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해바라기 피어난 곳에서(1)
“도윤아, 단예랑 단아는 오늘도 안 왔어?”
“응! 방학 전까지 못 볼 것 같아.”
단예랑 단아가 유치원에 등원하지 않게 된 지도 한 달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에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 생겨난 던전, 팔라크의 둥지는 수면 밖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공략도 안 하고 있으면서, 애들은 왜 안 보내는 거야?”
던전에 대한 공략은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리사야, 지금 뭐라고 했어?”
“응? 별 말 안 했어! 그냥, 단예랑 단아 보고 싶다고!”
혼잣말하는 버릇이 슬그머니 되살아나려고 한다. 다행히도 도윤이는 내 혼잣말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제 제인 누나가 우리 집에 와서 파스타를 해 줬어!”
“제인 언니가?”
“응! 시진이 삼촌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누나한테 혼났다?”
백시진과 제인 아일리는 알콩달콩 즐거운 연애 생활을 즐기는 중인가 보다.
나는 블록이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를 꺼내며 도윤이에게 물었다.
“제인 언니, 요리 잘하시나 보네?”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친구한테 배우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친구?”
“응, 삼촌 일로 이야기도 자주 나누신다고 그랬어!”
도윤이가 내가 꺼낸 바구니에서 여러 개의 블록을 손에 쥐며 싱글벙글 웃었다.
“나중에 소개시켜 준다고 했어! 아빠도 바쁘고 삼촌도 바쁘면 제인 누나가 나랑 놀아 주거든! 그때 소개시켜 준대!”
도윤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블록을 열심히 쌓기 시작했다. 나 역시 도윤이를 따라 블록을 쌓아 올랐다.
단예랑 단아 없이 도윤이랑 단 둘이서 노는 것도 인제는 꽤 익숙해졌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우와! 엄마 없는 애들끼리 놀고 있네?”
골목대장 단아가 없으니까 시도 때도 없이 시비가 걸려 온다는 거였다.
자라나리 유치원의 꽃님반에서 가장 키가 큰 남자애가 누가 봐도 사악해 보이는 미소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 새끼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유성우?”
“우성운이야!”
아하, 그런 이름이었지?
우성운이 누군가 하니, 내가 ‘윤리사’의 몸으로 처음 유치원에 왔을 때 나한테 시비를 걸던 남자애였다.
분명 앞니가 없다면서 나한테 시비를 걸려고 했었지? 참고로 내 앞니는 예쁘게 자란 상태였다.
“엄마가 없으니까 내 이름도 잘 못 외우지?”
우성운이 재수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비아냥거렸다.
엄마가 있는 거랑 없는 거랑 이름 외우는 게 무슨 상관이람?
그리고!
“리사는 엄마 있는데? 지금 미국에서 높은 사람이라고 했어.”
“어… 엄마가 있다고……?”
“응, 있는데?”
같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그대로 우성운에게서 고개를 돌려 블록을 쌓는 데 열중했다.
대놓고 무시하는 나의 태도에 화가 났는지, 우성운이 씩씩거리면서 소리 질렀다.
“하지만 백도윤은 없잖아!”
나와 도윤이가 쌓아 올리던 블록을 발로 차 버리는 건 덤이었다.
아니, 저 망할 우성운이?
자고로 걸려 온 시비에는 맞서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손에 쥔 블록을 우성운을 향해 던졌고.
“아야! 악, 아아악!”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우성운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어 버렸다.
“선생님! 윤리사가……!”
그러자 우성운과 같이 있던 남자애가 놀라 선생님께 일러바치러 갔다.
나는 곧장 몸을 날려 그 남자애를 덮쳐 버렸다.
“으아아앙!”
이름 모를 남자애가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어찌할 줄 모르며 뻘뻘거리고 있는 도윤이에게 외쳤다.
“도윤아! 우성운 깨물어!”
“어? 어어?”
“우성운이 너한테 하는 말 못 들었어?! 어서 깨물어!”
도윤이가 내 말에 굳게 결심한 얼굴로 우성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야아악!”
하지만 도윤이는 우성운을 깨무는 대신, 그의 머리채를 휘잡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잘한다, 우리 도윤이!
“리사야! 도윤아!”
하지만 우리들의 행동은 선생님이 등장하며 곧장 제지되었다.
그리고.
“윤리사.”
부모님이 소환되었다.
유치원에서도 애들 싸웠다고 부모님께 연락을 하는구나. 오늘 처음 알았네.
“윤리사, 아빠한테 할 말 없니?”
길드 업무를 보다가 급하게 왔는지 윤사해가 흐트러진 차림새로 나에게 물었다.
“응, 없어.”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리고는 손가락을 들었다.
중지를 들까 하다가 검지로 바꿔들어 준 건 비밀이 아니다.
“쟤가 리사랑 도윤이한테 먼저 엄마 없는 애들끼리 잘도 놀고 있다고 했단 말이야.”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아저씨의 품에 안겨 있던 우성운이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언제 그랬는데!”
“그랬으면서? 그치, 도윤아?”
“맞아! 그랬어!”
이 자리에는 백시준도 함께였다. 윤사해와 마찬가지로 업무를 보다가 바쁘게 온 모양새였다.
