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맑게 갠 하늘 아래에서(2)
해가 어둑하게 진 시간.
각성자 관리 기구, AMO의 건물 곳곳은 불이 켜진 상태였다.
그 중에 한 곳인 S-세미나실에서 AMO의 본부장인 강산에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럼, 추후 이매망량 측에 이번 일에 대한 보고를 요구하도록 하지. 아주 상세히 말이야.”
“알겠습니다.”
피가 묻은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윤사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사해 길드장.”
강산에가 그런 그를 붙잡아 세우고선 말을 이었다.
“쇼가 너무 과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줬으면 하네.”
윤사해는 강산에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살짝 꾸벅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나선 S-세미나실.
윤사해는 초췌한 얼굴의 친구와 맞닥뜨렸다.
“백시준, 네가 불려 올 줄이야.”
“학교에 걸려 있던 선비의 스킬을 해제한 사람이 나고, AMO 측에 상황을 알린 사람이 또 나니까. 그래서 불려 왔지.”
백시준이 방긋 웃고는 윤사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많이 까였어?”
그에 윤사해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까일 게 뭐가 있다고. 네 걱정이나 하지 그래.”
“나야 뭐, 안보국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게 일상이라.”
백시준이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고는 세미나실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렇게 그가 문을 열려는 찰나였다.
“백시준.”
윤사해가 귓불을 붉게 물들인 채, 모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친구에게 건네었다.
“고맙다.”
서커스의 침입을 알게 된 후, 윤사해는 아이들을 찾기 위해 거주자인 ‘랑야’를 불렀다.
누군가의 흔적을 쫓는 면에 있어서 그만큼 훌륭한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하나 선비의 스킬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아이들을 그렇게 빨리 찾지 못했을 거다.
백시준이 윤사해의 감사 인사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해야, 죽을 때가 다 됐니? 아니면 혹시 어디 아파?”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저 망할 놈이.’
사납게 찌푸려진 윤사해의 얼굴에 백시준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알겠으니까 조심히 들어가. 나중에 애들 데리고 밥이나 한 끼 먹자.”
“그럴 일 없어.”
“그럴 일 있다고? 알겠어,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 아니면 내가 먼저 연락하거나.”
“야!”
그러나 백시준은 이미 회의실로 들어간 뒤였다. 윤사해가 닫힌 문을 짜증스레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길드장님.”
서차웅이 기다렸다는 듯이 윤사해에게 다가왔다.
“랑야는?”
“돌아가셨습니다. 사야 님께 안부를 전해 달라하시더군요.”
윤사해가 코웃음을 치고는 걸음을 옮겼다. 서차웅이 그의 뒤를 따르며 입을 열었다.
“학교에서 처리한 열다섯 명이 서커스의 인원 전부인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그 빌어먹을 놈이 몸을 옮겼을 가능성은 없겠군.”
“네, 제로입니다. AMO 측의 부검에서도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차웅의 말에 윤사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자 장수의 숨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끊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길드원의 몸을 숙주로 삼아 살아날 수 있는 놈이었다.
더욱이 그 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성가신 적.
숨통을 끊기 전에 그가 몸을 버리고 표식이 새겨진 다른 길드원의 몸으로 달아났을 가능성이 충분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서커스의 길드원 전원이 전부 죽었다고 한다. 윤사해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쉬웠는데.”
행방을 찾지 못하여 10년을 헤매었다. 윤사해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서차웅에게 물었다.
“선비나 다른 녀석들은? 파악된 것 없나?”
“선비는 놓쳤고, 공중에서 싸움을 벌인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공중?”
윤사해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아는 한, 공중에서 싸움을 벌일 만한 실력은 서커스 쪽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군지는 파악이 됐나?”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서차웅은 그 일에 관해 더는 알아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거 저인 것 같네요, 아저씨.”
“해솔 양?”
비나리 고등학교 공중에서 싸움을 벌였던 청해솔이 윤사해 앞에 멈춰 섰기 때문이다.
이마에 거즈를 붙이고 있는 청해솔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학교에 초랭이가 기어들어 와 있더라고요.”
“초랭이도 있었단 말인가?”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다.
“네, 학교에 최대한 피해 없이 잡아 보려고 공중에서 그런 건데, 싸움을 본 사람이 있나 보네요.”
“그래서 그렇게 다쳤나 보군.”
“심하게 다친 곳은 없어요. 어차피 금방 낫고요.”
청해솔이 이마에 난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초랭이 녀석은?”
“놓쳤죠. 탈쟁이 녀석이랑 붙는 건 처음이었는데 너무 날래더라고요. 짜증나게.”
청해솔은 그렇게 말하고는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가문에서 보관 중이어야 할 보물이 엄한 놈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것도 화나는데, 그 엄한 놈이.
‘암만 봐도 청(淸)의 후손이었지.’
자신과 같은 가문의 사람인 것 같으니 말이다.
‘망할 늙은이들, 가보를 어떻게 관리 중인 거야?’
아무래도 본가로 내려가 봐야겠다며, 청해솔이 그렇게 생각하던 중이었다.
“AMO에 온 것은 초랭이 녀석 때문인가?”
“그것도 있지만, 항의하러 왔어요. 학교를 세워 놓았으면 똑바로 관리하라고요.”
자고로 학교를 족칠 때는, 교육청에 민원을 넣는 것이 최고였다.
