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맑게 갠 하늘 아래에서(4)
따뜻한 꿀물을 한 잔씩 나눠 마신 후, 윤사해는 윤리오와 따로 대화를 나눌 시간을 가졌다.
“리타 오빠, 안 부러워?”
“부러워할 게 뭐가 있어.”
그렇게 말하는 윤리타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사실 말이야, 나도 아빠랑 단둘이서 맛난 거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
응, 그렇게 보여.
“그렇지만 리사, 네 오빠는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거든.”
씨익 웃는 얼굴에서 개구쟁이의 면모가 보였다.
“자, 그러니까 어린이들은 이제 양치하고 잘 준비하자.”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거죠?
나는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리고는 말했다.
“리사는 조금만 더 놀고 싶은데.”
“안 돼.”
윤리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는 나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저세상도 함께였다.
윤리타는 나와 저세상의 손에 사이좋게 치약을 묻힌 칫솔을 들려주고는 말했다.
“깨끗하게 씻고 나와.”
달칵, 윤리타가 욕실의 문을 닫아 주자마자 저세상이 크게 하품을 했다.
“세상이 오빠는 오늘 한 것도 없으면서 많이 피곤한가 봐?”
저세상이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왜 한 게 없어?”
그러고는 떠올리기만 해도 이가 갈린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너는 네가 사라진 다음에 백도윤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지? 걔도 달래고, 너도 찾고.”
저세상이 한번 더 크게 하품을 한 뒤에 칫솔을 입에 물었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어.”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리오 오빠만 아니었으면, 오늘 아빠한테 같이 자자고 졸랐을 텐데.”
그래야 오늘의 피로가 싹 풀렸을 텐데 말이야.
내 말에 저세상이 질색하는 얼굴로 양칫물을 뱉어내고는 말했다.
“그 나이 먹고 그러고 싶어?”
내 나이가 어때서!
나는 양치를 하다 말고는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러는 세상이 오빠는!”
“내가 뭐. 그리고 양치나 똑바로 하고 말해. 더러워.”
나는 양칫물을 퉤 뱉고는 입을 헹구었다. 그리고 틀어진 물을 그대로 저세상을 향해 튕겼다.
“앗, 차가!”
“리사가 세상이 오빠 세수시켜 줄게. 얼굴 좀 보여 줘 봐.”
“차가워! 차갑다고!”
저세상이 빽빽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열심히 저세상을 향해 물을 튕길 뿐이었다.
“윤리사, 저세상! 둘이 왜 이렇게 안 나오나 했더니!”
그러다 결국, 윤리타에게 잔소리를 듣고 말았다.
쳇, 조금만 더 하면 제대로 세수시켜 줄 수 있었는데.
***
워낙에 많은 일이 일어났고, 일곱 살에게는 해로운 장면도 봤던 터라 제대로 잘 수 있을까 싶었는데.
“윤리사, 일어나래.”
정말 제대로 숙면을 취하고 말았다.
나는 입가의 침을 슬쩍 닦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세상이 오빠, 오늘 무슨 요일이야? 어제는 또 무슨 요일이었지?”
내 방을 나가려던 저세상이 별난 것을 다 묻는다는 얼굴로 답해 줬다.
“오늘은 금요일, 어제는 목요일이었어. 잠 덜 깼어?”
잠은 제대로 깼다.
다만, 어제 있었던 일이 너무 꿈만 같아서 물어본 거다.
“세상이 오빠.”
“또 왜.”
저세상이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물었다.
“아빠랑 리오 오빠는 화해했지?”
내 질문에 저세상이 답을 고르는 듯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화해는 모르겠지만, 같이 아침 준비 중이야.”
반갑기 그지없는 말에 나는 후다닥 방을 나갔다.
“윤리사!”
그 과정에서 저세상의 어깨를 밀치고 말았지만 말이다.
“아빠! 리오 오빠!”
열어젖힌 문에 윤리오와 윤사해의 인사가 동시에 날아 들어왔다.
“리사, 일어났어?”
“일어났니, 리사?”
