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맑게 갠 하늘 아래에서(3)
“다 먹었어! 나 먼저 일어난다? 옷 갈아입고 올게!”
“저도요!”
윤리타의 뒤를 이어 저세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상아, 앉아. 아직 다 안 먹었잖아.”
윤리오의 지적에 슬그머니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말이다.
“조금밖에 안 남았는데…….”
“그래도 남기면 안 되지.”
저세상이 입 안으로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었다. 윤리오는 그런 저세상에게 여러 가지의 반찬을 올려 주며 나를 챙겼다.
“리사는 다 먹었네?”
“응! 리사는 세상이 오빠처럼 편식 안 하고 다 먹었어!”
저세상은 윤리오가 놓아 주는 녹색 식물을 그 몰래 밥그릇 뒤로 떨어뜨리는 중이었다.
우리 주인공님, 저렇게 편식하면 나중에 키 안 크실 텐데 어쩐담.
어쩌기는! 커서도 나보다 작으면 신나게 놀려 주지, 하하!
나는 저세상을 한 번 비웃어 주고는 윤리오에게 물었다.
“오빠, 아빠한테 뭐 해 줄 거야?”
“으음…….”
윤리오가 목소리의 끝을 흐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제대로 요리를 정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비밀.”
좋은 것이 생각났다는 듯이, 윤리오는 그렇게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말했다.
***
윤사해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들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윤사해가 강산에 본부장에게 다시 불러간 이유는 그의 오랜 친구인 백시준 때문이었다.
강산에가 두 손을 모아 깍지 기고선 그에게 물었다.
“안보국의 백시준 요원과 함께 있었던 건, ‘아버지’로서 아이들과 함께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나. 그것도 아니면.”
“우연히 만났던 것뿐입니다. 서커스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에 대해 백시준 요원에게 알려 준 적 없습니다.”
오히려.
“본부장님께 알려 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서커스가 학교 축제를 기회로 삼아 움직일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윤사해의 날선 목소리에 강산에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바쁜 사람을 계속 붙잡은 것 같군. 이만 가 보게. 이번 일로 더는 부를 일 없을 테니.”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윤사해가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는 그대로 세미나실을 나섰다.
그러기 전에 그는 백시준의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드려 주었다.
윤사해 나름대로의 격려였으나, 백시준은 욱신거리는 통증에 어깨를 감싸 쥘 뿐이었다.
‘더럽게 힘만 세지.’
‘내가 뭐.’
윤사해는 그렇게 백시준과 눈짓으로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고는 세미나실을 나왔다.
달칵, 윤사해가 세미나실의 문을 닫기 무섭게 서차웅이 그에게 다가왔다.
“길드장님, 본부장님과의 대화는 잘 끝마치셨습니까?”
“잘 끝났네.”
윤사해가 서차웅의 걱정을 가볍게 덜어 주고는 말했다.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따로 보고할 일이 있으면 연락 주게나.”
금방 돌아간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 버렸다. 서차웅과 헤어진 윤사해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한 달에 한 번은 들어갈까 말까 했던 보금자리가 두 눈에 들어왔다.
“한 번을 넘어, 스무 번도 넘게 들어간 것 같군.”
윤사해는 자조적으로 읊조리고는 현관문 앞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기 직전, 그는 비나리 고등학교에서의 제 모습을 떠올리고는 손을 멈췄다.
모자 장수와 그가 부린 마수의 피를 흠뻑 뒤집어썼던 자신의 모습을, 아이들은 잊지 못할 터.
‘망할.’
윤사해가 짙게 드는 자괴감에 눈가를 꾹꾹 눌렀다.
“자제했어야 하는데.”
미지 영역으로 돌아갔다는 도깨비의 웃음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이미 잠들었을 늦은 시간.
윤사해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러기 무섭게 날아드는 인사가 있었으니.
“다녀오셨어요?”
첫째 아들, 윤리오의 인사였다.
“어엇……?”
윤사해가 당황해하는 사이, 또다른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아빠, 오셨어요?”
“다녀오셨어요, 아저씨?”
윤리타와 저세상의 인사에 윤사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
“아빠! 저녁은 먹었어?”
하나뿐인 딸아이가 거실 안쪽에서 우다다 달려와 제 품에 안겨서는 물었다.
윤사해가 아이의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 고갯짓에 윤리사가 활짝 웃으며 윤사해의 손을 잡아 부엌으로 이끌었다.
***
“짜잔!”
나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리오 오빠가 만든 거야!”
연어 구이부터 연어장 덮밥, 연어 스테이크까지.
식탁 위에는 혈관 질환을 예방해 주는 EPA, DHA 등의 오메가-3 지방산을 함유하고 있는 연어 요리가 한가득 있었다.
윤사해를 위해 뭘 준비해 줄까 했더니, 윤리오는 마트에서 연어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털었었다.
내 말에 윤리오가 머쓱하게 목 언저리를 긁으며 말했다.
“저 혼자 만든 건 아니에요. 애들이 부족한 재료도 사 오고, 음식도 접시에 담고…….”
