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셋에서 넷, 넷에서 다섯(3)
된장찌개가 완성됐다.
하지만 요리 하나가 완성됐을 뿐, 윤사해는 곧바로 다음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와 저세상은 윤리타의 손을 잡고 거실로 나왔고, 부엌을 지키고 있는 건 윤리오였다.
“아버지! 씻지도 않고 그걸 썰면 어떻게 해요?!”
지키는 게 아니라, 윤사해를 감시 중인 건가 보다.
“어휴, 쟤는 아버지를 싫어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어.”
“리타 오빠는 아빠를 왜 자꾸 아버지라고 불러?”
윤리타가 움찔거리더니, 이내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아버지니까 아버지라고 부르지.”
거짓말.
윤사해 앞에서 ‘아빠’라고 부르는 게 쑥스러워서 그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고?
이걸 어떻게 놀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부엌 쪽에서 무언가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윤리타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윤리오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뭐야? 윤리오, 무슨 일이야?”
“별 일은 없어. 그런데 아버지가 도마를 썰어 버리셨어.”
“그게 썰리는 거였어……?”
윤리타가 내 심정을 대변해 줬다.
윤리타의 말에 윤리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그러게, 썰리는 거였더라.”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윤리타에게 건네주었다.
“도마 좀 사 와. 좋은 걸로.”
“좋은 게 뭔데?”
“가장 비싼 게 좋은 거겠지!”
윤리타가 왜 성질이냐면서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외투를 챙겨 입었다.
“윤리사, 세상이랑 사이좋게 놀고 있어.”
“리사는 세상이 오빠랑 언제나 사이좋게 노는데.”
저세상이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물론, 나는 그 시선을 간단히 무시했다.
“아버지는 나가서 애들이나 보고 계세요.”
윤사해의 앞치마는 결국, 윤리오에게로 넘어갔다.
윤사해가 풀이 죽은 얼굴로 거실 소파에 풀썩 앉고는 자괴감 가득한 얼굴을 문질렀다.
그 모습에 나와 저세상은 윤사해의 양 옆에 앉아서 재잘거렸다.
“괜찮아, 아빠. 다음에 제대로 해 주면 되잖아!”
“마, 맞아요! 다음에 요리해 주세요! 맛있게 먹을게요!”
“그럼 리사는 세상이 오빠보다 더 맛있게 먹을게!”
윤사해가 우리 둘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옥이 굴러가는 것같이 참 맑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 윤리타가 값비싼 도마를 사 오고, 윤리오가 요리를 완성한 순간이었다.
우웅-
울리는 진동에 윤사해의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서 비서].
서차웅이었다.
“그…….”
윤리오가 식탁 중앙에 아빠가 끓인 된장찌개를 놓고서 말했다.
“다녀오세요.”
그 말에 윤사해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나라도 그럴 거다.
윤리오가 윤사해에게 ‘다녀오라’는, 그런 인사를 했으니.
“저녁은 드시고 오실 거예요? 아니면…….”
“머, 먹고 오마. 먼저 먹으렴.”
“당연히 먼저 먹을 거고요.”
쌀쌀맞기 그지없는 태도였지만, 윤사해의 입가에는 옅게 미소가 걸려있었다.
나는 그런 윤사해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아빠, 꼭 돌아오기!”
오늘 하루 함께한 식사는 없지만 봐 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저녁을 손수 만들어 주셨으니까요!
물론, 저녁의 끝을 완성한 건 윤리오였지만 말이다.
내 말에 윤사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일렁이는 그림자와 함께 윤사해가 사라지고.
“리사, 어서 와서 앉아. 세상아, 너도.”
우리는 넷이서 저녁 식사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가장 먼저 윤사해가 만든 된장찌개를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가 곧바로 뱉어냈다.
“짜!”
“짜? 오빠는 왜 싱겁지?”
윤리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리타, 너는 어때?”
“맛있어.”
영혼이 없는 목소리였다.
저세상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열심히 밥숟갈을 뜨고 있었다. 아무래도 윤사해의 된장찌개는 망한 것 같다.
윤리오 역시 이를 알았는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윤리타, 아버지가 차려 주는 밥을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더니 어때?”
“맛있네, 뭐. 하지만 혼자 다 먹으라고 하지 마? 절대로 못 먹어!”
“누가 너 혼자 다 먹으래?”
윤리오가 피식 웃고는 밥숟갈을 뜬다.
나 역시 윤리오와 똑같이 밥 한 숟갈을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도대체 쌀에다 뭔 짓을 한 건지, 사탕과도 같은 단 맛이 났다.
***
사뿐히 내딛은 걸음에 핏물이 튀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서차웅이 고개를 돌렸다.
“길드장님.”
“입을 열었다고?”
서차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려났다.
의자에 묶여 망신창이가 된 남자가 보였다.
서커스의 정보를 찾고자 들렸던 폐건물, 그곳에서 류화홍의 손에 잡혔던 남자였다.
“으으…….”
손톱이 모두 빠져,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는 목소리에도 윤사해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다행이군, 이대로 AMO에 신변을 넘겨 줘야하나 걱정했는데.”
남자가 평범한 거지였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손등에 그려진 표식.
웃고 있는 피에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윤사해는 남자를 붙잡아 길드로 끌고 왔었다.
그는, ‘서커스’가 버린 장기말이 분명해 보였으니.
윤사해가 한 걸음, 남자의 앞에 다가섰다.
그러기 무섭게 남자가 고개를 홱 들고선 절박한 얼굴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일곱! 다섯? 열이 안 돼! 열이 안 돼요!”
“그치들이 몇 명이 모여 있는지는 관심이 없다네.”
윤사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선 물었다.
“어디로 사라졌지? 돌아온 목적은? 그 망할 것들이 자네를 살려 둔 이유가 있을 텐데.”
