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폭풍전야(1)
어쩌면 좋지?
윤사해라면 서커스가 축제 기간을 이용해 움직이리라는 사실을 진작 알아차렸을 거다.
하지만.
‘비나리 고등학교의 축제는 어떻게든 열릴 거야.’
막을 수 없을 거다.
저세상도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알아본 게 있으니 그렇게 말한 거겠지.
그렇다고 윤리오와 윤리타를 축제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다?
윤리타라면 몰라도 윤리오는 윤사해와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될 것 같았다.
‘지금’의 윤리오는, 윤리타보다 윤사해의 ‘인정’을 더욱 더 받고 싶어하는 것 같았으니까.
또한 쌍둥이가 축제에 참석하지 않을 시 어떤 나비 효과를 불러올지 몰랐다.
그러니까 결국.
“답이 없어, 시바.”
조그맣게 내뱉은 목소리를 저세상이 들었나 보다.
“리타 형, 화홍이 형. 조금 전에 들었어요? 윤리사가 시…….”
빠악!
나는 저세상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때려 버렸다.
“아야!”
앓는 목소리에 윤리타가 화들짝 놀라 나를 다그쳤다.
“윤리사! 세상이는 갑자기 왜 때려! 오빠한테 그러면 돼, 안 돼?!”
“벌레가 있어서 그랬어.”
그리고 돼.
뒷말을 삼키고는 보란 듯이 손바닥을 털어내는데, 띵똥―하고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리사가 나가 볼게!”
“윤리사, 잠깐만……!”
윤리타가 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내가 현관문을 여는 게 한 발자국 더 빨랐다.
“리사! 문을 그렇게 벌컥 열어 주면 어떻게 해?! 모르는 사람이면 어쩌려고!”
앗, 실수.
나는 윤리타를 향해 배시시 웃어 주고는 찾아온 사람을 쳐다봤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바다를 닮은 푸른 눈.
그와 똑같은 색의 머리칼을 지닌 여자가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살짝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네 오빠 말대로 사람이 왔다고 그렇게 문 열어 주면 안 돼. 알았지?”
여자의 타이르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는 쉽게 예상이 갔다.
내 예상을 뒷받침해 주듯 윤리타가 그녀에게 물었다.
“해솔이 누나,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이 멍청이가 너랑 리오를 하도 걱정해서 데리고 왔어.”
역시나.
청해진의 누나이자, 『각성, 그 후』에서 ‘나태한 용왕’으로 이름을 떨쳤던 청해솔이었다.
청해솔은 그렇게 말하고는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로 누군가를 우리 앞에 내세웠다.
“끕… 야아, 윤리오는, 흡, 흐욱…….”
“멍청아, 그만 울고 리타한테 똑바로 물어봐.”
“흐어어엉! 리오는 괜찮냐아아!”
멍청이, 청해진이 울음을 터트리며 윤리타에게 안겨들었다.
“어? 어어? 누나, 얘 왜 이래요?”
얼떨결에 청해진과 포옹을 하게 된 윤리타가 크게 당황한 얼굴로 청해솔에게 물었다.
“왜기는.”
청해솔이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는 말했다.
“리오가 오늘 학교에서 쓰러졌었다며? 그거 때문에 오늘 하루 종일 저랬어.”
“내가 언제! 끄흐, 흡, 언제 하루 종일 이랬다고!”
“눈물이랑 콧물이나 닦고 나서 말해. 더러워 죽겠네.”
청해진이 황급히 눈물과 콧물을 닦아냈다.
“야! 청해진!”
윤리타의 옷에 말이다.
윤리타가 기겁하며 청해진을 떼어내는 순간, 안쪽에서 류화홍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해솔이 왔어? 해솔이 목소리 들리는데.”
청해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타, 여기 류화홍도 있니?”
“네, 누나.”
“잠깐 실례할게.”
청해솔은 그대로 신을 벗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야, 류화홍.”
“헐! 진짜 해솔이잖아? 뭐야, 무슨 일로 왔어?”
“저 멍청이 때문에 왔지.”
청해솔이 청해진을 가리키고는 류화홍에게 물었다.
“그보다 너는 무슨 일로 여기에 있는 거래? 길드 일 때문에 공결한다더니, 애들이랑 잘만 놀고 있었네.”
“놀고 있었던 거 아니야! 열심히 일 하고 있었거든?! 장렬하게 실패했지만!”
자랑인 건가 싶었다.
