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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46)화 (46/500)

46화. 폭풍우 치는 날에(3)

세로로 길게 찢기는 천막을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사령(死靈)들이 울부짖던 할미의 숲. 그곳에 나를 구하러 왔던 사람.

“아빠!”

찢긴 공간 사이로 윤사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봐, 내 말 맞지? 네 따님과 첫째 아드님께서 여기 계시다니까?〗

일전에 안면을 튼 도깨비, ‘랑야’도 함께였다.

“리사, 리오.”

윤사해가 잔뜩 억누른 목소리를 힘겹게 뱉어냈다.

“아버지가 여기를 어떻게…….”

어떻게 왔기는? 저 도깨비 아저씨가 도와줬겠지!

나는 윤리오의 품에서 내려와 곧장 윤사해에게로 달려갔다.

“아빠악!”

하지만 윤사해가 나를 끌어안기도 전에, 누군가 내 목덜미를 낚아채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망할 서커스의 주인 새끼인가 했더니 다행히도 그 인간은 아니었다.

〖윤사해의 따님, 주위를 잘 살피셔야지.〗

나를 낚아챈 사람은 랑야였다.

랑야가 한 쪽 팔로 나를 받쳐 안고는 고개를 돌렸다.

〖윤사해,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가는 당할 거다.〗

랑야의 뒷말에 윤사해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윤사해는 한 곳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자리였다.

“헙…….”

날이 뾰족하게 선 칼이 바닥에 꽂혀 있는 게 보였다. 랑야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찔렸을 거다.

아저씨, 땡큐. 제 목숨을 구해 주셨네요.

랑야가 나를 고쳐 안고는 말했다.

〖어떻게 할까? 네 자식들 데리고 먼저 나갈까?〗

“그건 힘들 것 같군.”

윤사해가 찢고 들어온 곳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천막이 완전히 복구되자, 랑야가 혀를 차고는 윤사해에게 물었다.

〖태랑을 부르는 게 어때? 네 자식들이 있는 곳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겠어?〗

“자네가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 준다면야 충분히 싸울 수 있지.”

윤사해가 그렇게 말하고는 그림자를 움직여 기다란 형태의 창을 만들어냈다.

그러고는 윤리오의 앞을 막아서는데, 그 뒷모습이 얼마나 듬직한지 모를 일이었다.

〖윤사해의 따님, 네 아비가 그렇게 멋있어 보이냐?〗

“네!”

누가 봐도 멋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윤리오는 다르게 생각하는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윤사해를 보고 있었다.

일그러진 아들의 얼굴에 윤사해가 자괴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그런 건 상관없어요. 아버지는 언제나 늦으셨으니까요.”

물기가 가득한 목소리에 윤사해의 고개가 절로 떨어졌다. 윤리오는 그런 윤사해를 보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오셨어요? 저희 때문에 이렇게 나서시는 거 귀찮아하시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윤리오의 얼굴은 괴롭게 일그러져 있었다. 윤사해의 ‘짐’이 되어 미안하다는 듯이.

윤사해는 다른 의미로 아들과 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듯한 표정.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 부자(父子)라니, 숨 막힐 지경이었다.

한 마디 소리라도 지를까 하는데,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싸움은 나중에.〗

랑야가 눈 깜짝할 사이에 부자(父子)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윤사해와 윤리오의 사이에 자리한 랑야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온다.〗

탁, 탁.

바닥을 가볍게 짚는 지팡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부탁하네, 랑야.”

윤사해의 말에 랑야가 윤리오를 가볍게 들어 옆구리에 끼었다.

윤리오가 놀라 소리 질렀다.

“랑야 님!”

〖발버둥치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윤사해의 첫째 아드님.〗

랑야가 윤리오의 버둥거림을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제압하고는 말했다.

〖윤사해, 네 자식들은 알아서 잘 지켜 줄 테니 빨리 끝내.〗

랑야는 그렇게 우리를 데리고 순식간에 윤사해에게서 멀어졌다.

