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셋에서 넷, 넷에서 다섯(4)
윤사해 표 된장찌개를 먹은 후, 불편해진 속을 달래기 위해 나섰던 산책.
사이다 한 병씩 비우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시준이 아저씨를 만났고 또 어쩌다 보니 윤사해도 만났다.
물론, 싫다는 말은 아니었다.
“안 돌아오실 줄 알았어요.”
윤리오는 싫은 것 같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윤리오의 입가에 그려졌던 미소는,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거였나 보다.
내 신을 벗겨 주던 윤사해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응……?”
“그렇게 나가고 돌아오시는 꼴을 못 봤으니까요.”
윤리오의 날선 목소리에 윤사해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돌아오겠다고 했으니까.”
그 말에 윤리오가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약속을 잘 지키셨다고? 아, 저희랑은 ‘약속’이란 걸 한 적이 없으니까…….”
“했거든!”
망할 윤리오! 윤사해에게 마음을 여는가 싶더니, 꼭 저렇게 못된 말을 하지!
물론, 윤리오가 저러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빠, 있잖아? 아빠는 매일 집에 돌아온다고 했고, 하루 한 끼는 우리랑 꼭꼭 같이 먹기로 했어!”
윤사해는 변하고자 노력 중이다.
자신이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려고 노력 중이란 말이었다.
나는 윤사해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소리 질렀다.
“리사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고 리사랑 약속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윤리오가 조금만.
윤사해를 미워하는 감정을 아주 조금만 죽여 줬으면 했다.
나는 씩씩거리다가 윤리오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니, 잡고자 했다.
“이참에 오빠들도 아빠랑 약속 하나씩 해!”
“어?”
“자, 어서 새끼 손가락 걸고!”
하지만, 내가 잡은 건 윤리타의 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도장도 찍고!”
“아니, 잠깐만.”
“말해, 리타 오빠! ‘아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저랑 대련해 주세요.’라고!”
“아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저랑 대련…….”
윤리타가 말을 하다 말고 숨을 들이켜 마셨다. 자신이 어떤 단어를 내뱉었는지 깨달았나 보다.
“윤리사!”
부끄러움에 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을 무시하며,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들었지, 아빠? 리타 오빠가 아빠랑 일주일에 한 번씩은 대련하고 싶대.”
윤사해와의 대련.
그건 윤리타가 『각성, 그 후』에서 원하던 평생의 소원이었다.
단 한 번도 이뤄진 적 없지만.
“아빠, 그게요. 아니, 아버지. 제 이야기는 한 귀로 흘려들으셔도 상관없는…….”
“그래, 대련해 주마.”
“네?”
이렇게 이루기 쉬운 소원이었는데, 『각성, 그 후』의 윤리타는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했었다.
“대신, 리타도 나와 약속 하나 해 주겠니?”
“네? 네! 뭐든지요!”
윤리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윤사해가 미소를 지었다.
“계속 ‘아빠’로 불러 줬으면 좋겠구나. 염치없지만.”
윤사해의 목소리의 끝이 살짝 떨렸던 것 같다. 윤리타 역시 이를 느꼈는지, 오빠는 그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기만 했다.
그러나 이내 윤리타는 활짝 웃었다.
“네, 아빠!”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는 듯이, 그렇게 웃으면서.
“몇 번이고 불러 드릴게요! 그러니까 저랑 약속한 거 지켜 주셔야 해요? 꼭이요!”
윤사해와 약속을 끝마쳤다.
윤리타의 대답에 윤사해가 크게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첫째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윤리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싫어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쨌든, 싫다고요. 세상아, 손 씻으러 가자.”
윤리오가 그렇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저세상의 손을 잡을 때였다.
꼬르륵, 누군가의 배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내 옆의 윤사해였다.
윤사해가 멋쩍은 얼굴로 자신의 배를 부여잡았다.
“하하, 소화가 이제.”
되지 않는 것 같다.
윤사해는 그 말을 미처 끝맺지 못했다.
꼬르륵―!
윤사해의 배에서 굶주린 소리가 한 번 더 우렁차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
“…….”
어색하게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윤리오가 짜증스레 물었다.
“아버지, 저녁 먹고 들어오신다면서요?”
“그게, 일이 바빠서…….”
저녁을 먹지 못했나 보다.