정보를 말해 주면 풀어 주겠다는, 그런 말 따윈 없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는 두 눈.
그에 남자가 벌벌 떨며 입을 열던 순간이었다.
“어윽……!”
작은 입을 비집고 무언가가 나타났다. 남자의 입 안에서 나타난 건, 입꼬리가 길게 찢어져 있는 피에로.
그것이 까르르, 웃고는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정답입니다.
입 안 가득, 피에로를 머금고 있는 남자가 끅끅, 거리며 살려 달라는 듯이 윤사해를 쳐다본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윤사해가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겁도 없이 튀어나왔군.”
-제가 이렇게 튀어나와도, 당신은 저를 못 찾을 테니 말입니다.
놀리는 것이 다분한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10년 동안 저를 못 찾지 않았습니까?
“먼저 꼬리를 내리고 줄행랑을 친 놈이 누구였지?”
-그래서 돌아왔지 않습니까?
작은 광대가 키득거리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지는 봄에 알아서 나타나겠습니다. 물론, 당신 앞에 말고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라색 불꽃이 이는 그림자가 피에로를 베어냈다.
툭, 데구르르-
바닥에 굴러 떨어진 것은, 피에로의 목뿐만이 아니었다. 이내 붉은 핏물이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길드장님.”
“애들의 경호 인력을 늘려야겠군. 특히, 리오.”
“리오 도련님이라면, 주변에 사람이 붙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실 겁니다.”
“그러겠지, 누구 아들인데.”
서차웅이 잠깐 떨떠름한 얼굴을 보였다가 입을 열었다.
“경호 인력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유지하되, 류화홍 헌터를 도련님들과 아가씨 곁에 붙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류화홍 헌터를?”
“네, 어릴 적부터 도련님들과 함께였지 않습니까? 아가씨께서도 어릴 적부터 봐 오셨고요.”
틀린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이었다.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아서 경호로 붙여 놓으면 될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런데 길드장님.”
윤사해가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저세상 군은 어떻게 할까요? 세 분과…….”
“똑같이 대해 주게나.”
윤사해가 서차웅의 말을 끊고는 걸음을 옮겼다.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러 가기 위해서.
***
“리타 오빠! 빨리 사이다!”
“자, 여기.”
나는 윤리타가 건네 준 사이다를 남김없이 비웠다.
“리사, 혼자 다 먹으면 어떡해? 세상이도 마셔야 하는데.”
“저는 괜찮아요…….”
지금, 우리는 모두 밖에 나와 있다. 소화를 위해서 말이다.
윤사해의 된장찌개를 남김없이 먹어 버린 게 문제였다.
“윤리오, 여기 콜라 있어. 세상아, 너는 이거 마셔.”
“네? 아… 감사합니다…….”
저세상이 떨떠름한 얼굴로 콜라를 받아들었다.
큰일이네, 저세상은 콜라를 싫어하는데.
사이다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콜라의 특유한 맛이 싫다고 『각성, 그 후』에서 그랬었다.
하지만 어릴 적의 저세상은 그러지 않은지, 윤리타가 쥐여 준 콜라를 단숨에 비워 버렸다.
“끄흡…….”
아닌 것 같다.
입가를 가리는 모습이, 윤리타가 줘서 억지로 마셨나 보다.
나는 말없이 저세상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에 저세상이 기겁하며 나를 쳐다봤다.
“갑자기 왜 이래?”
“동생을 생각하는 누나의 마음.”
“무슨 개소리야?”
이 망할 주인공 새끼가?
나는 힘주어 저세상의 등을 퍽, 소리 나게 때려 버렸다.
“아야……!”
작은 비명 소리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세상이 씩씩거리면서 나를 노려봤지만, 나는 그 시선을 간단히 무시하고선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모퉁이를 돈 순간.
“어? 시준이 아저씨다!”
“응……?”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가는 시준이 아저씨를 발견했다.
시준이 아저씨가 우리를 보곤 놀란 얼굴을 보이더니, 이내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여기서 다들 사이좋게 뭐하고 있니? 산책?”
“네, 소화가 안 돼서 잠깐.”
윤리타의 말에 시준이 아저씨가 다들 사이 한번 좋다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내 옆에 있는 저세상을 보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네가 세상이니?”
“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시준이 아저씨가 저세상에게 인사하고는, 윤리오와 윤리타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곧 축제하겠네?”
“네?”
“비나리 고등학교는 이맘때쯤에 항상 축제를 했으니까.”
시준이 아저씨의 말에 윤리타가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이번에는 지역 축제랑 합쳐서 크게 할 거래요!”
“하하, 뭣하러 그런 짓을 한다니. 애들 힘들게.”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진짜 이해 안 가요. 윤리타만 좋아하고 있다니까요?”
그렇게 시준이 아저씨와 쌍둥이가 서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려던 순간이었다.
“백시준!”
거리를 울린 목소리가 아저씨와 쌍둥이간의 대화를 막아 버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사해.
윤사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시준이 아저씨의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너 내가 애들한테……!”
“아이코, 시진이랑 우리 도윤이가 기다리고 있겠다! 얘들아, 안녕~! 다음에 또 보자!”
가까스로 윤사해의 손을 피한 시준이 아저씨가 누구보다도 빠르게 줄행랑을 쳤다.
그 모습에 윤사해가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보기는 뭘 봐! 당장 꺼져!”
난생 처음 보는 아빠의 험악한 말에 윤리오와 윤리타의 두 눈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윤사해도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렸는지, 말을 더듬거리며 우리를 쳐다봤다.
“얘, 얘들아, 이건…….”
“애들 앞에서 그런 말은 삼가 주세요, 아버지.”
윤리오가 그 말을 끊고서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옅게 그려진 윤리오의 미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