“쟤가 나한테 엄마 없는 애라고 그랬어! 엄마 없어서 못 배워먹었다고 그랬어, 아빠!”
도윤아, 너무 나간 것 같아.
하지만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어른들에게는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흰 가운을 입은, 우성운네 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윤사해와 백시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저… 애들끼리 싸울 수도 있는 거고, 서로 얼굴이 많이 상했으니 이번 일은…….”
“없던 일로 넘어가자고 하지는 말아 줬으면 하는군요.”
백시준이 우성운네 아저씨의 말을 끊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 뒤를 이어 윤사해가 말했다.
“복장을 보아하니, DMO 소속인 것 같은데.”
우성운네 아저씨가 황급히 가운에 박힌 로고를 가렸다. 문제는, 그 행동이 너무 늦었다는 것.
윤사해가 우성운의 아저씨를 보며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그 쪽의 본부장님과 꽤 친해서 말입니다.”
금이현이 듣는다면 기절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윤사해였다.
우성운네 아저씨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더듬거렸다.
“저기… 윤사해 길드장님, 그러니까 그게…….”
“아무 말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알겠으니.”
윤사해의 말에 우성운네 아저씨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장담컨대, 우성운은 집에 돌아가서 엄청 혼날 게 분명해 보였다.
하하! 쌤통이다!
나는 우성운을 향해 혀를 날름거렸고, 도윤이도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똑같이 우성운을 향해 혀를 내밀기 시작했다.
“이익……!”
우성운이 당장에라도 우리를 향해 달려들 듯이 굴었지만.
“우성운! 가만히 안 있어?! 지금 뭐 잘했다고!”
우성운네 아저씨가 아들의 행동을 제지시켰다. 그에 우성운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사슴 같은 눈망울이 촉촉해지니 불쌍해 보이기는 개뿔, 집에 가서 된통 혼나라!
그렇게 고소해하고 있는데, 윤사해가 나를 안아들었다.
“선생님, 애 데리고 가려는데 괜찮겠습니까?”
“저도 도윤이 데리고 가 보겠습니다. 오늘 죄송했습니다, 선생님.”
나와 도윤이는 그렇게 윤사해와 백시준의 손을 잡고 유치원을 나왔다.
“애들 방학 시작 전까지는 얼굴 보지 말자고 했으면서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됐네?”
“시끄러. 그리고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다고.”
유치원을 나오기 무섭게 싸워대는 이혼남과 사별남이었다. 하지만 둘은 싸우는 것을 금방 멈추고 우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백시준이 도윤이의 뺨에 난 상처를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아들, 여기 안 아파? 시진이가 보면 한 소리 하겠네.”
“안 아파. 그리고 삼촌이 아빠한테 잔소리하면 내가 혼내 줄게!”
도윤이의 말에 백시준이 눈웃음을 지었다.
윤사해는 내가 다친 곳 없이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리사, 다음에는 그 녀석의 다리 사이를 노리렴.”
아버지, 그게 딸한테 할 소리입니까? 효과는 탁월하겠네요.
“아빠,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저기서 하나 먹을까? 리사도 먹을래? 하나 사 줄게.”
“네! 좋아요!”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백시준이 원하던 호칭을 꺼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감사합니다, 삼촌!”
백시준, 아니. 시준이 삼촌이 놀란 눈을 보였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반면, 윤사해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리사, 억지로 그렇게 부를 필요 없단다.”
그러면서 윤사해는 편의점에 다다르기 무섭게 아이스크림 세 개를 꺼내 들었다.
윤리오와 윤리타, 저세상의 것도 챙길 모양새였다.
백시준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양심 좀 챙기고 말하지 그러니, 사해야?”
물론, 윤사해는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백시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이스크림이나 빨리 계산하고 나와. 녹으면 책임질 거야?”
“나참, 어이가 없어서.”
그러면서도 백시준은 윤사해가 고른 아이스크림을 계산하고 나왔다. 나랑 도윤이가 고른 것도 함께였다.
“백시준, 너희 집은 여기서 저쪽으로 가야 하지 않나?”
“우리 집이 어디인지 알고 있어, 사해야?”
“아는 게 아니라, 빨리 가라고.”
윤사해의 짜증이 가득한 얼굴에 백시준이 키득거렸다.
“웃지 말고 빨리 가.”
“알았어, 갈게. 리사, 조심히 들어가렴.”
백시준의 인사에 도윤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리사야, 잘 가!”
“응, 도윤이도 잘 가! 삼촌도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도윤이와 백시준과 헤어지고 돌아온 집.
“윤리사.”
윤리오의 나지막한 부름에 나는 후다닥 윤사해의 뒤로 몸을 숨겼다.
윤리오도 아는 거였어?!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가서 싸우면 어떻게 해!”
우다다, 고막에 내리꽂히는 윤리오의 잔소리에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리오, 리사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친구를 때리면 안 되죠!”
윤사해가 나를 보호해 주려 했지만, 되레 윤리오의 잔소리를 같이 듣게 되었다.
결국, 나와 윤사해는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까지 윤리오의 잔소리 폭격을 맞아야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한 가지를 다짐했다.
우성운, 내일 만나자마자 한 대 더 때려 버릴 거야. 기대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