 아들들의 젖은 머리칼을 말려 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너희끼리 즐겁게 놀라고 가지 않았지.”
거짓말.
나랑 저세상을 돌보는 것과 동시에 윤리오와 윤리타, 청해진까지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상상만으로도 피곤해서 가지 않은 거면서!
하지만 윤사해의 말이라면 뭐든 좋은 쌍둥이는 그러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2층에서 청해진이 내려오며 윤사해를 반겼다.
“아저씨, 다녀오셨어요? 계곡에는 왜 안 오셨대요?”
“우리끼리 즐겁게 놀았으면 해서 안 오신거래.”
“크으, 역시 아저씨! 배려심 넘쳐! 그런데 애들이랑은 뭐하고 노셨어요?”
청해진의 질문에 윤사해가 사진기를 꺼내 보여 줬다. 사진기 주위로 청소년들께서 모여 들었다.
“아저씨, 애들 표정이 왜 이래요? 꼭 뭐 씹은 얼굴들인데.”
“애들 얼굴이 뭐 어때서.”
“맞아, 잘만 나왔구만!”
윤리오와 윤리타가 청해진의 손에서 윤사해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아버지, 사진 저희 폰으로 옮겨도 되죠?”
“물론이지.”
윤리오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아빠. 그런데 저녁은 어떻게 할 거예요?”
“테라스 쪽에서 바비큐를 할까 하는데.”
“제가 숯하고 고기 옮겨다 놓을게요!”
윤리타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료 손질은 제가 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윤리오가 그렇게 말하고는 사진을 옮기는 것에 열중했다. 청해진이 그런 윤리오에게 물었다.
“내일은 우리도 해바라기 꽃밭에서 사진 찍으면서 놀까?”
“너 혼자 놀아. 나는 내일 애들이랑 물놀이할 거거든.”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윤리오와 물놀이를 할 수 없게 됐다.
윤사해가 깜빡하고 내 물놀이 옷을 챙겨오지 않은 것이다.
윤리오가 마지막에 짐을 하나씩 점검하기까지 했는데 일어난 불상사였다.
윤사해가 챙겨 온 다른 옷들은 모두 원피스 종류라, 물놀이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옷들이었다.
지금 윤사해는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 중이었는데.
“그래, 그거랑 얇은 바람막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도 챙겨 와 주게.”
아무래도 류화홍인 것 같았다.
“류화홍 헌터가 곧 온다는구나.”
역시나 류화홍이었다.
그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밀짚모자를 챙겨 들었다.
“그럼, 화홍이 오빠 올 때까지 뒷마당에서 해바라기 보고 있을래!”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마렴.”
“네에!”
나는 챙겨든 밀짚모자를 머리 위에 쓰고는 곧장 뒷마당으로 뛰쳐나갔다.
뒷마당의 해바라기들은 오늘도 여전히 황금색의 빛깔을 아름답게 뽐내고 있었고.
“응……?”
그 사이에 덥지도 않은지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꼭 장례식장에 가려는 사람처럼.
저러다 열사병으로 쓰러지지.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거기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거든요!’
‘귀신?’
‘네, 장례식장에 입고 갈 법한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가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에이, 설마.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밟은 풀이 적막을 울리는 소리를 내자.
“…….”
해바라기 가운데서 멀뚱히 서 있던 남자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고! 두 눈은 텅 비어 있는 게……!’
혈색은 나보다 좋았고, 두 눈은 또렷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아.”
여기 귀신 나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