윤리오가 목소리의 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윤사해에게 이것저것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윤사해는 흐뭇하게 웃었다.
“고맙구나, 리오. 맛있게 먹으마.”
“당연히 그러셔야죠.”
언제 고개를 숙였냐는 듯, 윤리오가 턱을 치켜들고선 윤사해의 앞에 연어 구이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밥솥을 열어 밥그릇에 주걱을 한 번 움직였다.
왜 그러나 했더니, 다섯 숟갈을 뜨면 끝일 밥을 가지고 윤사해의 옆에 앉았다.
“혼자 드시면 적적하실 것 같아서요. 같이 먹어요. 저 어차피 저녁 별로 안 먹어서 지금 배고파요.”
아니, 혼자서 윤사해를 차지하겠다는 거야? 그러려고 저녁을 조금 먹었구나, 윤리오!
“리사도 먹을래! 리사도 배고파!”
“그럼, 나도!”
윤리타의 뒤를 이어 저세상 역시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저도 한 입만…….”
윤리오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우리를 쳐다봤다.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세 개의 밥그릇을 꺼냈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밤 열 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나란히 식탁에 모여 앉게 됐다.
“리사, 세상아. 억지로 안 먹어도 되니까 먹고 싶은 만큼만 먹어.”
“응!”
“네.”
윤리타가 연어 구이를 먹다 말고 윤리오에게 물었다.
“윤리오, 나는 걱정 안 해 줘?”
“응, 안 해 줘.”
윤리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윤사해에게 말했다.
“아빠, 봤죠? 윤리오가 저렇게 못됐어요!”
“윤리타, 아버지 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 먹기나 해!”
윤리타가 입술을 삐죽이고는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한창 성장기인 윤리타는 밤이 늦은 시간에 정말로 배가 고팠나 보다. 윤사해 먹으라고 차린 음식을 자기가 다 먹고 있네.
그런 모습이 보기 좋다는 듯이, 윤사해가 흐뭇하게 웃으며 윤리타의 밥숟갈 위에 연어 스테이크 한 조각을 놓아 줬다.
“많이 먹으렴.”
“네, 아빠!”
화기애애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윤리오가 짧게 혀를 찼다.
“아버지나 많이 드세요.”
그 말에 윤사해는 곧장 밥숟갈을 크게 펐다.
그렇게 단란하게 끝난 저녁 식사.
우리는 윤리오가 타 준 꿀물을 한 잔씩 쥐고서 모여 앉았다.
“축제는 예정대로 진행될 거라고 하더구나.”
“예정대로 진행될 거라니…….”
“그게 정말이에요, 아버지?”
윤사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내일이 축제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너희의 안전을 위협할 만한 것도 발견되지 않아 축제는 예정대로 진행할 거라고 들었단다.”
안전 불감증 아니야?
윤사해가 서커스를 철저하게 짓밟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을 도왔던 유랑단이 남아 있잖아.
‘망할 탈쟁이들이 한 번 더 학교를 헤집으려고 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걱정되는데.’
다행히도 내 걱정은 금방 해소가 되었다.
“하지만 내일 AMO 측에서 요원들을 많이 배치해 놓을 거라고 들었단다. 낯선 사람들 많다고 너무 무서워하지는 마렴.”
“저랑 윤리타가 애도 아니고, 그런 걸 무서워하겠어요?”
윤리오가 불퉁한 얼굴을 보였다.
그래도 윤사해가 자신들을 걱정해 준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찻잔 뒤로 입꼬리가 씰룩이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좋아, 이 세계의 어른들이 안전 불감증을 겪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인데…….
그러고 보니 청해진은 괜찮나?
윤리오와 윤리타가 아무 일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니, 청해진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걱정되는데.’
그렇게 청해진의 안부를 걱정할 때였다.
타이밍 좋게도 쌍둥이의 입에서 청해진의 이야기가 나왔다.
“청해진도 내일 축제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거라는 거 알고 있을까? 걔 지금 해솔이 누나랑 있으려나.”
“해솔이 누나, 오늘 학교에 왔었다며? 선후배 교류전이 작게 열렸었다면서 애들이 그러던데.”
“웬 선후배 교류전? 미친놈이 구교사에 찾아오기는 했었는데.”
윤리오의 입에서 들린 욕설에 윤사해가 미간을 좁혔다.
당장에라도 첫째 아들을 향해 잔소리를 할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훈훈한 분위기를 잔소리로 망칠 수는 없지!
나는 손을 번쩍 들고는 쨍하게 외쳤다.
“내일 불꽃놀이 한다고 했는데!”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리사는 아빠랑 오빠들이랑, 세상이 오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가고 싶어!”
윤리타도 그러고 싶다는 듯이 두 눈을 반짝였다. 윤리오도 그런 눈치였지만, 그는 윤사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지, 시간 괜찮으시겠어요?”
“당연히 괜찮지.”
윤사해가 눈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아빠한테는 서 비서가 있잖니? 급한 일만 아니면 서 비서가 알아서 처리해 줄 거란다.”
왜인지 모르게 서차웅이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