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좋아지나 했더니(2)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귀수산.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움직이는 미물들의 섬.
바로 그곳이 길드, ‘이매망량’의 터전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언제나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다는 그들의 보금자리.
바로 그곳에 내가 왔다.
“아저씨, 내려 주셔도 돼요.”
빌어먹을 주인공님과 함께.
저세상의 말에 윤사해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많이 불편한가 보구나.”
“그, 그건 아닌데…….”
저세상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윤사해가 무릎을 굽히고는 저세상을 내려 주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된단다, 세상아. 내 눈치를 너무 보지 말아 줬으면 하는구나.”
그 말에 저세상은 더더욱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저세상이 윤사해의 품에서 내려가고자 한 건, 그가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닐 거다.
윤사해는 저세상이 두 손으로 직접 죽였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품에 얌전히 안겨 있을 수 있을까?
염치란 게 있는 주인공님이라서 다행이었다.
나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저세상의 정수리를 노려봤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몰라도, 저세상의 시선은 땅에서 올라올 줄 몰랐다.
마치, 죄인과도 같은 모습.
하지만 윤사해는 저세상이 자신에게 저지른 죄를 모른다.
그리고 평생 모를 거다.
『각성, 그 후』에서의 일이 반복될 일 따윈 없을 테니까.
“세상이 오빠.”
그러니 당당하게 고개 들라면서, 저세상의 머리칼을 끄집어 당기려고 할 때였다.
“왜 그러니, 리사? 세상이 오빠 옆에 서고 싶어서 그러니?”
“응?”
아닌데요, 아버지?
하지만 싫다고 말하기도 전에 두 발이 땅에 닿고 말았다.
망할! 나는 아빠 품에 계속 안겨 있고 싶었는데!
다시 안아 달라 할까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 속을 수십 개의 청사초롱이 밝히고 있었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들이 꼭 도깨비불 같았다.
홀리는 듯한 기분에 멍하니 입을 벌리는데, 윤사해가 짧게 혀를 차고는 말했다.
“오늘은 유난히도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구나. 귀한 손님들이 오는 줄도 모르고 눈치도 없지.”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소리였으나, 윤사해는 그대로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따악-!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안개가 순식간에 걷혔다.
정확히는, 이매망량의 대저택.
그 주변으로만 말이다.
걷힌 안개 속에서 드러난 저택은 대(大)라는 말이 붙은 게 이해가 갈 정도로 웅장한 규모였다.
“우와……!”
이매망량을 처음 방문한 사람은 자신을 반기는 웅장함에 저도 모르게 기가 죽는다더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사극 드라마 하나를 여기서 그냥 찍어도 될 것 같은데 말이지.
“신기하니, 리사?”
“응!”
나와는 달리, 저세상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신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추억에 잠긴 듯, 젖은 눈으로 이매망량의 대저택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도 잠시뿐.
저세상은 이 저택을 볼 자격은 자신에게 없다는 듯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우리 주인공님, 회귀자인 거 너무 티내는 거 아니야?
“세상이 오빠.”
슬그머니 저세상에게 다가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우리 아빠가 기껏 데리고 왔는데 그런 얼굴 할 거야?”
윤사해는 듣지 못할 아주 작은 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저세상이 내가 팔꿈치로 찔렀던 곳을 문지르며 입술을 씰룩였다.
“너는 표정 좀 숨기지? 아주 좋아 죽겠다는 얼굴인데.”
헐, 어떻게 알았지?
나는 저세상을 향해 씨익 웃어 주고는, 놀란 얼굴로 손뼉을 쳤다.
“우와! 세상이 오빠, 대단해! 리사가 그런 기분인 거 어떻게 알았어?!”
저세상이 질겁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둘이 사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구나. 앞으로도 계속 친하게 지내렴.”
하지만 윤사해가 흐뭇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대로 손톱 끝을 뜯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저씨.”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물론, 나도 저세상과 친하게 지낼 생각 따윈 없었다.
하지만.
“응! 리사도 세상이 오빠랑 앞으로 안 싸우고 친하게 지낼게!”
아버님께서 그걸 원하신다면 쇤네 기꺼이 들어 드리겠습니다.
다만, ‘들어만’ 줄게요.
윤사해가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저세상의 발목을 툭툭 건드리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저…… 길드장님?”
허름하게 옷을 갖춰 입고 있는 이매망량의 길드원이었다.
“제가 보고 있는 게 헛것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뭐 하나 여쭈어도 될는지.”
윤사해가 뭐든 물어보라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의 고갯짓에 아저씨가 사람 좋아 보이게 웃으며 물었다.
“길드장님의 왼손을 꼭 잡고 계시는, 하늘이 빚어 내리신 것만 같은 아가씨의 존함이 ‘윤리사’가 맞을는지요?”
오, 아저씨 뭘 좀 아시는데?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고 미소를 짓는데, 저세상이 옆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푸흡.”
저 새끼가?
이 와중에 윤사해는 당연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네만.”
“아, 그렇군요.”
아저씨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이번에는 윤사해의 오른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길드장님의 오른손을 꼭 잡고 계시는, 야무지게 생긴 도련님의 존함은 ‘저세상’이 맞는지요?”
저세상이 야무지게 생겼다니!
저 아저씨 안과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안과가 아니라, 이매망량 소속의 힐러인 광혜원 언니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윤사해는 다르게 생각한 것 같았지만.
“맞네만.”
“아, 정답이었군요.”
