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초여름에 드는 무렵(2)
다행히도 윤사해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럼, 좋아했지.”
영혼이라고는 1g도 담겨 있지 않은, 그런 대답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윤사해의 본부인.
그러니까 ‘윤리사’의 친모에 대한 이야기는 의외의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었는데, 바로 류화홍이었다.
“안주인님이요? 지금 미국의 유명 국가 기관 중 하나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다고 들었어요.”
이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안주인’이라고 불리고 있다니. 이매망량의 길드원들 사이에서 꽤 인망이 두터웠나 보다.
윤리오와 윤리타는 오늘 수업이 늦게 끝난다고 했고, 윤사해는 저세상이 앓아누워서 망할 주인공님을 돌보는 중이었다.
때문에 오늘 유치원으로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류화홍이었다.
이동계 각성자, 류화홍.
그의 스킬로 곧장 집으로 이동해도 됐지만, 나는 굳이 류화홍의 손을 잡고 걸었다.
윤사해의 본부인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이름은 뭔데? 리사도 엄마 이름 알고 싶어.”
“이름은 ‘에일린 리’라고, 다들 린 님이라고 부르셨어요.”
“엄마랑 아빠는 어땠어? 서로 사이좋았어?”
“저도 그때는 어려서 잘 모르겠는데, 두 분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던 거로 기억해요.”
류화홍이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가? 사이가 안 좋았다기보다는 이상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안주인님께서 기분이 좋으시면, 길드장님께서 기분이 굉장히 안 좋으셨고.”
“아빠가 기분이 좋으면 엄마가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았구나?”
“네, 그랬어요.”
그건 그냥 사이가 안 좋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두 분이서 서로 챙길 거는 다 챙겼었던 것 같아요. 결혼기념일이라거나 부부의 날이라거나 뭐 그런 기념일들요.”
아니다. 류화홍의 말대로 사이가 이상했던 부부였던 것 같다.
“아가씨께서 웬일로 린 님에 대해 물어보시네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머니’에 대해 궁금해 하신 적 없었잖아요.”
“그냥, 갑자기 궁금해졌어.”
『각성, 그 후』에서는 이름만 등장했던 윤사해의 따님에게 이런 탄생 비화가 있을 줄은 몰랐거든.
화홍이 오빠는 모를 거야. 리사가 지금 얼마나 심란한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그보다 한태극 의원님의 손주 분들께서 이번 방학에 부산으로 내려간다고요?”
“응.”
“좋겠네요. 이번에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아래에서 던전 하나가 발견됐다는데, 그게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으응, 그렇구나.”
아니, 잠깐만. 지금 뭐라고?
“화홍이 오빠, 부산에서 던전이 새로 발견됐어?”
“네, 아가씨. 해저 던전인데, 계속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 DMO 측에서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대요.”
류화홍이 내 얼굴에 떠오른 경악을 보지 못하고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아가씨 방학할 때면, 아가씨의 친구 분들께서는 수면 위로 드러난 던전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걸요?”
광안리 해수욕장에 위치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던전.
「“저런 형태의 던전은 전 세계에서도 유일하다고요?”」
입구만 돌출되어 있는 다른 던전들과는 달리, 입구를 비롯한 그 모습이 모두 밖에서 관찰이 가능한 세계 유일의 던전.
류화홍이 말하는 던전은 만병통치약이라고 불렸던 L급의 회복 아이템, ‘팔라크의 영약’이 등장하는 ‘팔라크의 둥지’가 분명해 보였다.
잘린 신체는 0.1초 만에 재생시켜 주고, 어떠한 질병도 낫게 해 준다는 팔라크의 영약.
“화홍이 오빠, 그 던전은 지금 공략이 됐대?”
“아니요. 아직 공략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 말에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화홍이 오빠, 유치원!”
“네?”
“유치원으로 데려다줘!”
“갑자기요? 뭐 두고 온 물건이라도 있으세요, 아가씨?”
없다. 없지마는……!
‘이렇게 실랑이 할 시간 없는데!’
어떤 던전이든, 최초 공략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보상이 주어졌다.
즉, 지금 ‘팔라크의 둥지’를 공략하면 L급 회복 아이템인 팔라크의 영약을 획득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빨리 단예네한테 이 사실을 알려야 해!’
나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류화홍의 뺨을 있는 힘껏 때리고는 소리 질렀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지금 당장 리사를 유치원으로 데려다 줘!”
유치원에는 아직 단예와 단아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둘에게는 병약한 오빠가 한 명 있었다.
한단이.
『각성, 그 후』에서는 건강이 악화되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던 한태극의 첫째 손주가.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가 발동됩니다.】
【적용 대상은 ‘류화홍’입니다.】
스킬이 제대로 걸렸다는 메시지와 함께,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자라나리 유치원]
불과 몇 분 전에 벗어났던 유치원의 건물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 나는 검은 세단에 올라타려는 아이를 붙잡았다.
“단예야, 잠깐만!”
“리사?”
차에 올라타려던 단예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류화홍의 품에서 내려와 곧장 단예에게로 뛰어갔다.
“잠깐만 기다려 줘, 단예야! 할 말이 있어!”
“리사,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와. 넘어지면 어쩌려고.”
단아는 어디 갔나 했더니, 경호원의 등에 업혀 세상모르고 자는 중이었다.
단예가 단아를 흘긋거리고는 내게 물었다.
“셋째랑 같이 안 들어도 되는 이야기니, 리사?”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예에게 말했다.
“이번에 부산에서 새로운 던전이 발견됐대!”
“응……?”
