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셋에서 넷, 넷에서 다섯(2)
“윤리사다!”
“우와, 진짜 윤리사야!”
그럼, 내가 가짜겠냐?
나를 발견한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뚱한 얼굴로 숙덕거리는 아이들을 한번 째려보고는 도윤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리사, 무슨 일 있으면…….”
“선생님한테 말하기! 오빠들한테 연락하기! 아빠한테도 연락하기!”
교실로 들어가기 전, 윤리오와 윤리타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단예와 단아의 생일이 선비 새끼 때문에 엉망이 된 후, 나는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유치원에 오지 못했다.
윤리오와 윤리타의 걱정 때문이기도 했고, 아빠의 불안함 때문이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저세상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 보려고 했지만…….
“리사, 세상이와는 나중에 놀렴.”
망할 주인공님께서 어찌나 바쁘신지, 제대로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눈 게 어제 저녁이었다.
“윤리사!”
“단아야!”
유치원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단아가 내게 뛰어왔다.
활짝 웃으며 내게 안기라고 두 팔을 벌리는데, 다짜고짜 욕이 날아들어 왔다.
“윤리사, 이 바보 멍청이야!”
단아, 너무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리는데 단예가 내게 다가와서는 속닥거렸다.
“셋째가 리사, 너를 많이 걱정했거든.”
그 작은 목소리를, 단아가 들었나보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한단예도 백도윤도 있는데, 너만 없어서!”
씩씩거리는 말에 나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미안해, 단아야…….”
내 사과에도 단아의 화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단아에게 다가가서는 두 눈을 올망졸망 뜨고선 말했다.
“리사가 잘못했어, 화 많이 났어? 리사 얼굴 보고 화 풀면 안 돼?”
“화 많이 안 났거든! 그리고 내가 네 얼굴 보고 왜 화를 풀어야 하는데?!”
“그거야 리사는 귀여우니까.”
“……?”
단아가 뭐 이런 애가 다 있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것도 잠시, 단아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윤리사, 진짜 어이없어!”
“셋째야, 어이가 없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니?”
“몰라! 한단예 시끄러!”
단아가 소리를 지르자 도윤이가 까르르, 해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백도윤, 웃지 마!”
“아야!”
그러다 단아에게 한 대 맞았지만 말이다.
나중에 들은 건데, 도윤이도 단예와 단아의 생일 이후 일주일 만에 유치원에 나온 거라고 했다.
“나는 친구들 보고 싶다고 유치원에 보내 달라고 했는데, 아빠랑 삼촌이 절대 안 된다고 했어.”
나와 단예, 단아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물론, 도윤이 역시 그에 관해 더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우리 넷은 장난감 블록을 쌓거나, 교실에 구비된 장난감을 가지고 이리저리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얘들아, 뭐하면서 놀고 있어?”
선생님이 찾아오실 때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점심이 지나 낮잠 시간.
단아는 단예의 품에 꼭 끌어 안겼고, 도윤이는 내 옆에서 인형 하나를 안고 잠에 들었다.
나는 천장의 점박이 무늬를 세면서 두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리사.”
다정스레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단예였다.
“단예야, 안 자?”
“그럼, 리사는?”
“잠이 안 와서.”
“나도.”
단예가 미소를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리사에게 줄 게 있거든.”
“리사한테?”
“응, 손목 좀 내밀어 줄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단예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그와 함께 채워지는 것이 있었다.
“단예야, 이건…….”
“리사, 네 거지.”
단예가 내 말을 끊고는 말했다.
“덕분에 살았어, 리사. 네 말대로 강한 어른이 구하러 와 줬거든.”
단예가 내 손목에 채워 준 것은, 정중앙에 토끼가 그려져 있는 연보라색 팔찌였다.
윤리오가 내게 줬던 것.
그리고 내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단예에게 선물로 줬던 것이다.
나는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리사는 한 게 없는데.”
내 말에 단예가 말없이 미소를 그렸다. 나의 의중을, 진작 파악했다는 듯이 말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단예의 두 눈에 나는 괜히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 순간. 단예의 품에 안겨 있던 단아가 악몽이라도 꾸는 듯이 끙끙거리며 앓기 시작했다.
“……단아는 괜찮아?”
“괜찮아.”
단예가 단아의 머리를 토닥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괜찮지 않아. 하지만 서서히 괜찮아지겠지. 할아버지께서 밤마다 함께 있어 주시거든.”
“단예와 단아의 할아버지가?”
“응.”
단예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는 내게 물었다.
“리사, 기억나? 나와 셋째의 생일날에 할아버지께 바쁜 일이 있다고 한 거.”
“응, 그래서 단아가 잔뜩 화가 나있었지!”
“맞아.”
단예의 손길 때문일까? 단아의 앓는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단예가 다시 곤히 잠에 빠진 단아를 한 번 두 눈에 담고는 입을 열었다.
“그날, 할아버지께서 우리 소식을 듣고 모든 걸 포기하고 나오셨다더라고.”
들려온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에 나도 모르게 단예의 손을 덥석 잡아 버렸다.
“……리사?”
“다음에는 케이크 꼭 같이 먹자!”
내 말에 단예가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단예의 손을 꼭 끌어 잡고서 말했다.
“리사 생일도 있고, 도윤이 생일도 있고 크리스마스도 있으니까!”
“……도윤이 생일은 지났는데?”
아, 지났어?
“어쨌든! 리사가 다음에는 노래 더 크게 불러 줄게! 그러니까 케이크 꼭 같이 먹고, 재미있게 놀자!”
단예가 하늘색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리사.”
마주잡은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다음에는 케이크 꼭 같이 먹자.”
