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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54)화 (54/500)

54화. 초여름에 드는 무렵(4)

백시준이 우리가 앉은 자리에 방석을 놓아 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인 씨는 지금 비나리 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 중이라고 하셨죠?”

“네, 운 좋게도요.”

눈, 코, 입.

1대 1대 1, 황금 비율의 외모를 가진 제인 아일리가 방긋 웃었다.

“리오랑 리타의 아버님께서도 오늘 오시려나요?”

그 말에 윤리오가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백시준은 그 몸짓을 보지 못하고서 대답했다.

“네, 올 거예요.”

“잘 됐네요!”

제인 아일리가 경쾌하게 말했다.

뭐가 잘 됐는지는, 윤사해가 도착하기 무섭게 알 수 있었다.

***

“리오가…….”

“네, 알파벳만 겨우 뗀 수준이라서요. 방과 후에 남아서 수업을 조금 더 해 주고 싶어도 자꾸 도망을 가더라고요.”

1등급 한우를 눈앞에 두고 학부모 면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 기관이라는 비나리 고등학교.

그곳의 영어 선생님인 제인 아일리의 말이 이어질수록, 윤리오는 잘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였다.

나와 저세상은 눈치껏 조용히 소고기를 주워 먹기만 했다.

“리오가 스킬 운용력이나 활용 면에서는 또래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들어서요. 분명 해외에서 활동할 기회가 많을 것 같은데…….”

제인 아일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윤사해는 알아차린 것 같았다.

지금 같은 암담한 영어 실력으로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게 무리일 거라는 말이겠지.

“물론, 시중에 번역 기능이 탑재된 훌륭한 아이템이 많이 풀려 있기는 하지만요.”

제인 아일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윤사해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애들 과외를 따로 부탁드릴 수는 없겠죠, 선생님?”

“어머, 아버님! 당연히 안 되죠!”

제인 아일리의 호들갑 뒤로 백시진이 안경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학교 선생님이 과외 하는 거 불법입니다, 윤사해 길드장님.”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겠지. 윤사해가 속이 탄다는 듯이 잔을 비웠다.

그러나 이내 윤사해는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선 말했다.

“그래도 선생님, 한국인이 한국어만 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인 아일리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윤사해를 쳐다봤다.

“맞아요, 한국인이 한국어만 잘하면 되죠. 그리고 저는 한국 안 뜰 거예요.”

얼씨구.

윤리오가 좋아하며 윤사해의 말에 동조했다. 그에 도윤이에게 고기를 구워 주고 있던 백시준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리 리오, 공무원은 영원히 못하겠네.”

윤리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백시준의 말에 아들이 부끄러워하자 윤사해가 그를 향해 그 입 닥치라는 시선을 보냈다.

물론, 백시준은 윤사해의 눈초리가 우습다는 듯이 그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

윤사해가 백시준의 웃는 낯에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선 제인 아일리에게 물었다.

“리타는 어떻습니까?”

한국인은 한국어만 잘하면 된다더니, 아들들 교육에 관심이 참으로 많은 아버지였다.

“리오보다는 낫지만, 문법을 조금 어려워하더라고요.”

윤리타가 크흠,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그래도 한국어는 잘해요.”

잘났다, 정말.

아니, 오라버니들? 우리 엄마가 지금 미국에서 높은 자리에 있으시다는데, 영어를 못해서 되겠어?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소고기를 한 입 가득 넣었다.

그 순간, 도윤이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내게 물었다.

“리사는? 리사는 영어 잘해?”

“응, 잘해.”

“콜록, 콜록! 켁!”

사이다를 마시고 있던 저세상이 격하게 기침을 터트렸다.

아니, 저 자식이?

나는 먹고 있던 소고기를 꿀꺽 삼킨 뒤에 최대한 혀를 굴렀다.

“저세상 브라더 이스 밬카.”

“리사, 밬카는 무슨 말이야?”

“일본어.”

무슨 뜻인지는 말 안 해 줬다.

다행히도 도윤이는 무슨 의미냐는 질문 대신 나를 향해 손뼉을 쳐 주기 시작했다.

“우와! 리사, 일본어도 할 줄 알아?! 대단해!”

훗, 리사가 좀 대단해.

나는 한껏 어깨를 으쓱여 줬고, 저세상은 떨떠름한 얼굴로 뒷말을 중얼거렸다.

“밬카…….”

저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백시준이랑 백시진도 마찬가지인지, 애매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윤사해는.

“우리 애가 좀 똑똑해.”

딸바보의 면모를 한껏 드러내는 중이었다.

윤사해의 말에 백시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밬카? 어디서 들어봤는데.”

“해솔이 누나가 청해진한테 저렇게 말하는 거 들은 적 있어. 누나 지금 기초 일본어 교양 수업 듣고 있다고 했잖아.”

윤리오와 윤리타가 사이좋게 휴대폰을 들었다. 내가 말한 ‘밬카’가 무슨 의미인지 찾아보려는 것 같다.

안 돼! 쌍둥이가 밬카(ばか)의 뜻을 알게 되는 순간, 잔소리 폭격을 맞게 될 거야!

쾅―!

나는 쌍둥이의 관심뿐만 아니라, 모두의 주의를 내게 집중시키고자 테이블을 소리 나게 때렸다.

도윤이가 놀라 내게 물었다.

“리사? 손 안 아파?”