그보다 뭐지? 류화홍이랑 청해솔, 둘이 아는 사이인 건가?
나는 몇 번이나 청해진을 밀어내고 있는 윤리타를 뒤로하며 청해솔에게 다가갔다.
“언니, 화홍이 오빠 아세요?”
청해솔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잘 몰라.”
청해솔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보람도 없이, 류화홍이 해맑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친구예요, 친구!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죠! 서로 둘도 없는 친구랍니다!”
“지랄하지 말아 줄래?”
청해솔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류화홍의 팔을 쳐냈다.
저러는 걸 보니 청해솔과 류화홍은 서로 둘도 없는 친구가 맞나 보다.
청해솔에게 친구는 아래아의 길드장인 ‘최설윤’의 조카, ‘최화백’ 그 혼자뿐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저세상도 이를 알고 있었을까 싶어 힐끔 살폈더니, 몰랐던 눈치인 것 같다.
윤리타와 청해진 사이에 끼어서는 놀란 눈으로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하긴, 『각성, 그 후』에서 ‘류화홍’은 청해진과 마찬가지로 이름 한 번 등장한 적이 없는 인물이니…….
‘나중에 스킬 써 봐야겠다.’
저 오빠한테는 어떤 비밀 설정이 숨겨져 있을지 몰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모두에게 스킬을 써 볼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데, 류화홍과 청해솔이 학교 축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번 ‘선후배 교류전’에 참석해? 아직 연락 안 돌렸으려나?”
“그거 안 열린다던데. 그보다 리오는 어디 있어?”
청해솔의 질문에 내가 답해 줬다.
“리오 오빠는 저쪽 방에서 자고 있어요.”
“그래?”
청해솔이 내 머리 위를 쓰다듬어 주며 류화홍에게 물었다.
“리오는 괜찮아?”
“응, 괜찮아. 아무 이상 없대.”
“청해진, 들었지? 리오 괜찮다고 하네. 그러니까 이만 가자.”
그러나 청해진은 싫다는 듯이 윤리타를 꽉 끌어안고는 소리 질렀다.
“싫어! 윤리오 깨어날 때까지 윤리타랑 있을 거야!”
“야! 윤리오 깨!”
곧바로 윤리타한테 딱밤을 한 대 얻어맞았지만 말이다. 청해솔이 그 모습에 짧게 혀를 차고는 류화홍에게 말했다.
“저 멍청이 잘 부탁할게.”
“이 집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서.”
“아저씨한테 알아서 잘 말해 달라는 뜻이야.”
청해솔은 그렇게 말하고는 집을 나가 버렸다.
마지막으로 청해진의 머리를 한 대 때리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달칵, 닫히는 문에 류화홍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
“어휴,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 같아. 그렇지 않아요, 아가씨?”
“리사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류화홍을 향해 방긋 웃어 주고는 닫힌 현관문을 빤히 보았다.
청해솔.
『각성, 그 후』에서는 ‘나태한 용왕’이라고 불렸던, 남해 청(淸)가를 이끌었던 가주.
잘 만하면 이번 축제의 일에 그녀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뭔가 이용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청해진도 연관이 있는 일이니까.’
그러니 그녀는 움직일 거다.
축제를 물리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고 윤리오와 윤리타가 축제에 참석하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막을 방법이야 다양하게 있지만.
‘어떤 후폭풍이 일어날지 모르니.’
그러니, 주어진 패를 이용하여 이번 사건을 무마시킬 거다.
이를 위해, 먼저 활용할 스킬은 ‘내 말이나 들어라!’로, 적용할 대상은…….
나는 류화홍을 뚫어지게 보았다.
“응? 아가씨, 제게 할 말이라도 있으셔요?”
미안, 화홍이 오빠.
나중에 뺨을 여러 대 맞아야할 것 같아. 물론, 개인적인 감정은 없을 거야. 아마도.
***
시간의 흐름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없는 공간.
하늘조차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가 가볍게 바닥을 디뎠다.
수십 개의 청사초롱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그가 손아귀에 쥔 것이 보였다.
“웬 피에로 인형? 그거 모자 장수 씨가 들고 다니던 거 아닌가요?”
반기는 목소리에 선비가 답했다.
“맞습니다. 모자 장수가 지금 어디에 계신지 아십니까, 이매?”
“탄생목 쪽에 있을 걸?”
답해 준 사람은 이매가 아니었다.
