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그래도(4)
“리사?”
답이 없는 내 모습에 윤사해의 두 눈에 불안감이 서렸다.
이러다 광혜원을 또 부를 것 같아, 나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아빠잖아, 아빠! 리사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우리 아빠!”
내 말에 윤사해가 크게 안도하는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뿐.
윤사해의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내게 다가오는 것이 무섭다는 듯, 윤사해는 주저하는가 싶더니 힘없이 손을 늘어뜨렸다.
나는 그 손을 곧바로 잡았다.
놀란 듯, 크게 떠진 윤사해의 두 눈에 나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저씨는? 도깨비 아저씨는 어디 갔어?”
“……사는 곳으로 갔지.”
“그리고 리사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빠는 집으로 왔네.”
“집에 돌아오겠다고 우리 리사랑 약속했으니까.”
윤사해의 손이 내 손을 꼭 쥐었다.
“아빠는 약속은 꼭 지키거든.”
“거짓말! 저번에 빨리 돌아온다고 했으면서 안 왔었잖아! 리사는 다 기억하고 있는데!”
내 말에 윤사해가 미안하다는 듯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기지 않으마.”
윤사해가 애정이 가득 담긴 두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눈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니, 조금 전에 꿨던 악몽이 떠올랐다.
아니, 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적의 나는 ‘윤리사’를 알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열아홉의 나는 그 이름을 전혀 기억하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각성, 그 후』의 이야기에 개입하기를 원하십니까?】
눈앞에 나타났던 메시지.
우리 작가님께서 차애님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나를 불쌍히 여겨 그런 메시지를 보낸 건 아닐 터였다.
내가 그 메시지를 받은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각성, 그 후』의 작가 새끼는 도대체 정체가 뭘까?
정말, 그 새끼는 내가 이 이야기에 단순히 ‘개입’하는 것만을 바라고 있는 걸까?
의문만이 쌓이는 가운데,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
“리사, 조금 더 자렴.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단다.”
이불을 끌어올려 주는 윤사해를, 우리 아빠를 저세상의 손에 죽게 두지 않을 거라는 것.
“아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입을 열었다.
“피곤하면 집에 안 들어와도 돼.”
뭔가 말이 이상하지만, 윤사해에게 ‘집’은 안락하고 편안한 공간이 아니었다.
불편하기 그지없고, 숨 막히기만 한 공간일 거다.
그렇기에 말했다.
“하지만 리사가 원하는 게 있는데, 그것만 들어줘. 그럼 아빠 귀찮게 안 할게, 말도 잘 들을게.”
물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우리 연약하고 눈물 많으신 아버지가 헛짓거리를 하려고 한다?
바로 뺨 한 대, ‘내 말이나 들어라’ 스킬을 걸어 버릴 거다.
내 말에 윤사해가 입술을 꾹 깨무는가 싶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목소리를 내뱉었다.
“매일 집에 돌아올게. 하루 한 끼라도 너희와 같이 먹으마. 리사, 네가 원하는 것도 다 들어줄 거야.”
울먹이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뭐든 말해 보렴, 리사. 무엇이든 다 들어줄 테니.”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진짜?”
“응, 진짜.”
윤사해의 손이 조심스레 나의 뺨에 닿았다.
“아빠가 몇 번이고 약속한다고 했잖니? 이제, 무슨 약속이든 꼭 지키마.”
온기가 가득한 손길에 나는 활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각성, 그 후』.
그 빌어먹을 이야기를 바꾸기 위한 한 걸음을.
마음먹고 크게 내딛기 위해서.
***
<[1보] 대한애국당 김홍 의원 검거
김 의원은 유력한 당 대표 후보였던 한태극 의원의 가족을 납치 사주한 배후로 알려져…….>
병원에서 깨어난 지 사흘째.
아이는, 전자 패드에 나타난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전원을 꺼 버렸다.
<……한편, 납치당했다가 극적으로 구조 한태극 의원의 가족은 안정을 되찾는 중이라고 한다.>
알고 싶었던 내용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얻은 정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침대에 풀썩 드러눕고는 두 눈을 데굴 굴렀다.
“어떻게 된 거지?”
사령의 숲이나 윤사해에 관련된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은폐한 모양이지.’
중요한 건, 납치당했다고 알려진 한태극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한단예와 한단아.’
아이는 한태극이 소중하게 여기는 두 손녀의 이름을 입 안에서 한 번 굴려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친구들 구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것뿐이야.’
그 ‘친구들’이 설마…….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일곱 살이 얼마나 많은데, 많고 많은 일곱 살 중에서 걔들이 서로 친구다?
‘말이 안 되지.’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침대에서 조심히 내려왔다.
어쨌든 이곳에서 나가야했다.
‘내게 가족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보호 시설로 보내려고 할 거야.’
곧 간호사가 올 시간이다.