아버님, 나이도 있으신데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 드셔야죠. 당신은 이 집안의 가장이란 말입니다.
윤사해의 대답에 윤리오가 고운 얼굴을 찌푸렸다.
“아, 짜증나.”
저놈 떼끼!
예쁘고 잘생겨서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망할 오빠야!
동네 사람들, 여기 좀 보세요. 아들이 아버지한테 짜증난다니 뭐라니 하면서 부엌으로 가네요?
응? 어디로 간다고?
부엌으로 향한 윤리오가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된장찌개는 저희가 다 먹어서 없어요. 계란 후라이 해서 간장에 밥 비벼 드려도 되죠?”
들려온 목소리에 윤사해가 황급히 부엌으로 향했다.
“리오야, 그냥 라면 하나 끓여 먹으면 되니까…….”
“라면이요?”
큰일 났다.
윤리오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식품 중 하나가 윤사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설마, 지금까지 라면으로만 끼니를 때우셨어요?”
“매번 그러지는 않았단다.”
“일주일에 몇 번 드셨는데요?”
“일곱 번 정도?”
“아버지!”
그걸 곧이곧대로 답해 주다니.
우리 아버지는 참 착하시도 하지.
“라면이 몸에 얼마나 안 좋은데! 그걸 일주일에 일곱 번을 드셨다고요? 하루에 한 끼는 라면이었단 소리잖아요!”
듣기만 해도 귀가 따가울 지경의 잔소리 폭격이 시작됐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윤리타가 질색하며 나와 저세상의 손을 잡았다.
“자, 우리는 손 씻으러 갈까?”
“응.”
“네.”
우리는 괜한 불똥이 튀기 전에 욕실로 향했다.
그렇게 손을 씻고 나온 우리를 반긴 것은, 폭삭 늙어 있는 윤사해의 지친 얼굴이었다.
“아시겠어요?”
“응…….”
윤리오의 잔소리가 이제 끝났나 보다. 나는 윤리오 앞에서 절대로 라면의 ‘라’자도 꺼내지 말아야지.
“손 씻고 오세요. 아니다, 샤워하고 오세요. 저녁 차려 놓을게요.”
“그래… 고맙구나…….”
윤사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나도, 윤리타도. 그리고 저세상도 그 뒷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보며 소리 없이 응원을 보냈다.
아빠, 힘내! 다시는 윤리오 앞에서 라면 이야기 꺼내지 말고!
그런 우리의 응원을 듣기라도 했나보다. 윤사해가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아버지, 빨리빨리 움직이세요.”
윤리오가 타박하는 바람에, 윤사해의 얼굴에 그려졌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윤리오, 진짜 못됐어!
“윤리타, 너는.”
“애들이랑 놀고 있으라고? 걱정 마, 윤리오. 내가 애들이랑 얼마나 잘 노는데.”
윤리타가 그러고는 우리를 거실로 데려갔다.
“얘들아, 그림 그리면서 놀래?”
나와 저세상에게 도화지를 한 장씩 건네받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타 오빠는?”
“리타 형은요?”
우리가 챙겨 주는 게 기특하다는 듯이, 윤리타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림 잘 못 그리거든. 그러니까 너희가 뭘 그리는지 구경이나 할게.”
어쩔 수 없지, 윤리타가 그림을 못 그리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색연필로 이것저것 그리기 시작했다.
“이건 사과, 포도. 그리고 딸기네? 맞지?”
“응!”
윤리타가 오답 없이 내가 그린 것을 모두 맞췄다.
그것이 뿌듯한지, 윤리타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오빠 천재지?”
“아니? 리사 그림 실력이 천재적인 건데.”
“아, 그래. 그렇지.”
윤리타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내 그림 실력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거야?
미지근한 반응에 불만을 표하려는 찰나, 윤리타가 저세상에게 관심을 보였다.
“세상이는 뭐 그리고 있어?”
“네? 아, 그게…….”
“몬스터? 귀신?”
그 말에 저세상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저씨 그린 거예요…….”
윤리타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크흠, 흠. 누가 봐도 우리 아빠네. 그림에서 느껴지는 이 기개, 용맹함. 누가 봐도 우리 아빠야.”
하지 마, 이미 수습 불가야.
