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좋아지나 했더니(1)
다시 찾아온 아침.
나는 크게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망할 저세상.”
윤리사가 된 뒤로 언제나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했건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어젯밤, 저세상과 나눈 대화로 나는 몇 번이나 뒤척인 끝에 잠들 수 있었다.
회귀자인 저세상이 어떤 목적으로 윤사해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리 집으로 온 건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등등.
이 작은 머리통으로 얼마나 열심히 머리를 굴렸는지 모른다.
“저세상이 아빠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보호자가 필요해서인가?”
저세상은 『각성, 그 후』에 나오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를 내게 나불거려 줬다.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저세상이 왜 그랬는지는 쉽게 추측이 갔다.
나를 의심해서겠지.
회귀자라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크게 의심을 품고 있을 테니.
“몸 좀 사려야겠네.”
저세상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만약, 『각성, 그 후』에서의 힘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저세상은 상대를 죽임으로써 그가 가진 스킬을 제 것으로 만드는 각성자였다.
그렇게 죽인 각성자가 수십 명으로, 그만큼 획득한 스킬 역시 수십 개였다.
다만, 여기서 생긴 의문이 하나 있었는데.
“할미의 숲에서는 왜 그런 꼴로 있었던 거지?”
『각성, 그 후』에서의 힘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면, 진작 할미의 숲을 탈출했을 텐데 말이다.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각성, 그 후』에서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는 걸까?
“아이고, 머리 아파.”
망할 주인공님,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머리만 아프다.
아침부터 올라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데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윤리사, 일어났어? 아저씨가 너 깨우래.”
내 두통의 원인이신 주인공님께서 문을 열고는 얼굴을 내밀었다.
나와는 달리 간밤에 꿀잠을 주무신 모양이다.
왜 저렇게 낯빛이 좋아?
괜히 속이 뒤틀리는 느낌에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저세상을 쳐다봤다.
그 순간에 드는 생각이 있었다.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겠다면 확인해 보는 게 인지상정!
마침, 내게는 상대의 각성 여부 등을 탐색할 수 있는 스킬도 있겠다. 이를 써 보기로 했다.
저세상에게 상대의 탐색 스킬을 차단하는 A급 스킬이 있기는 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클리셰면 뭐 어때, 현자의 눈!>은 저세상의 스킬로는 차단할 수 없는 S급 스킬이었다.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리는데, 저세상이 얼굴을 찌푸렸다.
“기분 나쁘게 왜 그렇게 째려보는 거야?”
나는 저세상의 말을 간단히 무시하고는 스킬을 사용했다.
<비각성자임에 따라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없습니다.>
나타난 메시지를 읽으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침부터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렸는데, 비각성자라니.
“윤리사, 왜 그렇게 째려보냐니까? 말 안 해?”
나는 두 눈에 힘을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이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싫으니까 째려봤지!”
내 말에 저세상이 기가 차다는 듯이 웃고는 말했다.
“뭐래, 나도 네가 세상에서 제일 싫거든?”
흥이다.
나는 저세상을 향해 혀를 삐죽 내밀어 주고는 거실로 뛰어나갔다.
아침부터 주인공님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으니, 어서 우리 윤씨네를 보고 회복해야겠다.
“아빠, 굿모닝! 리오 오빠랑 리타 오빠도…….”
굿모닝인데, 우리 오라버니들이 보이지 않는다.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저세상이 옆에 다가와서는 말했다.
“형들은 학교 축제 준비로 일찍 나갔어.”
“리사한테 말도 안 하고?!”
“리사에게 인사하고 나갔는데, 자느라 못 들었나 보구나.”
부스스한 내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놓였다.
슬며시 고개를 드니 윤사해가 옅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잘 잤니, 리사?”
“아빠!”
나는 곧장 윤사해에게 안아 달라 조르며 밝게 웃었다.
“응, 리사 잘 잤어! 아빠는?”
“아빠도 잘 잤지.”
윤사해가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아빠와 세상이 오빠랑 같이 아침 먹을까?”
영광입니다, 아버지.
저세상과 함께 하는 아침은 영광이 아니지만요.
윤사해는 나와 저세상을 의자에 앉혀 준 뒤에 음식을 날랐다. 이내 차려진 진수성찬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거 아빠가 만든 거야?”
그럴 리가 없다.
맞는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먹을 수는 없었다.
윤리사, 신중하게 젓가락을 움직여야 해! 안 그러면 어떤 탈이 날지 몰라!
그렇게 먹을 음식을 고르려던 중, 윤사해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리오가 만들고 간 거란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나는 신중함 따윈 버리고 곧장 햄을 향해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예의바르게 식사 예절을 지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세상이 뒤늦게 잘 먹겠다고 인사한 뒤, 내가 집은 햄을 뺏어갔다.
저 망할 주인공 새끼가?
이를 으득 갈며 저세상을 있는 힘껏 노려보는데, 윤사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먹고 있으렴. 잠깐 전화 좀 받고 오마.”
웅웅, 울리고 있는 휴대폰이 보였다. 나와 저세상은 고개를 크게 끄덕인 뒤, 싸움을 시작했다.
“세상이 오빠, 햄만 먹으면 어떻게 해? 이것도 먹어야지.”
내가 저세상의 밥에 얹어 준 건 싱싱한 브로콜리였다.