우리는 서로 환히 웃으며 그렇게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
낮잠 시간이 끝나면, 어느새 유치원이 끝날 시간이었다. 이 말은 윤리오와 윤리타가 나를 데리러 올 시간이라는 뜻.
하지만.
“리사.”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쌍둥이가 아니었다.
“아빠!”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이야!
여러분, 여기를 보세요! 우리 아빠가 저를 데리러 왔어요!
두 팔을 벌리고, 윤사해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가려는데 바로 코앞에서 멈췄다.
“……안녕.”
저세상이 윤사해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뭐야, 화홍이 오빠는?”
분명, 아침에 류화홍이 돌보러 오는 것을 확인했었는데?
내 말에 저세상이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화홍이 형은 급한 일이 생겨서 가셨어.”
그러고는 윤사해를 흘긋거렸다.
“나 혼자 있을 수 있었는데, 아니. 혼자 있어도 상관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혼자 있겠다고 하는 거니, 세상아?”
윤사해가 저세상의 말을 끊고는 나를 곧바로 안아 들었다.
“리오와 리타는 축제 준비로 바쁘다더구나.”
그래서 왔나 보다.
그나저나 우리 아버님, 많이 발전하셨다. 윤리오와 윤리타에게 그런 일이 있다고 해서 직접 오다니.
그리고 윤리오랑 윤리타도…….
“오빠들이 아빠한테 그런 연락을 했어?”
윤사해에게 연락하다니 말이다.
내 말에 윤사해가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리타가 연락했단다.”
그럼, 그렇지.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고서야 윤리오가 윤사해에게 연락을 할 리가 없지.
“가자꾸나.”
윤사해가 한 손으로 나를 안아들고서, 다른 손으로는 저세상의 손을 잡았다.
저세상이 불편한 듯, 몸을 움찔거렸지만 윤사해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유치원을 나서려던 순간.
“리사!”
도윤이가 나를 붙잡았다.
도윤이뿐만이 아니라 단예와 단아도 말이다.
친구들이 윤사해의 손을 잡고 있는 저세상을 보고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보였다.
“리사, 걔는…….”
“내일!”
나는 도윤이의 말을 끊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얘들아, 내일 봐!”
저세상은 내일 소개해 줄게!
나의 인사에 친구들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세상이 그런 우리들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세상이 오빠도 리사 친구들한테 인사할래?”
“됐어.”
저세상이 그 말을 하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낯빛이 살짝 어두운 것이,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세상아, 같이 가야지.”
윤사해가 앞서 가던 저세상을 붙잡고는 유치원 선생님께 고개를 살짝 꾸벅인 뒤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내게 슬쩍 물었다.
“리사, 저 도윤이라는…….”
“걔랑 친해! 그리고 앞으로도 친하게 지낼 거야!”
그러니까 우리 도윤이 건들기만 해 봐! 아주 그냥, 확 그냥 뺨을 때려 버릴 테니까!
뒷말에 삼켜진 내 경고를 알아들었는지, 윤사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불만어린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윤사해의 품에 안긴 채 싱글벙글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둘 다 손 씻으렴.”
“네~!”
뽀득뽀득 손을 씻고 나오니, 식탁 위에 가득 쌓인 식재료가 보였다.
“아빠가 사 온 거야? 요리하려고?”
“응.”
간결한 대답에 나는 두 눈을 반짝였다.
“무슨 요리? 리사, 떡볶이 먹고 싶은데! 피자도 먹고 싶어!”
“떡볶이는 다음에 해 주마. 피자는…… 아빠가 배워 올게.”
굳이 배워 오실 필요는 없는데 말입니다.
윤사해 곁에서 올망졸망 두 눈을 뜨고 있는데, 저세상이 소리 없이 다가와서는 내게 속닥거렸다.
“아저씨 좀 귀찮게 하지 마.”
“리사 마음인데? 오빠는 가서 한글이나 공부해. 데랑 대,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는지 구분할 줄 알아? 리사는 구분할 줄 아는데.”
“…….”
저세상의 얼굴이 톡,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얼굴에 나는 고소하다는 듯이 저세상을 비웃어 주고는 윤사해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아빠, 요리하다가 옷 더러워지면 어떻게 해? 지지잖아, 지지.”
“으음.”
“리오 오빠가 요리할 때마다 입는 거 있는데.”
나는 부엌 한 구석에 걸려 있는 앞치마를 윤사해에게 내밀었다.
“이거!”
“…….”
파스텔 색상의 예쁜 분홍색의 앞치마였다. 주머니에는 당근을 물고 있는 토끼도 그려져 있었고.
윤사해가 내가 내민 것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고맙구나.”
끌어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윤사해는 내가 준 앞치마를 입어 줬다.
나는 식탁 의자에 앉고는 윤사해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우리 아빠, 참 잘났지?”
옆에 앉아 있던 저세상이 질색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저씨가 불쌍해.”
“앞치마, 세상이 오빠 것도 있는데.”
“다시 보니까 아저씨한테 저 앞치마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너 보는 눈이 있구나?”
그렇게 나와야지.
보글보글, 된장찌개가 끓으며 맛있는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지는 순간이었다.
“윤리사~! 세상아~!”
“윤리타, 너. 리사하고 세상이 집에 없기만 해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윤리오와 윤리타가 돌아왔다.
“아빠가 데리러 간다고 했다니까? 애들이 지금 네 말 듣고 있을걸?”
“시끄러.”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지?”
나는 곧장 쌍둥이에게로 달려갔다.
“된장찌개! 아빠가 지금 된장찌개 끓이고 있어!”
내 뒤로 저세상이 불편함 가득한 얼굴로 쌍둥이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다녀오셨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사해가 쌍둥이를 향해 어색하게 인사했다.
“……왔니?”
앞치마를 곱게 차려입고 있는 윤사해의 모습에, 쌍둥이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