윤사해의 고갯짓에 아저씨가 뿌듯하게 웃더니.
“아가씨, 도련님! 여기 가져가고 싶은 것을 고르십시오! 뭘 원하십니까? 초록 지폐, 황금 지폐, 원하는 건 뭐든 가져가십시오!”
돈다발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아주 가져가라는 듯이 말이다.
뭐야, 저거 어디서 꺼낸 건데?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멍하니 두 눈만 끔뻑이는데 누군가 아저씨의 뒤통수를 때렸다.
“야이, 멍청아! 요새 애들은 그런 종이 쪼가리 따위에 관심 없어!”
아닌데, 관심 많은데.
저세상이 황급히 손을 거두는 게 보였다.
아저씨의 뒤통수를 때린 또 다른 아저씨가 웃으며 우리에게 뭔가를 건넸다.
“아가씨, 도련님. 짜잔, 여기 CW에서 창립 30주년으로 내놓은 한정판 게임기가 있답니다.”
그렇게 또 다른 아저씨가 우리에게 내민 것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플레이스테이션 기기였다.
저건 또 어디서 꺼낸 거야?
“플미 붙여서 팔면 정상가의 몇 배로 되팔 수 있는 아주 귀한 물건이랍니다?”
“플미……?”
저세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윤사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윤사해의 발끝에서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우왁! 길드장님!”
“너무하십니다, 길드장님! 저렇게 귀여우신 분들을 혼자서 독차지하시려고!”
“그러고도 사람입니까!”
윤사해의 그림자가 우리를 향해 모여 들었던 길드원들을 한데 묶어 버렸다.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듯, 윤사해는 빽빽 소리를 지르는 길드원들을 무시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얘들아.”
그렇게 나와 저세상은 윤사해의 손을 잡고 이매망량의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건물 안은 바깥과는 다르게 현대적이고도 모던하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웅장함은 그대로라 나는 이번에도 멍하니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와아…….”
이번에는 저세상도 함께였다.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과 다른지, 저세상은 연신 신기하다는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 같아도 그러겠다.
『각성, 그 후』에서 이매망량은 곳곳에 하얀 국화꽃이 만발해 있던, 초상난 집안과도 같은 분위기였다고 했으니.
「“누구를 위한 꽃들인 거예요?”
“지키지 못하고 떠나보낸 사람들을 위한 꽃들이지.”」
저세상에게 그렇게 말해 준 건, 윤사해가 아니라 윤리타였다.
「“아버지 나름대로의 추모야.”」
그 꽃들을, 이매망량에 쳐들어 왔던 백정 ‘윤리오’가 모조리 짓밟았었지만…….
윤리타는 윤사해를 대신하여 하얀 국화꽃들을 길드의 곳곳에 다시 심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저세상의 입장에서는 꽤나 놀라울 거다.
그렇게 저세상과 함께 정신없이 길드를 구경 중인데, 윤사해가 우리를 데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 비서에게 놀이방을 준비해 달라고 했단다. 그곳으로 가자꾸나.”
“응!”
“네.”
하지만 윤사해는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길드장님?”
우리에게 다가온 반가운 얼굴 때문이었다.
“혜원이 언니!”
“리사 아가씨?”
광혜원이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세상 도련님도 계시네요?”
저세상이 광혜원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광혜원은 그런 저세상을 향해 방긋 웃어 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두 분을 데리고 오셔대요, 길드장님?”
“그럴 일이 있어서.”
윤사해의 가벼운 대꾸에 광혜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네, 그러시겠죠. 그보다 태운 님 못 보셨어요? 눈이 갑자기 이상해졌다면서 저를 찾으셨다던데.”
“밖에 있다네.”
윤사해가 묶어 놓은 길드원 중 한 명의 이름이 ‘태운’인가 보다.
“그보다 광혜원 헌터, 자네는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길드로 나왔는지.”
“나온 게 아니라, 오늘은 여기서 잔 거예요.”
광혜원 언니가 활짝 웃었다.
“명패를 잃어버렸거든요. 마침 잘 됐네요! 서 비서님께 제 것 좀 새로 하나 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광혜원 헌터, 그걸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윤사해가 앓는 목소리를 냈지만, 광혜원은 이미 건물 밖으로 나선 뒤였다.
“정말이지…….”
윤사해가 광혜원이 사라진 쪽을 보고는 짧게 혀를 찼다.
명패라면, 이매망량의 길드원들이 길드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아이템을 말하는 걸 거다.
길드, 이매망량이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 귀수산은 해가 떠 있는 낮의 시간 동안 계속해서 움직이는 섬이었다.
그런 귀수산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사람은 윤사해와 그의 길드원들뿐.
귀수산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만든 명패가 귀수산의 위치를 알려 주는 좌표 역할을 해 줬기 때문이다.
나와 저세상이 그런 명패가 없어도 이매망량에 오게 된 것은 윤사해와 함께였기 때문이고.
윤사해는 명패가 없어도, 귀수산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원한다면, 윤사해는 몇 번이고 나를 이매망량에 데려다 주겠지.
하지만 탐났다.
“아빠! 리사도 혜원이 언니가 말한 ‘명패’라는 거 가지고 싶은데!”
이매망량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아이템을!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윤사해를 쳐다보자, 윤사해가 곤란하다는 듯이 난처한 미소를 보였다.
뭐야, 아빠? 못 주겠다는 거야?
두 뺨을 불퉁하게 부풀리는데, 윤사해가 내게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하하! 아무래도 미운 일곱 살이 일할 시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