아파.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두 손을 옷자락에 슥슥 문지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잖아요, 언니. 리사가 진짜 진짜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뭐가 그리 묻고 싶을까요?”

제인 아일리가 푸른 눈을 둥글게 접으며 상냥한 미소를 내게 보였다.

우와, 진짜 예쁘다.

나는 가출할 뻔한 영혼을 겨우 붙잡고서 제인 아일리에게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언니는 시진이 아저씨랑 왜 만나시는 거예요?”

“푸훕!”

백시진이 마시고 있던 물을 그대로 뱉고 말았다. 테이블에 튄 것에 도윤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삼촌, 더러워.”

도윤이, 나이스.

도윤이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해 주었다.

“리사, 그런 질문은 실례야!”

“죄송해요, 시진이 삼촌.”

그리고 쌍둥이의 관심도 돌리는데 성공했다.

윤리오가 황급히 나를 제 허벅지에 앉히는 동안 윤리타는 서둘러 백시진에게 사과했다.

“아니,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백시진이 황급히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백시진의 말에 백시준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맞아, 리사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잖아.”

“형!”

백시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에 나란히 앉아 있던 제인 아일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윤사해는 다 익은 소고기를 나와 저세상, 윤리오와 윤리타의 그릇 위에 하나씩 올려 주고는 말했다.

“우리 애가 보는 눈이 좀 정확하지. 백시진, 자네한테는 과분한 분을 만난 것 같은데.”

“윤사해 길드장님!”

『각성, 그 후』에서의 백시진은 침착함의 대명사로 불리었던 남자였는데 말이지.

제인 아일리는 윤사해의 말을 듣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 나를 만난 걸 영광으로 알아요.”

“영광인 거 알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백시진의 귀가 붉었다.

저렇게 염장질이라니.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백시진을 쳐다봤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저세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백시진을 놀리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였다.

대화의 주제는 어느새 여름휴가 계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디로 여행 가려고?”

“거제도로 생각 중이야. 너는?”

“강원도.”

윤사해의 대답에 그와 잔을 부딪치려던 백시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괜찮겠어?”

“괜찮지 않을 이유, 없잖아.”

윤사해가 허공에 멈춘 백시준의 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그러고는 짜증이 서린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애들 방학 시작 전까지는 이제 만나지 말자고.”

“애들 방학 끝난 후에는 만나도 좋다는 거네?”

“연락하면 죽여 버린다?”

백시준이 키득거리며 잔을 비웠다. 화기애애했던 저녁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식사 자리가 끝났을 때, 도윤이는 꿈나라로 떠나 있었다.

오늘 나랑 유치원에서 레고로 이것저것 많이 만들었는데, 그것 때문에 많이 피곤한 것 같았다.

백시준이 도윤이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도윤아, 일어나자.”

“됐어, 형. 잠든 애를 뭐 하러 깨우려고 그래?”

백시진이 도윤이를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제인 아일리는 도윤이의 유치원 가방을 챙겨 들고는 우리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생님, 잠시만.”

윤사해가 제인 아일리를 붙잡고서 휴대폰을 내밀었다.

“전화번호 좀 주시겠습니까? 애들 수업 태도가 불량하다거나 그러면 언제든 연락 주셨으면 합니다.”

“연락드릴 일이 많을 것 같네요, 아버님.”

제인 아일리가 웃으면서 윤사해에게 자신의 번호를 입력해 줬다.

그 모습에 윤리타가 윤리오의 옆구릴 찌르며 키득거렸다.

“윤리오, 너 이제 영어 수업 못 째겠는데?”

“시끄러.”

윤리오는 종종 영어 수업을 빼먹고는 했나 보다.

“제인 씨, 돌아갑시다. 얘들아, 조심히 들어가.”

백시준의 인사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고개를 꾸벅거렸다.

“안녕히 가세요, 아저씨.”

“삼촌,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잘 먹었습니다!”

저세상은 말없이 멀어지는 도윤이네를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나는 도윤이네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고는 윤사해에게 두 팔을 뻗었다.

윤사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러기 무섭게 윤사해의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리사, 저 아저씨가 다음에도 또 저녁을 사 준다고 하면 거절하렴.”

“오늘처럼 1등급 한우를 사 준다고 해도?”

“응, 그래도.”

윤사해는 오늘과 같은 일이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우리 아버지께서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나는 윤사해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말했다.

“응! 알았어!”

윤사해가 내 대답에 크게 만족스러워하며 물었다.

“오늘 유치원에서 뭐 하면서 놀았니?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았어?”

“오늘 단예랑 단아가 유치원에 안 와서 도윤이랑만 놀았어!”

“도윤이랑만……?”

윤사해가 도윤이네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그 모습에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내 웃음소리에 윤사해가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며 내게 물었다.

“리사, 유치원을 옮기는 게 어떨까? 자라나리 유치원보다 훨씬 더 좋은 곳이…….”

“리사 유치원 옮기면 아빠 미워할 거야.”

나는 윤사해의 말을 단호하게 끊고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제인 아일리를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세상아, 오늘 형이랑 같이 씻을래? 배쓰밤인가 뭔가 사 왔는데.”

“네?! 아니요! 괜찮아요!”

“윤리오, 들었지? 나 세상이한테 거절당했으니까 오늘 같이 씻어.”

“미친놈, 꺼져.”

어쨌든, 평화롭게 흘러가는 이 시간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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