“랑야 님! 놔 달라고요!”

〖자, 놔 줬다.〗

“악……!”

랑야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윤리오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탓에 윤리오는 바닥에 머리를 찧고 말았다.

이 망할 도깨비가? 저 고운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윤사해의 따님, 나 말고 잘난 네 아비나 그렇게 보려무나.〗

나는 두 눈에 힘을 풀고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윤사해를 바라보았다.

윤사해의 앞으로 원통형의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자 장수…….”

윤리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뱉어냈다. ‘이름’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했지만 말이다.

“잘도 기어들어 왔군.”

윤사해와는 분명 멀찍이 떨어져있는데, 어떻게 돼먹은 공간인지 그의 목소리가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살기가 이글거리는 윤사해의 목소리에도 모자 장수는 겁나지 않는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당신은 저를 잘도 놓치셨고요.”

“네놈의 비밀을 알았다면 그렇게 놓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윤사해의 말에 모자 장수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윤사해가 알아낸 자신의 비밀을 어디 한 번 말해 보라는 듯이 말이다.

그에 윤사해가 모자 장수를 향해 창끝을 겨누며 입을 열었다.

“서커스의 표식. 자네는 그것이 몸에 새겨진 자들에게 마음대로 기생할 수 있다지, 아마?”

의문으로 끝나는 말이었지만, 확신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빌어먹을 피에로가 같잖은 재주를 부린다고 생각했다네.”

“저는 ‘피에로’가 아니라, 3월 토끼의 집에서 그와 함께 정답게 티를 마시는 ‘모자 장수’랍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붉은 천막 위에서 거대한 토끼 한 마리가 떨어졌다.

“아빠!”

쿠웅! 자욱하게 이는 먼지 사이로 윤사해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망할!

멍하니 구경하고 있을 게 아니라, 윤사해에게 ‘너는 많이 좋고 나는 그냥 좋고’라도 걸어 주는 건데!

“아저씨, 뭐하는 거예요! 아빠가 위험하잖아요!”

〖위험하다고? 네 아비가?〗

랑야가 재미난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턱을 까닥거렸다.

〖네 아비가 저딴 토끼에게 깔아뭉개질 정도였으면, ‘우리’가 계약을 맺었겠느냐?〗

랑야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 함께 자욱하게 일었던 먼지가 순식간에 걷혔다.

“재주는 이게 끝인가?”

후웅, 일어난 바람결에 피 냄새가 실려 왔다.

윤사해의 것은 아니었다.

“어디, 이번에도 도망쳐 보게나. 나는 자네 말고 쫓을 사람이 이제 없거든.”

붉은 천막 위에서 나타났던 거대 토끼의 살점이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윤사해가 자신이 처치한 마수가 만들어낸 피 웅덩이를 가볍게 밟으며 말을 이었다.

“나를 따르는 망할 녀석들이 재주 한 번은 좋은지라, 도망치기가 쉽지 않을 테지만.”

“윤사해……!”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지껄이지 말아 줬으면 하는군.”

윤사해는 단번에 모자 장수의 앞에 당도하여 그의 어깻죽지에 창을 찔러 넣었다.

그러곤 이를 휘둘러서 모자 장수의 한쪽 팔을 뜯어내 버렸다.

7세 아동이 보기에는 잔인한 장면이지만, 정신 연령은 그렇지 않으니 봐도 괜찮겠지?

〖윤사해의 첫째 아드님, 네 여동생의 눈 좀 가려 주지 그래?〗

괜찮지 않나 보다.

윤리오가 황급히 내 눈을 가렸다. 눈가를 가린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떨림 위로 윤사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0년 전의 빚을 제대로 갚아 줘야겠지. 우리 아이들이 고통 받았던 만큼. 아니, 그 몇 배로.”

분노가 실린 윤사해의 목소리와 함께 모자 장수의 비명이 이어졌다.

〖애들 듣기에 좋지 않은 소리인 것 같은데.〗

‘같은데’가 아니라, 듣기 좋지 않은 소리 맞거든요?!

