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맑게 갠 하늘 아래에서(1)
“상관없다고요.”
윤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윤사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다들 비켜 주십시오! AMO 현장 제 1팀의 백시진입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윤리오는 망설임 없이 윤사해에 다가갔을 거다.
“윤사해 길드장님!”
백시진의 경악에 찬 목소리와 함께 AMO의 요원들이 도착했다.
윤사해가 주위에 몰려든 AMO의 요원들을 보고는 귀찮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교장을 불러와 달라고 한 것 같은데.”
“교장 선생님과 단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설마, 테이블 위에 모자 장수의 머리통을 올려놓고는 학교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고 질책이라도 하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윤사해라면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이야기였다.
백시진이 윤사해에게 손수건을 건네고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리오 군이 붙잡혔던 겁니까?”
“우리 딸아이도 함께였네.”
백시진의 시선이 나와 윤리오에게로 향했다.
“AMO로 모시겠습니다. 리오 군과 리사 양도 함께요.”
백시진이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윤사해가 눈살을 찌푸리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백시진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이매망량에 뛰어난 힐러가 있다는 것 압니다. 하지만 AMO에서 정밀 검사를 받는 것이 리오 군과 리사 양에게 좋을 겁니다.”
그 말이 윤사해를 움직였다.
“아이들한테 허튼 짓을 하려고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걸세.”
“안 그럽니다.”
그러면서 백시진이 본 사람은 소란 가운데서 묵묵히 우리 곁을 지키고 있는 랑야였다.
〖신기한 인간이군. 나는 어차피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지라, 저렇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그래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걸요? 인간이 아닌 존재가 떡하니 우리 뒤에 있는데, 누가 눈치를 안 봐요?
백시진이 랑야에게서 시선을 거두는 찰나, 윤사해가 말했다.
“그럼, 자네가 우리 애들을 좀 챙겨 주게나. 보다시피 내 꼴이 지금 이래서.”
“알겠습니다, 윤사해 길드장님.”
나와 윤리오는 그렇게 백시진과 함께 AMO로 이동하고자 걸음을 옮겼다.
“시진이 삼촌, 저도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윤리타가 저세상과 함께 우리를 따라오려고 했지만.
“리타, 리오와 리사는 괜찮을 거란다. 세상이와 함께 먼저 집에 돌아가 있으렴.”
윤사해가 그런 아들을 말렸다.
“그치만…….”
윤리타가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리자, 윤사해가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보였다.
윤리오도 그 모습을 봤는지, 살짝 큰 목소리로 윤리타에게 말했다.
“윤리타, 아버지 말씀 들어!”
윤리타는 그제야 윤사해에게 알겠다면서 입술을 씰룩였다.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윤리타를 빤히 쳐다보다가, 윤리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리오 오빠.”
“가자, 리사.”
윤리오가 나를 안아 들고는 그대로 백시진이 열어 준 검은 벤에 탑승했다.
도착한 AMO에서 나와 윤리오는 곧장 정밀 검사를 받았다.
윤리오는 자잘한 상처만 가득했고, 나는.
“무슨 스킬이 걸려 있었다고요?”
“원하는 대상을 자신의 곁으로 이동시키는, 그런 종류의 스킬이 걸려 있었네요.”
남자가 윤리오의 질문에 답해 주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살아 있는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적은데, 등급이 꽤 높았나 봐요. 스킬 숙련도도 높았을 테고.”
그래 봤자 지하 길드의 인간이었지만.
“그 좋은 스킬, 이로운 곳에다가 좀 쓰지.”
남자가 짧게 혀를 차고는 경쾌하게 말했다.
“검사 모두 끝났어요. 윤리사 어린이에게 걸려 있던 스킬은 진작 해제됐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윤리오 학생.”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검사실을 나갔다. 하지만 윤리오의 얼굴에 깃든 걱정은 사라질 줄 몰랐다.
나를 쳐다보는 시선에서 죄책감과 죄악감이 뒤섞인 것이 느껴졌다. 윤리오가 잘못한 일이라고는 없는데 말이다.
우리 첫째 오라버니의 기분을 어떻게 풀어 주면 좋을까 싶은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끝났냐?〗
뒤를 돌아보니 랑야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랑야! 아빠는요? 우리 아빠는 어쩌고 혼자 돌아다니고 있어요?”
〖네 아비는 여기서 가장 높다는 인간이랑 대화를 나누는 중이지. 그리고 내가 혼자서 돌아다니는 이유는.〗
랑야가 나와 윤리오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웃었다.
〖네 아비가 너랑 네 오라버니가 괜찮은지 조용히 보고 와 달라 하더군.〗
조용히가 아닌데?
뭐 이런 도깨비가 다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윤리오가 나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리사.”
나는 윤리오에게 두 팔을 벌렸고, 윤리오는 나를 꼭 안아 들고는 랑야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랑야가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뭐냐? 할 말 있으면 해, 윤사해의 첫째 아드님.〗
“아니요, 딱히…….”
윤리오가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저랑 리사를 빨리 찾아 주셔서 감사해요, 랑야 님.”
정중하고 예의바른 감사 인사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날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랑야도 이를 느꼈는지,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그것도 잠시.
〖아하.〗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선 윤리오에게 말했다.
