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폭풍우 치는 날에(1)
후두둑-!
금방 그칠 줄 알았던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강풍까지 휘몰아치니.
“야! 그냥 장사 접자!”
“아씨, 축제날을 왜 이런 날로 잡은 거야!”
“이럴 줄 몰랐겠지!”
떠들썩했던 축제가 난장판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아, 알려 드립니다.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축제를 잠시 중단하오니 학교 내 방문객들은…….
체육관으로 이동해 달라는 방송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체육관으로 이동해야하지 않을까?”
“리타가 리오 데리고 온다고 했으니, 여기서 기다려야지.”
“리오 말고도 한 명 더 데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니, 사해야?”
윤사해가 그 ‘한 명’은 관심 밖이라는 얼굴을 보였다. 백시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휴대폰을 들었다.
“날씨가 계속 안 좋아지네. 이러다 호우주의보 내리는 거 아니야?”
“그냥 축제 취소되라고 고사 지내지 그래.”
윤사해의 말에 도윤이가 울상을 지었다.
“축제 취소되는 거 싫은데.”
백시준이 그런 도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휴대폰의 화면을 누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해야.”
백시준이 살짝 굳은 얼굴로 윤사해에게 물었다.
“혹시 휴대폰 터지니? 권외 밖의 지역이라는데.”
윤사해가 황급히 휴대폰을 들었다가 이내 험상궂은 얼굴로 욕설을 지껄였다.
“망할.”
아무래도 서커스가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윤사해의 얼굴이 점점 험악해지자 백시준이 나와 저세상의 어깨를 감싸고선 말했다.
“애들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와.”
누구한테 다녀오라는 건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도 말했다.
“세상이 오빠는 리사가 지키고 있을게, 아빠!”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 거야?”
저세상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봤지만 무시다.
그래도 내 말에 윤사해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는 그대로 나와 저세상을 한 번씩 꼭 끌어안고는 백시준에게 말했다.
“부탁한다.”
“응.”
백시준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윤사해의 아래에서 그림자가 솟구쳐 올라와 그를 집어삼켰다.
“아저씨! 아빠가 사라졌어!”
“그러게,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네. 멀미 한다고 그림자로 이동하는 거 싫어하는데.”
백시준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
그러고는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고 있는 하늘을 쳐다보는데, 마치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경계까지 가 봐야겠네.”
백시준이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 가까이에 있던 오빠 한 명을 불렀다.
“저기, 학생? 애들 좀 잠깐 맡겨도 될까요?”
백시준의 상냥한 목소리에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그런 것 같았다.
그 고갯짓에 백시준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이면 돼요. 잘 부탁할게요.”
“아빠, 어디 가려고?”
“잠깐 일하고 올게, 도윤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백시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무릎을 굽혀 저세상과 시선을 맞추었다.
“세상아, 네가 동생들 잘 데리고 있어야 해.”
“네, 아저씨.”
대답 한 번 잘하는 저세상이었다.
백시준은 저세상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에 곧장 빗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휴대폰의 통신이 먹통이 된 것을 해결하러 가려는 모양새였다.
“누구 전화 되는 사람 있어? 밖에 재료 사러 나간 애들은 왜 이렇게 안 돌아오는 거야?”
“비 때문에 못 움직이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야, 걔네 우산 챙겼는데.”
“바람이 심해서 못 움직이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어쩌면, 그것보다 더한 것을 해결하러 가는 걸 수도 있겠다.
통신이 먹통이 된 것뿐만 아니라, 학교 안이 바깥과 차단된 걸까?
나는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일곱 살 몸뚱이로 이 상황이 타개되기를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것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조막만한 두 손을 주먹 쥐는 순간.
“어……?”
어깨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시야가 흔들렸다.
***
인적이 드문 구교사.
“끅… 으……!”
청해진은 제 목을 짓누르고 있는 발에 이를 으득 깨물고선 힘겹게 손을 움직였다.
후웅-!
칼날과도 같은 바람이 청해진의 목을 짓밟고 있던 발을 노렸다.
“우왓, 위험해라!”
청해진의 목을 으스러뜨릴 듯이 짓밟고 있던 남자가 가볍게 이를 피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꼴에 청 가문이라고 바람을 움직인 거야?”
“바람이 아니라 대기를 움직인 거야, 빌어먹을 새끼야.”
청해진이 잔기침을 토해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윤리오는 어디로 보냈어!”
강풍이 몰아치고 난 뒤에 윤리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윤리오를 대신하여 남아 있는 건,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 집어 던졌던 피에로 인형뿐이었다.
악에 받친 소리에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형이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몰라. 팔자 좋게 상황을 구경 중일 선비 놈에게 물어보던가.”
“선비?”
의문을 표하기 무섭게 몸이 뒤로 쏠렸다. 쏠린 몸이 벽에 부딪치는 건 순식간이었다.
“커헉……!”
머리를 둔탁하게 울리는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목이 강하게 틀어 잡혔다.
청해진이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로 제 목을 틀어잡은 손목을 손톱으로 긁어대기 시작했다.
잡힌 목에 숨이 점점 조여드는 것이, 이러다 곧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왜 누군지도 모르는 새끼한테 죽어야 하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새끼.
유랑단의 아홉 탈 중 하나, 초랭이가 즐겁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대로 바람을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 네 몸이 갈가리 찢기지 않을까, 형?”
듣기만 해도 섬뜩한 말이었으나 청해진은 반응할 수 없었다. 조이는 숨에 시야가 흐릿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숨이 넘어가기 직전.
콰과광-!