단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단예네 오빠가 많이 아프다고 했잖아! 도움이 될 거야!”
“도움이 될 거라고?”
“그 던전에서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아이템이 발견됐다고 했거든! 단예랑 단아네 오빠가 몸이 약하다고 했잖아!”
누가 듣는다면 공략도 안 된 던전에서 무슨 그런 소문이 나오냐면서 코웃음을 칠 테였다.
하지만 단예는 푸른 눈을 둥글게 접고는 내게 말했다.
“고마워, 리사. 할아버지랑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네.”
“응, 잘 가! 갑자기 붙잡아서 미안했어!”
“아니야, 미안해할 게 뭐가 있어. 나는 오히려 리사한테 너무 고마운걸?”
단예는 그렇게 말하고는 검은 세단에 올라탔다.
“그럼, 리사. 조심히 들어가야 해.”
“응! 단예도!”
단예와 단아를 태운 검은 세단이 거리를 벗어나자마자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나타났다.
【각성자, ‘류화홍’에게 적용된 <[S, 숙련 불가] 내 말이나 들어라!>가 해제됩니다.】
류화홍에게 걸었던 스킬이 해제된다는 알림이었다.
“어? 내가 언제 유치원으로…….”
“리사가 화장실 가고 싶다고 오빠 졸랐는데, 기억 안 나?”
“화장실이요?”
류화홍이 미간을 좁혔다.
“그 말에 제가 굳이 유치원으로 아가씨를 데리고 돌아왔다고요?”
“응, 그랬어. 기억 안 나, 오빠?”
내 말에 류화홍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하하,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아니,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류화홍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머리를 끌어 잡고는 중얼거렸다.
“축제 때도 이랬는데, 또 이러네. 혜원이 누나한테 진찰이라도 받으러 가야 하나?”
심각하게 굳어가는 얼굴에 나는 류화홍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에 가자, 오빠. 세상이 오빠 많이 아프다면서? 리사는 집에 빨리 가고 싶은데.”
“네? 언제는 최대한 여유롭게 가자고 하시더니.”
“리사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나는 활짝 웃으면서 류화홍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해, 오빠? 빨리 이동해야지.
류화홍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내 손을 잡았다.
그러기 무섭게 바뀐 풍경.
나는 곧장 우리 집의 현관문을 열고선 가방을 집어던졌다.
“아빠, 리사 왔어! 세상이 오빠는 괜찮아?”
“응, 괜찮아.”
나를 가장 먼저 반긴 사람은 아프다던 저세상이었다. 저세상이 책 한 권을 쥔 채로 인사했다.
“유치원 재미있었나 보네.”
그 인사에 나는 소리 질렀다.
“아프다면서!”
“혜원이 누나 덕분에 다 나았어.”
그러고는 저세상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멀쩡해서 싫나 봐?”
어떻게 알았지.
“리사, 왔니?”
하지만 윤사해가 보는 앞에서 아쉬운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싫기는? 세상이 오빠가 아프다고 해서 리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저세상이 내 말에 코웃음을 쳤다. 윤사해는 저세상을 걱정하는 내가 기특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지만 말이다.
“아가씨 데려다줬으니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고맙네, 류화홍 헌터.”
윤사해의 인사에 류화홍이 고개를 가볍게 까닥이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감췄다.
“리사, 어서 손 씻으렴. 리오와 리타가 돌아오기 전에 저녁을 준비하자꾸나.”
망할 것 같은데.
그리고 슬프게도 내 예감은 빗나가지를 않았다.
윤사해가 차린 저녁은 장렬하게 망했고, 우리는 오랜만에 인스턴트 음식을 시켜 먹었다.
“리오, 리타. 오늘 학교는 왜 그렇게 늦게 마쳤니? 따로 잡힌 행사도 없을 텐데.”
윤리타가 닭다리 하나를 뜯어 먹으며 답해 주었다.
“곧 담임선생님 생신이거든요. 애들이랑 파티 어떻게 준비할지 의논한다고 늦었어요.”
그 말에 윤리오가 불만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파티를 왜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냥 선물만 주면 될 텐데.”
“다 같이 추억 만들고 좋잖아?”
“나는 딱히. 그보다 아버지, 이번에 발견됐다는 던전 소식 들으셨어요?”
“부산에서 나왔다는 거?”
“네.”
윤리오가 윤사해에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특보가 방송되고 있었다.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 나타난 신규 던전의 소유권이 청(淸) 가문으로 넘어갔습니다.
갑자기 웬 청 가문?
먹던 치킨을 나도 모르게 입에서 떨어뜨렸다. 지난 회차에서 팔라크의 둥지를 공략한 전적이 있는 저세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윤사해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제 선조를 들먹였나 보군. 남해의 용왕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바다를 다스리는 거주자였으니.”
곤란한데.
‘팔라크의 둥지’에 대한 소유권이 청 가문으로 넘어갈 줄은 몰랐다.
어떻게든 단예네가 던전을 최초로 공략하여 L급의 아이템을 획득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닭다리 하나를 뜯어먹으며 심각하게 얼굴을 찌푸릴 때였다.
-이번 사안에는 대한애국당의 한태극 의원이 크게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어지는 앵커의 목소리에 나는 두 손을 주먹 쥐었다.
“나이스!”
단예가 한태극 의원을 아주 제대로 구워삶은 모양이었다.
“나이스?”
저세상이 갑자기 그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에브리바디 나이스.”
내 말에 윤리오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리사, 영어도 할 줄 아네.”
하하,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죠!
나는 윤리오를 향해 방긋 웃어 주고는 달력을 쳐다봤다.
5월의 끝, 여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