〖네가 어릴 적에는 그토록 늦게 찾아 놓고서, 이번에는 왜 빨리 찾았나…… 그것이 불만인가 보지?〗
“아니에요!”
〖아니기는.〗
랑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너를 찾는데 일주일 정도 걸렸던가? 그 시간 동안 윤사해의 우스꽝스러운 꼴을 많이도 봤지.〗
그때만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이, 랑야가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거주자를 불러내는 데는 ‘대가’가 필요하다. 너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네 아비의 대가는 다른 이가 대신 치러 주고 있다. 윤사해의 첫째 아드님, 너도 알다시피 말이야.〗
뭐야, 도깨비들 불러내는데 그런 게 필요했어? 그리고 그걸 다른 사람이 대신 치러 주고 있다고?
『각성, 그 후』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내용에 동공 지진 중인데, 랑야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런데 윤사해의 첫째 아드님, 그걸 어떻게 알았지? 윤사해가 말해 줬을 리는 없는데.〗
탐색하듯 저를 훑는 붉은 눈에 윤리오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사야 님께서 말해 주셨어요.”
사야라면 호랑이를 데리고 다니던 그 예쁜 언니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사야…….〗
랑야가 앓는 목소리를 내고는 끝만 붉은 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어쨌든, 윤사해의 대가는 다른 이가 대신 치러 주는 중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같은 거주자들을 불러내는 건 좋지 않아.〗
다행히도 그 이유는 나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을 공유하게 돼서 꽤 피곤해지거든. 물론, 나는 괜찮고, 피곤해지는 건 네 아비지.〗
쉽게 말하면, 거주자가 받은 고통을 계약자가 그대로 느낀다는 거였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계약자가 받은 고통은 거주자에게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네 아비는 나를 불러 놓고 있었어. 일주일 간, 너를 찾을 때까지. 밤낮을 할 것 없이 계속 말이다.〗
그 과정에서 랑야는 상처를 입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윤리오가 입술을 꾹 깨물었고, 랑야는 그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알아 두라고. 참고로 사춘기라고 하지?〗
사춘기 소리에 윤리오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네가 한창 둘째와 그런 걸 겪으면서 학교를 빠질 때마다 윤사해는 나를 불러서 귀찮게 했지.〗
그러면서 랑야는 말했다.
〖어차피 네가 가는 곳이라고는 PC방인가 뭔가 그곳뿐이었는데 말이야. 키보드 잘 부수더군.〗
“랑야 님……!”
희게 질려 있던 윤리오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갛게 익어 버렸다. 어린 날의 흑역사가 떠올라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보다, 윤리오. 네게 그런 시절이 있는 줄 몰랐어.
랑야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윤리오에게 마지막 타격을 입혔다.
〖참고로 네가 고장 낸 PC방의 모든 것들은 네 아비가 모두 변상해 줬다. 주인장을 찾아가 사과하는 꼴이 가관이었는데 말이야.〗
“……!”
〖우리 애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니라면서 너그럽게 봐 달라고 네가 부순 것의 몇 배로 그것들을 변상해 줬지.〗
윤리오의 얼굴은 건들면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랑야가 그런 윤리오를 보며 으쓱였다.
〖이것도 그냥 알아 뒀으면 해서 말해 주는 거야, 윤사해의 첫째 아드님.〗
다분히 윤리오를 놀리는 목소리였다. 랑야는 지난날의 일들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아서 기분 좋다는 얼굴로 걸음을 돌렸다.
〖괜찮은 것을 확인했으니 나는 이만 간다. 제발 귀찮은 일에 작작 휘말려, 너희.〗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이 얄밉기 그지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도깨비님 나이스였다.
윤리오한테 왜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안 해 주셨어요, 아저씨!
나는 윤리오 몰래 랑야의 뒤를 향해 엄지를 날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리오 오빠, 키보드 잘 부숴?”
“아… 아니…….”
윤리오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고는 웅얼거렸다.
“키보드는 한 번밖에 부순 적 없어. 그렇게 부순 다음에는 다시는 PC방 안 갔어.”
“PC방이 뭐하는 곳인데?”
“게임하면서 스트레스 푸는 곳.”
스트레스를 정말 신이 나게 풀었었나 보다.
과거의 흑역사를 떠올리고 있는 윤리오가 빨갛게 익은 얼굴을 문지르며 혼잣말했다.
“아버지가 그 일을 알고 계시다니. 어쩐지, 윤리타랑 용돈 모아서 변상하러 갔더니 필요 없다고 하더라. 왜 그러나 했는데.”
윤리오는 그러면서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그럼, 작년에 카페 유리창 깨뜨렸던 것도 아버지가 아시나? 그때도 필요 없다고 했는데.”
뭐야, 윤리오 도대체 뭘 얼마나 부수고 깨뜨리고 다녔던 거야?
어쨌거나 다행이다.
자신이 그동안 방치당하고 있던 게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 같으니 말이다.
“리오 오빠.”
나는 윤리오의 품에서 내려와서는 활짝 웃었다.
“저녁은 리타 오빠하고 세상이 오빠랑 같이 리사가 준비하고 있을게!”
그러니까.
“리오 오빠는 아빠랑 같이 와!”
윤리오가 입을 뻐금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거절하면 따귀를 날릴 생각이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