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셋에서 넷, 넷에서 다섯(5)
아니었던 것 같다.
“흐아아악!”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저세상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쉿! 닥쳐, 저세상!”
내 말에 저세상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세상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치우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소리 지르면 어떻게 해? 아빠랑 오빠들이 깨면 어쩌려고!”
그랬다가는 잔소리 폭격을 맞고 말거다.
저세상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몇 번 크게 심호흡하더니 나를 째려봤다.
“놀랬잖아! 그보다 뭐? 닥쳐?”
“리사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아니야,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확신에 찬 목소리에 나는 가엾다는 듯이 저세상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해, 세상이 오빠. 나이가 아직 아홉 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환청을 듣고 있는 거야?”
우리 주인공, 불쌍해서 어쩌나.
“…….”
저세상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방긋 웃어 줄 뿐이었다.
말없이 나를 노려보던 저세상이 고개를 홱 돌렸다.
“됐다, 말을 하지.”
나이스, 내가 이겼다.
나는 승리의 미소를 한껏 지으며 저세상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세상이 오빠? 밤에 안 자면 키 안 큰다던데.”
“그러는 너는.”
“리사는 괜찮아! 어쨌든 세상이 오빠보다는 클 테니까!”
“뭐?”
저세상이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나를 보았다. 그 시선에 나는 저세상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는 활짝 웃었다.
“지금도 봐봐, 리사가 세상이 오빠보다 더 크잖아.”
“이익! 몇 달만, 아니. 며칠만 지나봐! 내가 너보다 더 클 테니까!”
응, 절대로 안 돼.
불쌍한 중생을 보는 부처처럼, 부드러이 미소를 짓는데 저세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비켜, 자러 갈 거야.”
“거짓말.”
저세상이 걸음을 멈추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에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세상이 오빠, 밤에 잘 안 자잖아. 리사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
오후 열한 시에 접어든 시간.
그때가 되면 항상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나는 그 사람이 ‘저세상’일 거라고 확신했다.
「“세상아, 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어?”
“리타 형.”
저세상이 멋쩍게 뺨을 긁적이고는 말했다.
“불편한 곳이 있을 리가요. 그냥, 어릴 적부터 이랬어요.”
“어릴 적부터 그랬다니…….”
“해 뜨기 전에는 잠깐 눈 붙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리타 형.”」
『각성, 그 후』에서 저세상이 어릴 적부터 불면증을 겪어 왔다고 그랬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어?”
“뭐를?”
“내가 안 자고 있는 거.”
저세상이 경계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할까?
『각성, 그 후』의 이야기를 섣불리 꺼낼 수는 없다.
다행히도 마땅한 대답이 금방 생각이 났다.
“세상이 오빠, 바보야? 매일 그렇게 부스럭거리면서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형들이랑 아저씨는 모르던데.”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때문에 나는 말했다.
“리사는 엄마 닮았대.”
“엄마?”
어디 계시는지 모를 윤리사의 어머님, 죄송합니다. 당신 좀 팔겠습니다.
“응! 우리 엄마가 소리에 엄청 예민한 사람이라고 했어!”
“아저씨랑 형들도 소리에 엄청 예민하신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가를 찡그렸다. 여기서 토를 달면 곤란해지는데.
하지만, 의외로 저세상은 쉽게 수긍해 주었다.
“그래서?”
“응?”
“내가 밤에 안 자고 돌아다니는 걸, 아저씨랑 형들한테 이를 거야?”
“아니.”
나는 고개를 젓고는 활짝 미소를 그렸다.
“리사도 잠이 안 오는데, 아빠랑 오빠들 몰래 리사랑 놀래?”
저세상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얼굴을 찌푸린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이해시켜 주는 게 인지상정!
나는 그대로 저세상의 손을 덥썩 잡고는 식탁으로 이끌었다.
친절하게 의자도 끌어 주고, 그 위에 저세상을 앉힌 나는.
“자.”
마지막으로, 저세상의 앞에 요구르트 하나를 놓아 주었다.
“요구르트는 왜?”
“기나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
나는 저세상의 맞은편에 앉고는 내 몫의 요구르트를 꺼냈다.
“있잖아, 세상이 오빠? 리사는 세상이 오빠가 엄청 궁금하거든?”
“놀자더니.”
저세상이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괬다. 그래도 나랑 대화는 할 생각인가 보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묻는 말에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세상에게 묻고 싶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너는, 『각성, 그 후』의 세계를 겪고 돌아온 회귀자냐고.
그 하나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를 묻기 위해서는 내 정체를 밝혀야했다.
내가 읽었던 『각성, 그 후』에 관해서도 말해 줘야 했고.
나는 물끄러미 저세상을 쳐다보며 할 말을 골랐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니까?”
재촉하는 목소리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저세상이 ‘회귀자’가 맞다면 신중하게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저 어린 몸으로, 어떤 힘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
그리고 그 힘으로 우리 가족에게 어떤 해를 가할지 모르니까.
왜 그렇잖아.
회귀자는 나비 효과를 제일 무서워한다면서?
그리고 내가 아는 저세상이라면, 일어날 나비 효과를 두려워하며 제거할 테였다.
나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었다.
“아빠 친구들 중에 운조 언니가 있거든?”
이운조는 이십 대 초반의 외모를 지니고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나이 스물 넘어가면 다 친구라고 했다. 어쨌든 그랬다.
나는 저세상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며 그가 내 이야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했다.
