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폭풍전야(5)
“사해가 전화를 안 받네.”
백시준이 폰을 끄고는 나와 도윤이가 사이좋게 앉아 있는 벤치로 다가왔다.
“리사, 어디서 사해를 놓쳤니?”
“아빠가 리사를 놓친 건데요.”
백시준이 내 말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모습이 참 흐뭇한 백시준이었다.
도윤아, 빨리 커. 어서 네 아빠처럼 참한 어른이 되란 말이야!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윤이는 백시준이 사 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날름거릴 뿐이었다.
물론, 나 역시 백시준이 사 준 딸기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먹어댔다.
“아빠! 다 먹었어!”
“우리 도윤이, 벌써 먹었어?”
“응!”
“빨리도 먹네.”
백시준이 물티슈를 꺼내 도윤이의 입가를 닦았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의 막대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백시준은 내 입가도 물티슈로 닦아 주며 말했다.
“그래도 리사 씩씩하네? 아빠 잃어버렸는데 울지도 않고.”
“리사가 아빠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아빠가 리사를 잃어버린 거니까요! 그러니까 울지 않아요!”
잃어버린 사람이 울어야지.
하지만 나는 몰랐다.
윤사해가 진짜로 울고 있을 줄은.
***
백시준은 윤사해에게 몇 번을 더 연락한 끝에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럼, 우리가 교문 근처로 갈게. 거기서 보자.”
-우리 애는……!
“괜찮아, 울지도 않고 씩씩하게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그렇게 백시준의 손을 잡고 다다른 교문.
“윤리사……!”
교문 근처에 서 있던 윤사해가 나를 발견하기 무섭게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나도 모르게 백시준의 뒤로 주춤거리며 몸을 숨기고 말았다,
백시준이 그런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는 말했다.
“사해야, 리사도 많이 놀랐어.”
백시준, 나이스.
아저씨의 말에 윤사해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마음을 진정하려는 듯, 여러 번 심호흡을 하고는 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아가, 이리 오렴.”
오라는데 가야죠!
나는 윤사해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 품에 꼬옥 안겼다.
“아빠, 미안해.”
사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윤사해가 내 뺨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아빠도 미안하단다. 아빠가 리사를 놓치면 안 됐었는데, 많이 무서웠지?”
무섭지는 않았지만 그랬다고 해야겠지. 나는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괜찮단다, 아가.”
윤사해가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황급히 닦아 주고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데, 서커스고 뭐고 꿈나라에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밀려오는 노곤함에 두 눈을 끔뻑일 때에 반가운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윤리사,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리타 오빠!”
나를 잃어버렸던 동안에, 윤사해는 윤리타와 만났었나 보다.
윤리타가 한 손으로는 저세상의 손을 꼭 쥔 채 잔소리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혼자서 돌아다니고! 무섭지도 않지, 윤리사?”
“응! 안 무서워!”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는 윤리타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윤리타가 윤사해에게서 나를 받아 안고선 백시준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시준이 아저씨,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래도 리타야, 네가 네 아빠보다 낫구나?”
“네?”
윤리타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백시준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백시준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아빠는 네 하나뿐인 여동생을 돌봐 준 친구한테 고맙다고도 안 하는데.”
백시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윤사해가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고맙기는 한 건지, 목소리를 쥐어짜내서 백시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맙다, 망할.”
뒤에 욕설 비슷한 게 붙기는 했지만 말이다.
백시준이 윤사해의 감사 인사에 즐겁다는 듯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망할이라니! 사해야, 애들이 듣고 배우면 어쩌려고.”
그러면서도 큭큭거리면서 웃는데, 굉장히 즐거운 것 같았다.
반면에 윤사해는 당장에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만 같은 얼굴이었고.
백시준도 윤사해의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웃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그럼, 애들이랑 즐거운 시간 보내. 나는 우리 아들이랑…….”
“나는 리사랑 놀고 싶은데?”
도윤이가 백시준의 말을 끊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리사는 나랑 놀기 싫어?”
도윤아, 우리 아빠 얼굴 좀 봐봐.
윤사해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윤리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윤이가 윤씨네의 험악한 표정들을 보고선 어깨를 움츠렸다.
이거 잘못하면 자라나는 새싹을 울릴 것 같다.
나는 윤리타의 품에서 내려와 도윤이의 손을 꼭 잡았다.
“리사도 도윤이랑 놀고 싶어! 도윤이한테 세상이 오빠도 소개해 준다고 했었단 말이야!”
내 말에 얌전히 있던 저세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용히 있던 자신을 대화에 왜 끌어들이느냐는 얼굴이었다.
저세상의 의사 따윈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니니 무시하고.
나는 윤사해와 윤리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안 돼?”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준 사람은 백시준이었다.
“리사가 우리 도윤이를 이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백시준은 윤사해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말했다.
“그럼, 오늘 하루는 같이 움직일까? 세상이랑 도윤이도 서로 친해지는 시간도 가지고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사해야?”
윤사해가 표정으로 욕하고 있다.