랑야에게 한 소리를 하려는데, 차분하게 가라앉은 윤사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만 묻지.”

“끄윽……!”

“서차윤을 기억하나?”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윤리오의 손에서 느껴지던 떨림이 멈췄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윤리오가 크게 동요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윤리오의 손등 위를 내 손으로 덮으며 그를 토닥거려주었다.

그 사이, 괴로움에 찬 신음을 흘려대던 모자 장수가 답했다.

“기억하죠, 기억하고말고요.”

답하는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리오 군과 리오 군의 동생분을 제게 선물해 주신 아주 감사한 분을 제가 어떻게 잊겠습니까?”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뺨을 있는 힘껏 쳐 버리고 싶은 말이었다.

“그 자식은.”

“제게 먼저 찾아오셨지요.”

모자 장수가 윤사해의 말을 끊고서 그를 비아냥거렸다.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 주고 싶으시다면서, 용케도 저를 찾아오셨더군요.”

모자 장수가 주인으로 있는 ‘서커스’가 어떤 곳인지를 알면서도 말이다.

윤사해의 목소리는 한참 후에야 들려왔다.

“……묻지도 않은 것을 떠들어 줘서 고맙군.”

“더한 것도 말해 드릴 수 있는데 말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리오 군을…….”

살점이 뜯기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모자 장수의 목소리 끝을 채웠다.

곧이어 모자 장수는 짐승이 우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끔찍하군.〗

그렇게 느끼고 계시다면 소리를 차단해 주시거나 하면 안 될까요, 랑야?

다행히도 모자 장수의 비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의 숨이 끊어지기 무섭게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조용히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윤리오의 손을 내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핏물이 가득한 대리석 바닥이었다.

〖적당히 좀 하지.〗

“적당히 한 거라네.”

그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온몸이 붉게 젖은 윤사해였다.

윤사해는 나와 윤리오를 말없이 쳐다보고는 뭔가를 달랑 손에 들었다.

윤사해가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모자 장수의…….

〖그새 악취미가 생겼군.〗

“시끄럽네, 랑야.”

윤사해가 걸음을 내딛기 무섭게 붉은 천막이 걷히기 시작했다. 서커스의 천막이 걷히자 보인 것은 맑게 갠 하늘이었다.

먹구름이 가시고, 비가 그친 맑은 하늘. 그 하늘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윤사해는 그런 사람들 앞에 모자 장수의 머리통을 던져 주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교장을 좀 불러 줬으면 하는데.”

윤사해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째질 듯한 비명과 함께 소란이 일어나는 건 금방이었다.

〖얼씨구, 난리도 아니구만.〗

랑야의 말에 윤리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윤사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윤사해가 모자 장수를 저렇게 도륙한 이유가 뭘까? 그걸 굳이 사람들 앞에 내보인 건?

의문은 쉽게 해소됐다.

우리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세상에게 보여 주려는 거겠지.

정확히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짓거리들을 펼치고 있는 지하 길드의 망할 인간들에게.

“윤리오, 윤리사!”

그때 윤리타가 인산인해를 뚫고 들어왔다.

윤리타는 엉망인 우리를 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나와 윤리오를 와락 끌어안았다.

윤리타의 뒤를 따라온 저세상은 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윤리사! 갑자기 사라지면 어떻게 해! 백도윤이랑 나랑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미, 미안?”

다그치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사과하고 말았다.

내 사과에 저세상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가 윤사해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저씨……?”

놀란 목소리에 우리를 살피던 윤리타가 고개를 돌렸다.

“아빠!”

인파를 뚫고 오느라 윤사해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었나 보다.

윤리타가 피에 푹 젖은 윤사해를 보고선 희게 질린 얼굴로 그에게 달려오려고 했다.

“오지 마렴, 리타.”

그런 그를 윤사해가 제지했다.

“보다시피 안 좋은 것이 꽤 많이 묻어 있어서.”

“상관없어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윤리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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