하지만 비나리 고등학교는 교육청 소속이 아닌, AMO 직속의 교육 기관.
그렇기에 청해솔은 AMO로 찾아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가문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그보다 리오가 밖에 있던데요? 같이 돌아가기로 하셨나 봐요.”
“리오가……?”
“네, 빨리 가 보세요.”
윤사해가 알려 줘서 고맙다며 황급히 다리를 움직였다. 서차웅이 그 뒤를 따르며 청해솔에게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하지만 윤리오가 있다는 AMO의 건물 바깥으로 나가기 직전.
“길드장님?”
윤사해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서 비서, 혹시 나한테서 냄새가 난다거나 그러지는 않나?”
“냄새요?”
“피 냄새 말이네!”
윤사해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
“애한테 그 망할 것의 피 냄새가 배면 안 되니 어서 말해 주게!”
그 순간, 서차웅은 기둥 뒤에 서있는 윤리오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니, 밖에 계신다면서?’
해가 지면서 날이 추워지자, 윤리오는 추위에 못 견뎌 AMO의 건물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윤리오가 서차웅에게 눈치껏 행동하라는 시선을 보냈다. 이를 알아들은 서차웅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럼, 그 잡것의 흔적이 내게 남아 있다거나 그러지는 않나?”
냄새가 나는지도 모르겠는데, 흔적이 남아 있는지는 또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서차웅이 아찔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는 말했다.
“강산에 본부장님을 만나시기 전, AMO에서 제공해 준 샤워 시설에서 몇 번이나 씻었잖습니까?”
그러니 흔적은 깔끔하게 지워졌을 거라고 서차웅은 윤사해를 안심시켰다.
그럼에도 윤사해는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리오에게 그 자식을 연상케 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보여 주고 싶지 않네.”
두 번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얼굴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서 비서, 내게…….”
“아버지.”
윤사해가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째 아들이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리오?”
“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하네요. 그보다 여기서 하루 종일 그러고 계실 거예요?”
“아… 아니…….”
리오 도련님, 나이스.
서차웅이 속으로나마 윤리오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것도 잠시, 그는 걸려 온 전화에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전화를 걸어 준 상대에게 조용히 감사 인사를 보내면서 말이다.
윤사해와 윤리오.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어색하게 여기는 부자(父子)가 단둘이서 남겨진 상황.
윤사해가 쭈뼛거리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리사는 어디 가고.”
“화홍이 형 불러서 집에 먼저 보냈어요.”
“그러는 리오, 너는…….”
“리사가 같이 돌아오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윤사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떠서는 윤리오에게 물었다.
“리사가?”
“네, 그 애는 제가 아버지랑 친해졌으면 하잖아요. 이번 기회에 이야기 좀 나눠 보라고 그런 것 같아요.”
들린 말에 윤사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윤리오 역시 저도 모르게 나간 날선 말에 입술을 꾹 깨물어 버렸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윤리오가 자책하면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은 가까스로 억누를 때였다.
“리사와 검사는 잘 받았니?”
윤사해가 숨 막힐 듯 찾아왔던 정적을 깨웠다. 들린 질문에 윤리오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리사한테 그 자식의 스킬이 걸려 있었는데 풀렸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대요.”
“리오, 너는.”
“저도 딱히…….”
윤리오가 머쓱하게 목 언저리를 문지르며 말을 흐렸다. 윤사해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손에 그렇게 상처가 났는데, AMO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 줬나 보구나.”
“괜찮아요,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침 바르면 나아요.”
윤리오가 윤리타가 할 법한 소리를 해대고는 자잘하게 상처가 나있는 손을 뒤로 숨겼다.
“…….”
“…….”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윤사해가 조심스레 윤리오의 눈치를 살폈고, 윤리오는 하고 싶은 말을 꺼내고자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였다.
“길드장님, 죄송하지만 강산에 본부장님께서 찾으신답니다.”
“말할 거 다 말했는데 왜……!”
윤사해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 윤리오가 있는 것을 뒤늦게 상기했기 때문이다.
윤사해가 윤리오의 눈치를 살피며 두 눈을 데굴 굴렀다. 윤리오가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녀오세요, 아버지. 애들이랑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녀오라며,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해 보고 싶기는 했다.
윤리오의 인사에 윤사해가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금방 돌아가마.”
***
“그래서 아빠는 늦으실 거라고?”
“그래, 그러니까 우리끼리 먼저 저녁 먹자.”
윤사해와 함께 돌아올 줄 알았던 윤리오는 혼자였다. 윤리오의 말에 윤리타가 시무룩한 얼굴을 보였다.
“아빠, 괜찮으시겠지?”
윤리타는 제가 내뱉은 말에 화들짝 놀라서는 두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아빠가 어디 다친 건 아닐까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누가 뭐래?”
“너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거나,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알았지?”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하냐고.”
윤리오가 윤리타의 이마에 딱콩을 날리고는 입을 열었다.
“리사, 세상아. 어서 자리에 앉아. 저녁 먹자.”
“응!”
“네.”
윤리오가 평소 먹는 양보다 적게 밥을 뜨고는 말했다.
“다 먹고 장 보러 가자.”
“그래도 괜찮겠어?”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윤리오가 나와 저세상의 쌀밥 위에 시금치를 가득 올려 주고는 말을 이었다.
“아버지 오늘 고생하셨으니까 맛있는 걸 먹여야겠어. 그러니까 장 보러 가야 해.”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