돌풍이 일어나 초랭이를 덮쳤다.
“콜록, 큭, 허억!”
숨통이 트이자 청해진은 그대로 격하게 기침을 터트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진짜로 죽을 뻔했다.
청해진이 가쁜 숨을 내쉬며, 바람을 일으킨 자를 찾으려 할 때였다.
“왜 이렇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나 했는데.”
살짝 낮은 톤의 목소리가 분노를 실은 채 이어졌다.
“가문의 보물이 왜 엄한 새끼한테 가 있는 걸까?”
“누나……!”
“청해진, 너.”
청해솔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고선, 어깨에 묻은 것들을 툭툭 털어내고 있는 초랭이에게 물었다.
“네가 그랬지?”
“알면서 묻네.”
초랭이가 긍정하기 무섭게 청해솔은 가볍게 손을 휘둘러 대기를 움직였다.
칼날과도 같은 바람이 의지를 가진 것처럼 초랭이의 목을 집요하게 노려댔다.
초랭이가 즐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우와! 누나, 혹시 가주 후보자야? 청(淸)의 힘을 이렇게 잘 다루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데.”
“내가 누구인지는 알 것 없고.”
청해솔 주변의 온도가 삽시간에 내려갔다.
그녀는 얼어붙은 대기에서 창을 만들어내 이를 손에 쥐고선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죽어.”
청해솔이 자리를 박차고는 초랭이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초랭이가 이를 가까스로 피해내고는 쥐고 있던 부채를 휘둘렀다.
후웅, 일어난 바람이 창을 쥔 청해솔의 손짓 한 번에 흐트러졌다.
흐트러진 공기가 이내 청해솔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이 선 듯한 공기의 움직임에 낡은 교실의 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초랭이가 깨진 창문 중 하나를 넘어 바깥으로 몸을 움직였다. 이에 질세라, 청해솔 역시 창을 쥐고서 그의 뒤를 따르고자 했다.
류화홍이 그 모습을 보고 부르짖었다.
“해솔아!”
“청해진 좀 부탁할게, 류화홍.”
청해솔은 뒤늦게 따라온 류화홍에게 동생을 넘기고는 창문 밖으로 가볍게 넘어갔다.
류화홍은 기겁하고 말았다.
“내가 미쳐! 저러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우스운 걱정이었다. 청해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벽에 몸을 기대고서 숨을 내쉬었다.
“해진아, 괜찮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도 몰라. 웬 미친 새끼한테 죽을 뻔했어.”
청해진이 몇 번 기침을 터트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보다 형이 우리 누나 데리고 온 거야? 타이밍 한 번 멋지네.”
“나도 몰라. 모르는 사이에 해솔이랑 같이 축제 구경하고 있었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류화홍이 설명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멋쩍게 뺨을 긁적일 때였다.
쿠구궁-!
건물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울리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일단 자리부터 피하고 보자!”
류화홍은 청해진이 어떻게 할 새도 없이 그의 목덜미를 잡고서 순식간에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
와르르, 반쯤 무너진 낡은 건물에 청해솔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류화홍이 데리고 잘 피했겠지.’
그러지 않았으면, 눈앞의 새끼를 족친 후에 류화홍을 족칠 거다.
청해솔이 그런 생각을 하며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 그녀 눈앞의 초랭이가 촐싹거렸다.
“이거 곤란하네. 내 사전에 ‘실패’라는 단어는 없어서.”
“내 동생을 죽여야겠다고?”
“누나, 보기보다 똑똑한 사람이구나? 알아들었으면 좀 꺼져 줄래?”
“그건 안 되겠는데.”
청해솔이 그렇게 말하고는 허공을 박차 초랭이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초랭이가 쥐고 있던 부채로 바람을 강하게 불러일으키고는 웃었다.
“하하, 누나. 집착하는 여자는 인기가 없어요.”
“미안한데 너 같은 남자도 인기가 없거든.”
끝이 뾰족하게 선 창이 초랭이의 어깻죽지를 노리며 들어왔다. 초랭이는 이를 가볍게 피하고선 얼굴을 찌푸렸다.
손에 쥐고 있는 거주자의 부산물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가의 가주가 아닌 이상, 사용에 한계를 두는 용왕의 부채.
옥색의 빛깔이 점점 바래는 것을 보며 초랭이가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이대로 싸움을 계속 이어갈 수도 있지만…….
“아쉽지만, 누나. 우리 이제 헤어질 시간이야.”
초랭이가 쥐고 있던 부채를 소리 나게 접고선 눈웃음을 지었다. 청록색 눈이 둥글게 접히는 모습에 청해솔이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 마음대로.”
“당연히 내 마음대로지, 누나.”
어느새 초랭이의 손에는 부채 대신, 이마가 툭 튀어나와 있는 탈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초랭이는 이를 그대로 제 얼굴에 덮어쓰고는 히죽거렸다.
“아쉽네, 오가는 길에 인사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제 내 얼굴 기억 못할 거 아니야.”
그 말대로, 청해솔의 기억 속에서 초랭이의 앳된 얼굴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망할 탈쟁이였군.’
청해솔이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안 잊어.”
그러고는 한 걸음 내딛으며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지옥까지 따라가서 죽여 버릴 거거든, 너를.”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가 청해솔의 주변으로만 정체되었다.
정체된 빗줄기가 끝을 뾰족하게 하고서는 초랭이에게로 향했다.
청해솔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고선, 모습을 감추려는 그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입춘 지난 날에, 당신께 청(淸)하리다.>
끝을 뾰족하게 한 것들이 초랭이를 향해 수를 셀 수 없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