“운조 언니는 나쁜 사람들 때려잡는 걸 되게 좋아하는 언니거든?”
“그런데?”
“리사는 운조 언니가 걱정돼. 그러다 나쁜 사람들한테 해코지를 당할까 봐.”
저세상의 얼굴은 평온했다.
“강하니까 그러는 거겠지.”
내 걱정을 덜어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상하네, 윤리사.”
“응?”
“내가 궁금하다며.”
저세상이 눈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궁금하다면서 그 사람 이야기는 왜 꺼낸 거야?”
이운조.
저세상이 정말 회귀자라면, 절대로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야, 그녀는 저세상을 위해 죽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런 반응이라…….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리사의 고민을 세상이 오빠한테 털어놓고 싶었거든. 그리고 걱정하지 마, 이제 세상이 오빠에 관해 하나하나 모두 다 물어볼 테니까!”
“그래?”
저세상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내 이야기도 들어줘. 나도 너랑 나누고 싶은 고민이 하나 있거든.”
들어주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 저세상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있잖아, 이건 내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거든?”
네 이야기겠지.
나는 어디 한 번 떠들어 보란 듯이 심드렁한 얼굴을 보였다.
“그 사람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란 작자에게 학대당하다가, 지하 길드에 팔려가게 됐어.”
이내 굳어졌지만 말이다.
할미의 숲에 왜 있나 했더니, 그런 이유에서였어?
저세상이 요구르트의 뚜껑을 뜯고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애를 팔아 버린 후에 그 아버지라는 놈이 죽었다더라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저세상이 ‘고아’인줄로만 알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세상은 저걸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누구한테 들은 거야?
내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도 저세상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어쨌든, 다행히도 그 사람은 지하 길드에서 탈출하게 돼. 하지만, 기껏 돌아온 집에는 아무도 없었지. 아무도.”
뭔가 이상했다.
“그 사람에게 가족이라곤, 죽어 버린 아버지뿐이었거든.”
분명, 저세상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뭔가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래도 혼자 꾸역꾸역 살아갔어. 그 사람의 아버지는 각성자였거든. 어머니 쪽은 몰라.”
부모 중 한 쪽이 각성자일 경우, 그들의 자식이 각성자로 발현할 경우는 50%정도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각성자로 발현하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어. 아무래도 어머니 쪽이 비각성자였던 모양이더라고.”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 덧붙여 들려왔다.
“너는 모르겠지만, 이 사회는 ‘각성자’가 아니면 모두가 약자가 되는 사회거든.”
그래도 그 사람은 살았다고, 저세상이 말했다.
“그런데 결국 소용없더라고. 그렇게 죽을 마음으로 눈앞에 있는 던전에 들어갔는데 말이야. 누가 알았겠어?”
뒤늦게 깨달았다.
이건.
“그곳에서 각성자로 발현하게 될 줄을.”
『각성, 그 후』의 ‘저세상’에 관한 이야기란 것을.
말을 끝마친 저세상이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누군지 알겠어, 윤리사? 네가 아는 사람 같은데.”
그 말에 깨달았다. 내 얼굴이 지나치게 굳어 있다는 것을.
일해라, 미운 일곱 살!
나는 입술을 잔뜩 오므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사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치만 그 사람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어!”
“대단해? 왜?”
“어쨌든 각성자가 된 거니까!”
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요구르트의 뚜껑을 뜯으며 말했다.
“저세상, 네가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약자라며? 약자는 약한 사람들! 그러니까 각성자는 강한 사람이라는 거잖아!”
내 말에 저세상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 말이 맞아, 윤리사. 그런데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그럼?”
“실패자지.”
저세상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도 잠시, 저세상이 뜯어 놓은 요구르트를 단번에 비워 버리고는 말했다.
“다 마셨으면 자러 가. 아저씨 깨우기 전에.”
“그러면 너도 혼날 텐데?”
“같이 혼나지, 뭐.”
그게 뭐 대수냐는 듯이 저세상이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나는 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왔다.
서로에게 보내는 굿나잇 인사 따윈 없었다.
곧장 이불 속으로 들어간 나는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검색, 종장.”
말하기 무섭게 잔뜩 깨진 글자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검색 대상] : 종장(終章)
[겴�11 �엗 11011
10000 닷今 111
1100 男� 10 1000 삵윿 '쥑�귓'읅 냣웟섮]
여전히 읽을 수 없는 글자들.
연관 검색어도 나와 있지 않아, 내용을 추측해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단언할 수밖에 없었다.
저세상은, 회귀자다.
***
회귀자, 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저세상은 윤리사의 방문에 기대어서서는 소리 없이 웃었다.
“회귀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자신은 ‘회귀자’가 아니었다. 그런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 인간도 ‘회귀자’는 아니지만.”
저세상이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윤리사의 방문에서 걸음을 뗐다.
그렇게 자신의 방문을 열기 전, 저세상은 고개를 돌려 윤리사의 방 쪽을 바라보았다.
“너는 뭘까, 윤리사.”
처음에는 자신 때문에 벌어진 오류라고 생각했다. 죽었어야 할 윤리사가 살아 있는, 그런 오류.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지켰다.
그랬는데.
“아닌 것 같단 말이야.”
그래도 괜찮다.
남아 있는 시간은 많고, 윤리사를 지켜 볼 시간 역시 충분했으니.
그러니 윤사해의 보호 아래서 숨죽이고 있으면 된다.
스무 살이 되어, ‘각성자’로서의 힘을 되찾을 때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