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해바라기 피어난 곳에서(2)
다음 날, 나는 우성운을 때려 주는 대신, 그에게 다리를 거는 것으로 복수해 줬다.
“선생님, 윤리사가 저한테 발 걸었어요!”
“아니에요! 우성운이 혼자 걷다가 혼자 넘어진 거예요!”
“거짓말!”
이런 사소한 해프닝이 있기는 했었지만 말이지.
단예랑 단아는 오늘도 유치원에 나오지 않았다.
“방학이 끝났는데도 단예랑 단아가 유치원에 오지 않으면 어쩌지?”
“그럼, 찾아가 보면 되지!”
단예랑 단아의 집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사해한테 물어보면 가르쳐 줄 것 같았다.
싫다고 하면 ‘내 말이나 들어라!’를 사용하면 되는 일이고.
내 말에 도윤이가 활짝 웃었다.
“좋아! 방학 끝나고도 안 오면 같이 찾아가 보자, 리사야!”
그렇게 도윤이와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는데, 유치원 선생님께서 찾아 오셨다.
“리사야, 오빠가 데리러 왔네?”
선생님의 말에 나는 유치원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도윤아. 방학 잘 지내!”
“리사도!”
오늘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류화홍이었다.
“아빠는?”
“짐 싸시느라 바쁘셔요.”
“오빠들은?”
“해진이 만나러 갔어요. 아가씨, 혹시 제가 온 게 싫으신가요?”
“응.”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류화홍을 향해 방긋 웃어 주었다.
사실, 류화홍이 나를 데리러 온 게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류화홍은 뭔가 놀리기 좋단 말이지.
내 대답에 류화홍이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길드장님의 안 좋은 점만 빼다 닮으셨어…….”
“아빠한테 일러바쳐야지.”
“크흠, 흠! 바로 데려다 드릴까요? 아니면 걸어가실래요?”
“걸어갈래!”
집에 가면 나 역시 짐을 싸야할 텐데, 그런 귀찮은 일은 최대한 늦게 하고 싶었다.
류화홍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나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화홍이 오빠, 여행 가는데 짐을 꼭 싸야 할까? 설레는 마음만 가져가면 안 될까?”
“아가씨, 어휘력이 점점 풍부해지시네요.”
류화홍이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했다.
“글쎄요, 저는 딱히 여행 가는데 짐을 챙겨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필요하면 그때그때 가지고 오면 되니까요.”
이동계 각성자는 참 좋겠네.
“그보다 어쩜 좋아요?”
“뭐가?”
“이번에 강원도에 있는 별장으로 여행을 가신다면서요?”
“응!”
‘윤리사’의 일곱 살 인생에 있어서 아마도 첫 가족 여행일 여름휴가가 내일부터 펼쳐질 예정이었다.
비나리 고등학교의 방학이 자라나리 유치원과 다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행이 기대되어 싱글벙글 웃고 있는데 류화홍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선 내게 속닥거렸다.
“거기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거든요!”
“귀신?”
“네, 장례식장에 입고 갈 법한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가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류화홍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고! 두 눈은 텅 비어 있는 게……!”
아니, 이 오빠가 지금 누구를 겁먹게 하려는 거야?
“괜찮아! 리사는 귀신같은 거 하나도 안 무서워하거든!”
나는 류화홍의 말을 가로막고는 씩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윤사해에게 일러바치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윤사해의 품에 달려들었다.
“아빠! 화홍이 오빠가 내일 우리가 가는 별장에 귀신 나온대!”
“뭐……?”
“두 눈이 텅 비어 있는 젊은 남자 귀신이 나온다는데!”
류화홍이 내 유치원 가방을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말했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답니다, 길드장님. 그럼, 내일 여행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디오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감췄다.
윤사해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사, 류화홍 헌터가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렴.”
“별장에 귀신 안 나와?”
“그럼.”
하긴, 별장에 귀신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윤사해의 손에 퇴치될 게 뻔했다.
류화홍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해 준 거지?
다음에 만나면 바로 뺨 한 대다.
“방에 가서 내일 가지고 갈 것들 챙기렴, 리사.”
“네에.”
귀찮은 일을 처리할 시간이 다가오고 말았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방문을 열었다.
“이것도 챙기고, 저거랑……!”
그리고 침대 위의 인형들과 서랍에 놓인 장난감들을 모조리 챙겨 들었다.
하핫, 어쩌다 보니 짐을 싸는데 진심이 되고 말았다. 아마 미운 일곱 살 때문이겠지.
나는 아동용 캐리어에 온갖 인형들과 장난감들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는 거실로 나왔다.
“짐 다 챙겼어!”
윤사해가 내가 챙기고 나온 캐리어의 내용물을 보고는 앓는 목소리를 내었다.
“아빠, 왜?”
“우리 리사가 짐을 너무 기가 막히게 챙겨서 놀랐단다.”
그거 나 욕하는 거지?
윤사해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캐리어의 내용물을 모조리 밖으로 빼냈다.
“인형은 하나만 챙겨 가자꾸나. 장난감도. 옷은 어디 있니?”
“없는데.”
윤사해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가서 세상이 오빠 짐 싸는 거 구경하고 있으렴. 리사 짐은 아빠가 챙기고 있으마.”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아무래도 미운 일곱 살이 일을 너무 잘한 모양이었다.
윤사해에게 인형이랑 장난감을 하나씩만 더 챙겨 가면 안 되냐고 칭얼거릴까 하다가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뚱한 얼굴로 저세상의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캐리어에 옷을 가지런히 정리하여 넣고 있던 저세상이 나를 흘긋거리고는 말했다.
“아저씨 좀 귀찮게 하지 마.”