세상에,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윤리오와 윤사해에게 동시에 받는 아침 인사라니!
그보다 둘이 함께 아침을 준비 중이라니!
“아버지! 간장 넣으라니까 뭘 넣고 계시는 거예요?!”
합은 제대로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굉장히 훈훈한 광경이었다.
“설탕은 왜 넣어요! 여기에는 소금을 넣어야죠!”
저러다 관계가 틀어지는 건 아니겠지? 절로 걱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아침상이 차려졌다.
윤리오는 깨어날 생각을 않고 있던 윤리타를 억지로 자리에 앉힌 뒤에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슬쩍 입을 열었다.
“아버지,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축제 구경하자고 했잖아요.”
“그랬지?”
“축제 마지막 날에는 오전에 수업한다고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아침 수업을 빼먹고 우리와 축제를 구경하고 싶다는 거였다.
윤사해가 윤리오의 바람을 알아차리고는 곤란하다는 듯이 난처하게 미소를 그렸다.
“그래, 담임선생님한테 따로 연락해 놓으마. 하지만, 리오.”
윤사해가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윤리오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다음부터는 수업을 빠지지 않겠다고 아빠랑 약속해 주겠니?"
윤리오가 머뭇거리다가 결국 윤사해와 손가락 약속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그렇게 답하는 윤리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얼굴이었지만.
“아빠, 약속해도 소용없을 걸요? 윤리오가 수업을 워낙에 자주 빼먹어야죠.”
윤리타의 말에 험악하게 구겨지고 말았다.
윤리오가 당장 입 닥치라는 시선을 윤리타에게로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윤리타는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어제의 피로가 제대로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윤리타의 말에 윤사해는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리오.”
“……그렇게 자주 빠지지는 않아요.”
윤사해가 한숨을 내쉬었다.
“던전 구조 이론과 몬스터 생태 이론 수업은 항상 빠진다던데?”
“네?”
“그래도 실기 수업은 성실히 듣고 있다면서 담임선생님께서 칭찬하시더구나.”
윤사해의 이어진 말에 윤리오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저희 학교생활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보이려고 많이 노력했지.”
윤사해가 씁쓸함을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부질없는 짓이었던 것을.”
여기서 분위기 반전이다!
나는 저세상의 밥숟갈 위에 시금치를 놓아 주고는 말했다.
“리오 오빠, 오빠는 학교 맨날 빠져?”
“맨날은 아니고…….”
“리사도 리오 오빠처럼 되고 싶어! 던전 구조 이론 수업이랑 몬스터 생태 이론 수업 항상 빠지는 사람!”
“…….”
윤리오가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윤사해와 약속했다.
“앞으로 수업 제대로 들을게요. 대신, 저랑도 약속해 줘요.”
“약속?”
“네.”
윤사해가 뭐든 말해 보라는 얼굴을 보였다.
“윤리타랑 일주일에 한 번씩 대련해 주기로 하셨잖아요. 저랑도 해 주세요.”
윤리오가 윤사해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다니!
어제 윤사해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몰라도, 둘의 관계가 무척이나 좋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윤리타처럼 ‘아빠’라고는 부르지 못하겠지만, 매일 맛있는 세 끼를 차려 드릴 수는 있어요.”
윤리오의 말에 윤사해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필요 없단다, 리오. 요리는 앞으로 내가 하마.”
“절대로 안 돼요.”
윤리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빠. 우리들의 위장을 위해서 요리는 참아 줘.
저세상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그것만큼은 참아 달라는 얼굴로 윤사해를 쳐다봤다.
윤리타는 윤사해가 요리한다는 소리에 잠에서 깼는지, 명랑한 목소리로 웃어댔다.
“괜찮아요, 아빠! 제가 리뷰 좋은 요리 학원 찾아볼게요!”
“……그래, 고맙구나.”
윤사해의 떨떠름한 인사와 함께 아침 식사가 끝났다.
화기애애한 아침이 지난 후에, 우리 가족은 비나리 고등학교의 뒤로 나 있는 유영길로 향했다.