이매의 가까이에 웨이브진 검은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올린 여자가 보였다.
얼굴 가득 미소를 그리고 있는 여자가 선비에게 인사했다.
“안녕, 오랜만.”
“오랜만이라니.”
선비가 질색하며 말했다.
“할미, 당신은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보입니까? 사람 불안하게.”
“너는 알 필요 없어.”
그 말에 이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시 말해 줬다.
“새로 발견한 장난감이랑 죽이 잘 맞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장난감이라니.”
할미가 불쾌하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장난감이 아니라 먹잇감이야. 내 숲을 이롭게 해 줄 아주 탐스러운 먹잇감.”
“어련하셔라.”
이매가 눈웃음을 짓고는 선비를 쳐다보았다.
“그래서요? 모자 장수 씨는 왜 찾으시는데요? 잃어버린 물건 돌려주시려고?”
“맞추셨군요.”
선비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렇게 선비가 한 걸음 내딛기 무섭게 하얗게 죽어가는 나무가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그 곁에 남자가 하나 있었다. 원통형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검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남자가.
선비는 그를 향해 들고 있던 피에로 인형을 집어 던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축제가 시작되면 어련히 만날 것을.”
피에로 인형을 가볍게 받아든 남자, 모자 장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안부 인사 같은 거죠.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그때까지 리오 군도 잘 지내고 있어 줬으면 한다는.”
그러고는 뒤늦게 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물론, 리오 군의 동생 분도.”
그에 선비가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짓거리를 하면서 여럿의 미친놈을 만나 봤지만 말입니다.”
“저 같은 녀석은 처음이라고요?”
“잘 아시는군요.”
선비가 탈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곰방대를 입술에 물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윤사해가 당신을 놓쳤을 때, 그대로 죽은 듯이 살았으면 됐을 텐데 말입니다.”
“그게 됐으면 당신들을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안 했겠죠.”
유랑단(流浪團).
이들은 이해득실은 생각하지 않는다. 도움을 바라면, 그에 따라 도와줄 뿐.
도움을 바라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감당은 바란 자가 해야 한다.
그것이 수장의 뜻.
그리고 그 뜻을 악착같이 따르는 것이 그 휘하의 탈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인 선비가 물고 있던 곰방대를 빼들며 모자 장수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유가 뭡니까? 이렇게까지 윤사해의 아들들을 노리는 이유 말입니다.”
이유라.
모자 장수가 입꼬리를 올리고선 두루뭉술한 대답을 선비에게 내놓았다.
“그거 아십니까, 선비 씨? 저는 단 한 번도 제게 온 것을 놓친 적이 없답니다.”
배불리 먹이고, 소화를 시킨다.
그 후 남은 것들은 보기 좋게 꾸며 팔아 버리거나, 제 방에 장식을 해 뒀었다.
하지만 놓쳤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리오랑 리타를 건드려?’
아니, 놓아주었다.
격렬하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제 숨통을 끊어 버릴 듯이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기억에 모자 장수가 이를 으득 깨물었다.
“선비 씨, 당신 말대로 윤사해를 피해 죽은 듯이 살아 보고자 했지만 치욕스럽더군요.”
또한, 잊히지가 않았다.
차려진 음식들에 벌벌 떨며 눈물을 떨어뜨리던 아이의 모습이.
“그래서 노리는 겁니다.”
여러 번 연기를 뱉어내던 선비가 곰방대를 제 입술에서 떼어내고는 말했다.
“암만 생각해도 당신은 미친놈입니다. 죽고 싶어서 미친놈.”
“하하.”
실없는 웃음소리에 선비가 눈가를 찡그렸다.
“저는 학교의 안과 밖을 차단하는 것이 끝입니다.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물론이죠.”
모자 장수의 경쾌한 대답이 들려오자 선비는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어디 가십니까?”
“제가 이번에 맡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서 말이지요. 초랭이 녀석 찾으러 갑니다.”
선비가 설명해 주기에는 입이 아프다는 듯이,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보여 줬다.
청(淸).
봉투의 겉면에 단아하게 쓰인 글자 하나에 모자 장수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를 뒤로하며 선비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이번은 제대로 될는지.”
한태극 의원의 손주들을 납치하는 일이 실패로 끝났으니, 이번 일은 성공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성공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맡은 바, 이번에는 성공을 시켜야 수장을 볼 면목이 서지 않겠는가?
선비는 그렇게 순식간에 죽어가는 하얀 나무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