하지만 저세상에게 비슷한 또래 친구를 한 명 더 만들어 주고 싶기는 한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시준이 아저씨가 방긋 웃었다.
“도윤아, 세상이한테 인사할까? 세상이가 도윤이보다 두 살 형이라고 했으니까…….”
“안녕, 세상아!”
“내가 너보다 형이야.”
저세상은 왜인지 도윤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쨌든 백시준과 함께 움직이게 됐다니 다행이었다.
서커스와 관련하여 일이 벌어진다면, 전력이 하나 추가되는 셈이니까 말이지.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다고 하나, 자고로 폭풍우 치기 전의 밤은 고요한 법이다.
이 고요함이 어떻게 깨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
당장, 초랭이가 청해진을 노리기 위해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다.
“청해솔이 그 새끼는 알아서 잘 족쳐 주겠지.”
그러라고 류화홍에게 스킬을 걸었다. 청해솔을 ‘어떻게든’ 비나리 고등학교로 데리고 오라고.
구체적인 방법은 정해 주지 않았지만, 류화홍이 알아서 잘해 줬을 거라고 믿는다.
진짜 믿을게, 화홍이 오빠.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서 심각해질 때였다.
툭, 투둑.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백시준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날이 좀 흐리다 싶었더니, 결국 이렇게 비가 오네.”
“그래도 금방 그칠 것 같아요! 애들 데리고 학교 안에서 피하고 계시는 게 어때요?”
“리타야, 너는?”
윤사해의 물음에 윤리타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윤리오랑 청해진 좀 찾아서 올게요! 청해진이 지금 윤리오랑 같이 구교사에 있다고 했거든요!”
아들의 이름에 윤사해가 몸을 작게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윤리타도 그 작은 몸짓을 본 모양인지, 웃으면서 말했다.
“걔도 아빠 보면 좋아할 거예요. 그럼, 다녀올게요!”
“리타야, 잠깐만.”
윤사해가 윤리타를 불러 세우고는 입고 있던 겉옷을 윤리타의 머리 위에 둘러매 줬다.
“빗길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네, 아빠!”
윤사해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게 기쁜지, 윤리타가 활짝 웃고는 곧바로 뛰어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에 나는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청해진과 윤리오가 함께 있다니, 윤리타 혼자 보내도 괜찮을까? 초랭이랑 마주칠 것 같은데.
괜한 기우라고 생각하면서 불안감을 떨쳐내려고 했다.
다행히도 머리 위에서 들리는, 흐뭇한 얼굴을 지닌 두 남정네의 대화에 나의 불안감은 금방 사라졌다.
“리타가 ‘아빠’라고 불러 주는 게 좋나 봐? 원래 저렇게 안 불렀던 것 같은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윤사해가 퉁명스레 말하고는 나와 저세상을 안아 들었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그러고는 백시준을 뒤로하며 학교 안으로 달려갔다.
***
[친구놈2 : 이 형아가 지금 간다! 윤리오 어디 못 가게 데리고 있어! 알겠지?]
청해진이 윤리타가 보낸 메시지에 ‘ㅗ’하나로 답해 줬다.
“윤리오, 네 동생 온다는데?”
“학생회 일은 다 끝났대?”
“몰라, 안 물어봤어.”
윤리오가 그러냐면서 창가에 머리를 기대었다.
“뭘 그렇게 봐?”
“밖에 비 오는 거.”
“밖에 비 와?”
청해진이 뒤늦게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 때문에 돌아갈 때 비 맞으면서 가겠네.”
짜증 섞인 목소리에 윤리오가 코웃음을 쳤다.
남해 용왕의 후손들.
청가의 자제들은 <[특수 스킬: 청(淸)하리다>를 통해, 물과 대기를 다루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퍽이나 비 맞으면서 돌아가겠다.”
윤리오가 청해진을 빈정거리고는 다시 창밖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우당탕-!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에 청해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뭔데?! 왜 그러는 건데, 갑자기!”
청해진의 호들갑에도 윤리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깥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똑똑, 실례합니다~!”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교실의 낡은 문이 열렸다.
익숙지 않은 목소리에도 청해진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방문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윤리타, 벌써 왔어?”
그러나 낯선 방문자는 윤리타가 아니었다.
“에구, 갑자기 비가 오고 난리람.”
작은 키를 가진 남자가 진분홍색 머리칼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는 윤리오와 윤리타에게 인사했다.
“안녕! 잠깐 실례해도 되지, 형들?”
그 누구도 답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제멋대로 교실 안으로 들어와서는 윤리오에게 뭔가를 던져 줬다.
“이건 선물. 형한테 전해 주래.”
윤리오가 던져진 것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가 이를 곧장 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허, 윽……!”
입이 찢어지라 웃고 있는 피에로 인형을 보자, 윤리오가 호흡하기 버거운 듯 목 언저리를 끌어 잡았다.
청해진이 그런 윤리오의 앞을 막아서고는 낯선 방문객을 향해 날선 경계심을 드러냈다.
“너 뭐야.”
“나?”
남자는 청해진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휘둘렀다.
“청(淸)하리다.”
공기를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것을 신호로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