흰쌀밥 위에 놓인 녹색 채소에 저세상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하하, 우리 주인공님! 왜 그런 표정을 보이시나요? 녹색 채소 많이 먹고 키 쑥쑥 크셔야죠!
“리사가 세상이 오빠 생각해서 양보해 준 건데, 싫어?”
“너라면 좋을 것 같아?”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나한테 주면 너는 바로 뺨 한 대다.
나는 저세상을 향해 얄밉게 웃어 주고는 햄을 콕 집어 들었다. 그렇게 입 안으로 들고 가려는 순간.
“류화홍 헌터! 오지 못한다는 걸 이제 말해 주면 어떻게 하나!”
윤사해의 목소리가 거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와 저세상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젓가락질을 멈추곤 윤사해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고요해진 가운데 윤사해와 통화 중인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이렇게까지 속이 안 풀릴 줄 몰랐단 말이에요!
“그걸 말이라고……!”
-오후에는 리오랑 리타 보러 갈 테니까, 오전은 좀 봐주세요.
우는 목소리에 윤사해가 짜증스레 앞머리를 넘겼다.
아침부터 퇴폐적인 미모를 발산 중이신 우리 아버님이시다.
“류화홍 헌터.”
-사랑한다고요? 저도 사랑해요, 길드장님. 아이 러브 유, 세이 굿 바이!
“류화홍 헌터!”
윤사해가 휴대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지만, 상대는 이미 전화를 끊은 뒤였다.
류화홍이라면 이매망량에 소속되어 있는 각성자.
『각성, 그 후』에서 나온 적 없는 인물이라 많은 것은 모르지만, 배짱이 큰 오빠인 건 분명해 보였다.
아니면 윤사해에게 저렇게 개길 수가 없다.
류화홍의 큰 배포에 조용히 감탄하는데, 저세상이 멈췄던 젓가락을 움직이며 내게 말했다.
“화홍이 형네 부모님이 아저씨의 후견인이었대.”
“후견인?”
“대모와 대부.”
아하, 개기는 이유가 따로 있었구나?
그보다 윤사해에게 후견인이 있었다니! 빌어먹을 작가님, 그런 설정이 있으면 풀어 줬어야지!
젓가락을 꽉 쥐고 부들거리는 내 모습에 저세상이 질색하는 얼굴을 보였다.
“너 표정 무서워.”
“리사 표정이 뭐 어때서?”
“거울 좀 보고 와 봐.”
싫다, 이 자식아.
나는 저세상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집었던 햄을 그대로 입 안에 가져갔다.
그렇게 맛있게 우물거리는데, 윤사해가 자리에 앉으며 미안해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세상아, 미안하지만 오늘은.”
“괜찮아요, 혼자 있을 수 있어요.”
저세상이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윤사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절대 안 된단다. 오늘은 같이 아저씨네 길드로 가자꾸나.”
“네…? 이매망량에요……?”
저세상의 두 눈이 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동요하는 것을 보니, 꽤 많이 당황했나 보다.
그런데, 잠깐만.
나도 가 본 적 없는 ‘이매망량’에 저세상을 데리고 가겠다고?! 그게 말입니까, 아버지!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탕,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소리 질렀다.
“리사도! 리사도 데려가!”
빼액 소리를 질렀지만 윤사해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리사는 유치원 가야지.”
고운 미성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정신 차려, 윤리사! 이매망량에 갈 기회를 놓치면 안 돼!
나는 윤사해의 손을 쳐내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안 가도 돼!”
“윤리사.”
나지막하게 타이르는 목소리에, 나는 있는 힘껏 고주파 목소리를 발산하기로 했다.
“안 데려가면 밥 안 먹을 거야! 유치원도 안 갈 거야! 집도 나가 버릴 거야!”
높디 높은 내 목소리가 듣기 싫은지, 저세상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숨을 푹 내쉬는 윤사해를 향해 카운터를 날렸다.
“아빠도 안 볼 거야!”
“……!”
윤사해의 손에서 젓가락이 떨어지고 말았다.
***
귀수산.
동해 앞 바다를 떠다니면서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하는 곳.
그곳에 위치한 길드, 이매망량의 대저택은 아침부터 떠들썩했다.
“세상에, 누가 광혜원 헌터 좀 불러와 줘. 내 눈이 고장 난 것 같단 말이야.”
“너도? 나도.”
자욱하게 깔린 안개 속에서 고고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매망량의 주인 때문이었다.
윤사해.
그 혼자만 모습을 보였다면 이런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아빠! 이매망량에 이제 도착한 거야?”
“그렇단다.”
윤사해의 왼팔에는 그와 쏙 빼닮은 여자아이가 안겨 있었고.
“아저씨, 저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내려 주셔도 되는데…….”
“안개가 이렇게 깔려 있는데, 혼자서 걷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오른팔에는 그 여자아이 또래의 남자아이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윤사해에게 안겨 있었다.
돈 주고도 못 볼 진귀한 광경에 마당을 쓸고 있던 이매망량의 길드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길드장님께서 드디어 가정을 챙기기 시작했다더니.”
“밖에서 애도 만들어 왔다더니.”
수군대는 목소리에 윤사해가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자네들 죽고 싶나?”
경고하는 듯한 목소리에 길드원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또랑또랑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아빠, 못된 말!”
“괜찮아요, 아저씨. 알아서 걸러들을 수 있어요.”
윤사해의 품에 안겨 있는 두 아이.
윤리사와 저세상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