윤리타도 그걸 깨달았는지, 턱 언저리를 긁적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리오 좀 보고 올게? 사이좋게 놀고 있어.”
“응.”
나는 윤리타가 부엌으로 향하기 무섭게 저세상을 놀렸다.
“세상이 오빠, 그림 진짜 못 그린다. 그걸 우리 아빠라고 그린 거야? 정말?”
저세상이 그린 것은 커다란 포도알에 눈, 코, 입의 점 세 개만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저걸 우리 아빠라고 그렸다니, 이건 아빠에 대한 모욕이다.
“시끄러.”
저세상이 얼굴을 찌푸리고는 내게 또 다른 그림을 보여 주었다.
“이건 너야.”
이 자식이?
동그라미에 눈, 코, 입의 점 세 개만 찍으면 다 사람이냐?
나는 저세상이 내민 그림을 그대로 구겨 버렸다.
“야!”
“기다려 봐, 세상이 오빠.”
리사가 그림이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 주도록 할게!
역삼각형에 점 세 개.
탈모면 슬프니까 위를 검은색으로 칠해 주기.
“짜잔, 리사가 세상이 오빠를 그려봤어. 어때?”
감상을 듣기도 전에 기껏 그린 저세상의 초상화가 그의 손에 갈가리 찢겨 버렸다.
“망할 저세상!”
“너 지금, ‘망할’이라고……! 악! 아야아!”
나는 있는 힘껏 저세상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세상아, 리사!”
때마침, 샤워를 끝내고 거실로 나온 윤사해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저세상의 머리칼을 모조리 뽑아 버렸을 거다.
쳇, 아쉽다. 아동 원형 탈모에나 걸려 버려라, 저세상!
물론, 나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을 거다. 저세상의 머리숱은 굉장히 풍성했으니까 말이지.
그리고 나는 무척 혼났다.
“리사, 세상이가 네 그림을 찢은 건 세상이가 잘못한 게 맞단다. 하지만, 오빠 머리를 그렇게 쥐어뜯어 버리면 어떻게 하니?”
“세상이는 리사 동생인데.”
“윤리사.”
윤사해의 옆에서 저세상이 샘통이라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아, 너도.”
“네?”
“리사 누나, 아니. 리사가 기껏 그려준 그림을 그렇게 찢어 버리면 어떻게 하니?”
그 말에 저세상이 억울하다는 듯이 웅얼거렸다.
“그치만, 윤리사가 먼저…….”
“세상아.”
나지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저세상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저세상, 고개 들렴. 그리고 리사, 너도…….”
“아버지, 그만하시고 와서 저녁 드세요.”
윤리오만 아니었더라면, 윤사해의 잔소리는 끝없이 이어졌을 거다.
윤리오의 잔소리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게 됐다.
윤사해다, 윤사해.
외모만 닮은 줄 알았더니, 잔소리까지 닮았었네.
“윤리사, 저세상. 서로 두 손 꼭 잡고 미안하다고 사과해. 포옹도 하고.”
윤사해와 닮은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윤리타의 날벼락과도 같은 말에 나는 소리 질렀다.
“싫어!”
“저도요!”
저세상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윤리타가 서로 사과할 때까지는 간식을 주지 않을 거라고 엄포를 놓자.
“미안해, 세상이 오빠.”
“나도 미안해.”
우리는 서로의 두 손을 꼭 잡고 사과했다.
“포옹도 해야지?”
망할, 윤리타.
저세상과 포옹을 하게 하다니, 내 이 치욕은 기필코 잊지 않으리라!
***
시끌벅적했던 하루도 저물고, 착한 어린이는 옛적에 꿈나라에 가 있어야할 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착한 어린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자, 지금 시간은 11시 45분!”
윤씨네 인간들이라면, 한창 잠들어있을 시간이었다.
어떻게 된 게, 이 집안의 취침 시간은 밤 열 시였다.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열 시가 되면 항상 잠들러 가야했다는 거다.
“나의 하루는 이제부터인데! 아빠랑 오빠들은 너무 바르게 산단 말이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미운 일곱 살 스킬을 꺼 두지 않았으면 나도 잠들어 버렸을 거다.
나는 그렇게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만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작은 인영이 보였다.
“안녕, 세상이 오빠.”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대화를 나누기에는 참 좋은 시간인 것 같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