어제의 폭풍우로 벚꽃이 많이 저물어 있었지만, 그래도 눈 호강하기에는 좋은 광경이었다.
“아빠! 저기서 사진 찍자!”
사심 채우기도 좋았고.
나는 사진 스팟을 발견하는 족족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우리 가족의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에는 제대로 된 가족사진을 찍으러 가자고 해야지.
평화로웠다. 가끔 윤리타의 핸드폰이 울리긴 했지만.
“윤리오, 청해진이 살려 달래.”
“갑자기? 그냥 무시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진 저녁.
우리 가족은 야시장에서 떡볶이를 사이좋게 나눠먹는 중이었다.
“무시하고 싶어도 계속 살려 달라는데? 어떻게 할까?”
“그냥 무시하라니까? 그보다 불꽃놀이 언제 시작하는지나 알아봐 봐.”
“여덟 시에 한다더구나.”
불꽃놀이까지 앞으로 삼십 분.
우리는 떡볶이를 단숨에 해치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명당이 있다고 들었는데…….”
“저기라고 들었단다.”
윤사해가 가리킨 곳에는 사람들이 이미 우글거리며 모여 있었다.
하지만.
“아이고, 기다리기 지루해서 안 되겠다.”
“그러게. 불꽃놀이는 나중에 TV로 다시 보자.”
우리 가족이 다가가기 무섭게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윤사해가 텅 빈 자리를 차지하고는 방긋 웃었다.
“여기라면 잘 보이겠구나.”
아빠, 길드원들한테 자리 좀 맡고 있으라고 했던 거야? 그래도 돼?
새삼, ‘길드장’이란 직위가 참으로 무섭구나 싶었다.
“리사, 세상아. 이리 오렴.”
윤사해가 나와 저세상을 앞으로 데리고 오기 무섭게 여러 개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밤하늘에 꽃을 그리는 불꽃을 보자 나는 황급히 두 손을 모았다.
“저게 별똥별이야? 소원을 빌게?”
저세상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가볍게 무시하면서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소원을 빌고 다시 눈을 뜬 후에도 불꽃놀이는 계속되는 중이었다.
“소원은 다 빌었어?”
“응.”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
“으음.”
대답을 얼버무릴까 하다가 활짝 웃으며 답해 주기로 했다.
“아빠랑 오빠들이 앞으로도 계속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계속 이런 날들만 이어지면 좋겠어요.”
***
펑-! 퍼엉-!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것에 남자가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떼어냈다.
“무엇하러 바깥으로 기어 나왔나 싶었더니. 제 속을 긁으려고 나오셨나 보군요, 이매.”
이매가 정답이라는 듯이 키득거렸다.
다분히 저를 놀리는 모습에 선비는 짧게 혀를 차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바뀐 풍경 속에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붉게 차려입은 한복과는 대조적으로 검은 너울을 쓰고 있는 여자였다.
선비가 여자에게 알은 척을 하며 다가갔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각시?”
각시가 선비를 향해 비스듬히 몸을 돌리고선 말했다.
“설은을 찾으러 나왔다가 길을 잃어버렸단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내해 주지 않겠느냐?”
나지막하게 부탁하는 목소리에 선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오십시오.”
‘각시’를 위해 마련된 저택으로 향하는 길.
선비와 그녀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없었다. 적막만이 흐르는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각시였다.
“아이야.”
다다른 저택에 선비가 걸음을 멈춘 것도 그때였다.
굳게 닫힌 대문 앞, 각시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다른 이의 손으로 피를 묻혀도, 결국 이는 네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인 것을 잊지 마려무나.”
다정하게 타이르는 목소리였다.
그에 선비가 여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당신 말대로 저는 ‘아이’라서 말입니다.”
선비의 금색 눈이 둥글게 접혔다.
“받은 호의에 보답하며 충성하는 것뿐입니다. 저의 은인이신 수장님께.”
시간을 분명히 알 수 없는 공간.
계절의 감각이 불투명해지는 지하를 청사초롱이 어지럽게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