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초여름에 드는 무렵(1)
얼마 남지 않은 벚꽃은 머지않아 내린 비에 모두 지고 말았다.
그 후에 찾아온 것은 이른 더위.
봄날이 이렇게 저물다니. 시간 한 번 빠르구나 싶었다.
나는 자라나리 유치원의 정원에 피어 있는 꽃들을 구경하며 그간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았다.
비나리 고등학교에서 윤사해가 화려하게 모자 장수를 처리한 후에, 윤리오와 윤리타는 한동안 교내 유명 인사였다고 했다.
‘리사, 네가 윤리오가 애들을 어떻게 쫓아내는지 봤어야하는데.’
축제가 끝난 후, 우리 집에 놀러온 청해진은 내 머리를 땋아 주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윤리오랑 윤리타가 아저씨네 아들들인 걸 모르는 애들이 꽤 많았거든.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지?’
윤사해가 자식들을 언론에 최대한 노출시키지 않았다고 해도, 윤리오랑 윤리타는 윤사해와 판박이었다.
특히, 윤리오.
가족 중 유일하게 옅게 도는 분홍빛의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지만, 외모만큼은 윤사해와 가장 닮은 그의 자식이었다.
그러니까 청해진이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는 소리였다.
아참, 청해진은 목에 한동안 붕대를 두르고 다녔지만 그런대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윤리오, 윤리타! 제발 나 좀 살려 줘! 누나가 약하면 또 당한다면서 맨날 대련하자고 해!’
‘그러니까 누구한테 당한다는 건데? 구교사에 찾아왔던 그 미친놈?’
‘미친놈이라니. 윤리오, 리사랑 세상이가 들어.’
그렇지 않은 모습도 종종 보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온 가족이 다함께 모여 아침을 먹고 나는 유치원에 가는 그런 일상이 반복되는 중이었다.
윤사해는 그때의 일로 꽤 곤혹을 치른 것 같았지만.
“리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단예야.”
나는 인형 하나를 꼭 안고선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여름이 늦게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왜? 여름이 오면 방학이 오니까 좋지 않아?”
“나는 좋아! 방학 때 아빠랑 삼촌이랑 누나랑 여행 가기로 했거든!”
단예의 말에 답한 건 도윤이었다.
“백도윤, 너한테 언니가 있었어?”
“언니가 아니라 누나!”
도윤이가 단아에게 블록을 건네주며 말했다.
“친누나는 아니고, 삼촌의 여자 친구!”
삼촌이라면 ‘백시진’일 거고, 그의 여자 친구라면 ‘제인 아일리’를 말하는 걸 거다.
백시진과 제인 아일리.
할미의 수작으로 꽤 비극적인 끝을 맺은 연인이었다. 지금이야 서로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솔로 천국, 커플 지옥인 것을.
“도윤아, 너는 좋아?”
“응? 뭐가?”
“도윤이네 삼촌이랑 삼촌분의 여자 친구분.”
“응! 좋아!”
도윤이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시진이 삼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맨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줘! 제인 누나는 올 때마다 장난감을 새로 사다 주고!”
그래서 좋다면서 도윤이가 해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티 없이 맑은 얼굴에 나 역시 미소를 그렸다.
“두 사람을 엄청 좋아하나 보네.”
“리사도 좋아해!”
우리 도윤이, 크면 여러 사람 울리겠다. 저렇게 자각 없는 플러팅을 마구 날리다니.
나는 꼭 끌어안고 있던 인형을 도윤이에게 넘겨주며 배시시 웃었다.
“리사도 도윤이 좋아해.”
제인 아일리가 언제 할미에게 사로잡혀 악령이 됐는지는 『각성, 그 후』에서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었다.
제인 아일리의 이름을 검색창 스킬을 이용해 알아봐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흥, 삼촌 있는 것도 언니 있는 것도 하나도 안 부러워. 우리도 할배랑 놀러가기로 했거든!”
“어디로 놀러 가는데?”
“부산!”
“부산 어디로 놀러 가는데?”
단아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빼액 소리 질렀다.
“몰라! 묻지 마!”
정확한 지명은 모르나 보다.
단아의 짜증 가득한 대답에 도윤이가 울상을 지었다.
그런 도윤이를 단예가 달래 주며 입을 열었다.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 호텔에서 1박을 한 뒤에, 첫째를 보러 가기로 했거든.”
“광안리 해수욕장? 나 알아! 아빠가 어릴 적에 자주 놀러가던 곳이라고 했어!”
도윤이가 아는 지명이 나와서 신나는지, 백시준한테 들은 것 같은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보다 광안리 해수욕장이라니.
『각성, 그 후』에서는 광안리 해수욕장에 회복과 관련된 희귀 아이템이 나오는 던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지금 시기에 그 던전이 있는지 모르겠다.
『각성, 그 후』에서 그 던전이 생성된 지 10년 정도라고 했었으니, 시기가 맞을 것 같기는 한데…….
“리사는?”
“응?”
“윤리사, 너는 방학 때 뭐 할 거냐고 묻는 거잖아.”
얘들아, 우리 방학까지 한 달도 넘게 남았어. 계획 같은 거 없는데 뭐라고 대답하지?
에라, 모르겠다.
“리사도 여행 갈 거야!”
“어디로?”
도윤이의 질문과 함께 단예와 단아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글쎄, 어디로 여행 갈까?
나는 두 눈을 데굴 굴리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아빠한테 물어 볼게!”
그렇게 윤사해도 모르는 가족 여행 계획이 잡히게 됐다.
***
“그래서 아빠한테 여행 가자고 할 거라고?”
“응!”