“흥.”
코웃음을 치는데, 저세상이 손목에 낀 팔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리사랑 똑같은 거다!”
“아니거든?”
저세상이 기겁하며 말했다.
“네 거는 토끼가 그려져 있지만, 나는 사자가 그려져 있다고. 그러니까 같은 거 아니야.”
“어차피 똑같은 동물이잖아?”
“똑같은 동물이라니?”
저세상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너는 초식 동물, 나는 육식 동물. 우리는 서로 다른 동물이야.”
우리 주인공님께서는 토끼가 초당 뺨 다섯 대씩 때릴 수 있다는 걸 모르나 보구나?
모르면 알려 주는 게 인지상정!
“리사가 초식 동물이 육식 동물보다 강하다는 걸 알려 줄게, 세상이 오빠!”
“악! 아야!”
나는 저세상의 목에 헤드락을 걸고는 그의 뺨을 향해 열심히 손바닥을 움직였다.
“리사, 세상아!”
불행히도, 내 짐을 싸러 갔던 윤사해가 금방 거실로 나오면서 야단을 맞게 됐지만 말이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저세상이 억울하다는 얼굴을 보였지만, 우리는 나란히 윤사해에게 혼이 나고 말았다.
“둘이 서로 손 꼭 잡고.”
시바.
“꼭 끌어안으면서 미안하다고 하렴. 어서.”
손까지는 잡을 수 있지만 포옹은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그러고 보니 리사랑 세상이, 아직 간식을…….”
안 먹었다.
윤사해의 입에서 나온 ‘간식’ 소리에 나와 저세상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 세상이 오빠.”
“나도 미안해.”
서로의 등을 강하게 두드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짐 챙기고 있으셨어요? 손 씻고 바로 도와드릴게요.”
곧이어 청해진을 만나러 갔다는 윤리오와 윤리타가 돌아왔다.
“아빠, 청해진이 밤중에 해솔이 누나한테서 전화 갈 거라고 꼭 받아 달래요.”
“전화?”
“네. 그보다 짐 다 싸셨네요? 윤리오, 네가 할 거 없을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손을 씻고 나온 윤리오가 윤사해가 챙긴 것들을 하나하나 점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애들 속옷은요? 양말은 또 어디 갔어요? 선크림이랑 스킨, 로션은요?”
“아……!”
윤사해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랑 저세상은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
그동안 윤리타는 나와 저세상에게 단단하게 주의를 주었다.
“윤리사, 그리고 세상아. 너희 둘 오늘 일찍 자야 하는 거 알지? 안 그러면 두고 갈 거야.”
그 말에 늦게 잠드는 것이 일상인 나와 저세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가족 여행에 대한 설렘으로 제대로 잘 수 있을까 했는데.
***
“윤리사, 일어나!”
아주 잘 잤다.
저세상 역시 간밤에 잘 잔 모양인지, 환한 낯빛으로 나를 반겼다.
“아침은 가면서 먹을 거래.”
나는 그 어느 날보다도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은 뒤에 거실로 나왔다. 꼼꼼히 세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리오 오빠, 리타 오빠!”
“리사, 일어났어?”
“윤리사, 일어났네? 안 일어나면 두고 가려고 했는데.”
“애한테 장난치지 마.”
윤리오와 윤리타가 부지런히 짐을 옮겨가며 내게 인사했다.
“아빠는?”
“차 점검 중.”
이번 여행에는 차를 끌고 가기로 했다. 이동 스킬을 사용해도 되지만, 여행 가는 기분을 낼 거라나 뭐라나.
어쨌든, 그렇게 맞이한 가족 여행의 첫 날!
안타깝게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찾아온 불청객이 있었으니.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네, 해진 군.”
바로 청해진이었다.
청해진의 손에는 캐리어 하나가 들려있었는데, 윤리오와 윤리타가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진짜 짜증나.”
“그러니까.”
윤리오와 윤리타의 말에 청해진이 방긋 웃었다.
“다 들려, 이 자식들아.”
이번 가족 여행에는 청해진도 함께 하게 됐다.
어젯밤에 급하게 결정된 것으로, 청해솔의 부탁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윤사해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아저씨, 애들 가출했을 때 저한테 하신 말씀 기억하세요?’
그 말에 윤사해는 청해진을 이번 가족 여행에 데려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윤리오와 윤리타가 가출했을 때, 청해솔이 둘의 행방을 윤사해에게 알려 준 적이 있었지.
그때 윤사해가 청해솔에게 뭐라고 말했더라?
‘알겠네. 알려 줘서 고맙네, 해솔 양.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 주게나.’
그렇게 말했었지.
청해솔이 ‘원하는 것’으로 이번 가족 여행에 청해진을 데려가 줄 것을 부탁할 줄은 몰랐을 거다.
어쨌든 청해진은 이번 여행에 함께하게 됐고, 우리는 그렇게 강원도로 떠났다.
“아저씨, 오면서 봤던 계곡도 아저씨 거예요? 나중에 거기 가서 놀아도 돼요?”
“물론.”
윤사해의 대답에 청해진이 윤리오와 윤리타의 양 팔을 끌어 잡았다.
“어서 짐 정리하고 놀러 가자!”
“피곤한데.”
“조금 자고나서 놀면 안 돼?”
“안 돼!”
윤사해가 소유하고 있다는 별장에는 출발하고 나서 정확히 3시간 30분 만에 도착했다.
이동하는 동안에 휴게소에 들러 아침도 먹고, 군것질거리도 사 먹었지만 피곤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우와……!”
별장 주변에 가득 피어나 있는 해바라기들에 피로가 사르르 풀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