나는 윤리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도윤이도 여행 가고, 단예랑 단아도 여행 간다는데 리사도 가야 해!”
내 말에 윤리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도착한 집.
현관문을 열기 무섭게 윤사해의 구두가 보였다.
“아빠!”
“리사 왔니? 리타도 어서 오렴.”
아니나 다를까.
윤사해가 거실 안쪽에서 웃으면서 나를 반겼다.
“다녀오셨어요, 리타 형?”
저세상은 윤리타만 반겼다.
어차피 저세상이 인사했어도 가볍게 무시할 생각이었기에 나는 곧장 윤사해의 품에 안겼다.
“아빠, 있잖아. 오늘 친구들이랑 방학 때 뭐할지 서로 물었거든?”
“방학?”
윤사해가 달력을 흘긋거렸다.
압니다, 아버지. 저도 방학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애들이 벌써부터 방학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나는 윤사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선 입을 열었다.
“도윤이는 여행 간다고 했고, 단예랑 단아도 여행을 간대!”
“그렇구나. 그래서?”
“리사도 여행 간다고 했어!”
윤사해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나는 그의 얼굴에 비친 의문을 무시하며 재잘거렸다.
“리사도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 그리고 세상이 오빠…….”
……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 같이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으로 놀러가고 싶어!”
“물 좋고 공기 좋은 곳?”
“응!”
곤란하다면서 못을 박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구세주가 등장했다.
“강원도에 별장 하나 있지 않아요? 이번 방학에 거기 가는 건 어때요?”
윤리오의 말에 윤사해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윤리오가 윤사해의 낯빛을 보고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물론, 아버지 시간 괜찮으시다면요. 아니면 저희끼리 다녀오든가 할게요.”
그 말에 윤사해가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자꾸나. 시간은 언제든지 뺄 수 있으니.”
왜인지, 서차웅이 저 말을 들으면 굉장히 슬퍼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윤사해가 나를 바닥에 내려 주고는, 최근 들어 여러 이야기를 나누게 된 첫째 아들에게 물었다.
“강원도에 별장이 있다는 걸 용케 기억하고 있었구나, 리오.”
“엄마랑 마지막으로 여행 다녀온 곳이니까요.”
윤리오가 화분에 물을 주며 말을 이었다.
“두 분 이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녀온 가족 여행이니까 기억하고 있었죠.”
“우와, 윤리오. 그런 것도 기억하고 있었어?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데 성적은 왜 그렇게 바닥이야?”
“닥…….”
윤리오가 나와 저세상을 보고는 황급히 말을 고쳤다.
“시끄러, 윤리타.”
그대로 윤리타를 향해 닥치라고 말했어도 상관없는데 말이다.
그보다 뭐? 윤사해와 그 부인이 이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녀온 가족 여행?
“아빠, 리사는 몇 살이지?”
“일곱 살이지.”
“그럼, 아빠랑 엄마는 언제 헤어졌어? 언제부터 따로 살게 된 거야?”
내 질문에 윤사해가 답해 주기 곤란하다는 듯이 난처한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금방 들을 수 있었다.
“10년 전이었나?”
“아니야, 12년 전이야. 우리 다섯 살 때 엄마랑 아빠 이혼하셨잖아.”
윤리타와 윤리오가 주거니 받거니 떠들어댔기 때문이었다.
윤사해가 이혼남인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도 윤리사가 태어난 후에 이혼을 한 줄 알았더니, 뭐? 이혼한 지 지금 몇 년 됐다고?
“아빠, 리사는 오빠들이랑 엄마가 달라?”
“아니, 같단다!”
윤사해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내 나이 일곱 살.
정신 연령은 그렇지 못하지만, 어쨌든 간에 너무나도 충격적인 탄생 비화를 듣게 되었다.
***
끼익,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야, 윤리사. 아저씨가 엄청 걱정하고 있는데.”
“몰라. 리사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돼서 무척이나 기분이 안 좋으니까 세상이 오빠는 좀 꺼져 줄래?”
내 말에 저세상이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머릿속은 지금 무척이나 복잡했다.
사랑 없는 정략혼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불타는 사랑을 했던 거야, 아빠?
도대체 이혼 후에 아이를 낳는 건 무슨 경우냐고!
낳은 뒤에 재결합을 한 것도 아니야! 여전히 이혼 중인 상태라니!
온갖 짜증을 내며 이불을 걷어차는데, 저세상이 기겁하며 내게 물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아저씨의 이혼 후에 네가 태어났다고 해도, 형들이랑 엄마가 똑같다잖아!”
그게 문제라고!
아니, 문제까지는 아니지만.
“막장으로 유명한 순옥킴의 드라마에도 이런 설정은 없었단 말이야.”
“……?”
저세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그만 죽치고 나와. 너 때문에 아저씨랑 형들이 네 눈치 보면서 전전긍긍해하고 있으니까.”
“세상이 오빠, 한글 잘 모르면서 어려운 말 잘 쓰네.”
“시끄러!”
저세상이 빼액 소리 지르고는 내 방을 나가 버렸다. 성질 하고는.
하지만 저세상의 말대로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윤리사의 탄생 비화가 막장 드라마에 등장할 법한 설정인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섰다.
그러기 무섭게 윤사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다가왔다.
“리사, 엄마가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하렴. 원할 때 약속을 잡아 보도록 하마.”
“리사는 괜찮은데.”
나는 윤사해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웅얼거렸다.
“어쨌든, 아빠가 엄마 사랑해서 리사가 태어난 거잖아? 그러니까 리사는 괜찮아.”
그러나 윤사해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뭐야, 그렇다고 말해. 안 그러면 내가 뭐가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