아이는 병실에 딸린 화장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곧이어 병실의 문이 열렸다.
“세상아, 몸은 좀 어때? AMO 쪽에서 요원님이 오신다는데…….”
간호사의 말이 끊겼다.
“어……? 얘가 어디 갔지?”
당혹감이 가득한 목소리.
저세상은 화장실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반쯤 열린 문틈으로 몸을 비집고 나왔다.
그렇게 모퉁이를 돌았을 때.
“선생님! 애가 사라졌어요!”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저세상은 다급하게 비상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보호 시설로 가는 것은 저세상에게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인간이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어.’
유력 정치 인사의 가족을 노린 납치 사건.
그와 관련해 쏟아진 기사 중에서 저세상은 숨을 막히게 하는 이름을 발견했다.
<……한태극 의원은 가족을 구출해 준 장천의 회장에게…….>
장천의.
잠시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도망쳐야 해.’
그렇게 저세상이 비상구의 손잡이를 잡으려고 할 때였다.
“세상 군, 어디를 가시려고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세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시진이 아저씨.”
백시진.
병원에 실려 온 이후, 자신에 관한 것을 전담해서 맡고 있는 사람.
“병실로 돌아갑시다, 세상 군. 세상 군이 좋아할 만한 간식을 잔뜩 사 왔답니다.”
그가 건네는 친절을, 저세상은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저세상은 백시진의 손을 잡았다.
“손님이 한 분 찾아올 겁니다.”
“……손님이요?”
“네.”
그 말에 저세상이 입술을 꾹 깨물고선 고개 숙였다.
‘장천의인가.’
도망치는 건 글렀나 보다.
“아, 이미 와 계셨군요.”
그 말에 저세상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 아이인가?”
“네.”
들린 목소리에 저세상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번쩍 뜨고는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색 머리카락, 깊은 눈매에 자리 잡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
서늘하다면 서늘한 인상.
저세상은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저…….”
그러나 소리를 내어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저세상은 다시 입술을 꾹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 숙이려고 했다.
“안녕, 세상이 오빠.”
윤사해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아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
나의 인사에 저세상이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얼굴을 굳혔다.
아니, 저 망할 주인공 새끼가?
사람이 기껏 인사를 하면, 반갑다고 손을 흔들어 주거나 해야지!
괜히 입술을 씰룩이는데, 아빠 뒤에 서 있던 쌍둥이가 저세상을 보고는 한 마디씩 내뱉었다.
“윤리사, 쟤가 세상이야? 너보다 두 살 더 많다며.”
“아홉 살 치고는 너무 작은데.”
쌍둥이를 본 저세상의 두 눈에 놀라움과 경악이 뒤섞여 깃드는 것이 보였다.
저세상이 보이는 감정은, 결코 낯선 사람을 마주한 데에서 오는 공포가 아니었다.
그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윤사해가 나와의 약속을 지킨 날.
그날 밤에, 나는 윤사해에게 말했었다.
‘세상이 오빠를 리사 동생 삼고 싶어.’
‘……누구를 동생으로 삼고 싶다고? 아빠가 잘 못 들었는데, 다시 한번 말해 줄 수 있을까?’
‘세상이 오빠!’
‘……?’
윤사해가 자신이 지금 뭘 들은 건가 싶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어쨌든 그는 약속대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줬다.
‘뭐라고요? 다짜고짜 그게 무슨 소리세요?!’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지만 말이다.
소식을 들은 윤리오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간밤에 윤리타와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오늘 아침 윤사해에게 말했었다.
‘세상이라고 했죠? 보러 가요.’
이른 아침, 이매망량으로 나서려던 윤사해는 기쁜 기색을 애써 감추면서 고개를 끄덕였더랬지.
윤리오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윤리오는 윤사해가 집으로 귀가하게 된 날부터 줄곧 그랬으니…….
그때였다.
아빠가 저세상에게 한 걸음 다가가서는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미리 만나러 왔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우리 리사를 지켜 줬다고 들었단다.”
“그게… 아니, 아니에요…….”
들리는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죄인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저세상의 모습에 윤사해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많이 무섭나 보구나.”
“아니요! 아니에요!”
그 말에 저세상이 홱 고개를 들고선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러니까, 그게…….”
더듬거리면서 말을 잇던 저세상이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나를 흘긋거리는 것이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도와달라면 도와줘야지!
“아빠, 그렇게 다가가면 안 돼! 세상이 오빠는 부끄럼쟁이거든!”
저세상이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나는 방긋 웃으면서 물었다.
“그치, 세상이 오빠?”
“……으, 응, 부끄러워요.”
하지만 저세상은 어쩔 도리가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윤사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는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성급하게 다가갔나 보네.”
“아니에요…….”
저세상이 힘없이 고개를 숙인다.
그 순간, 뒤에서 줄곧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윤리오가 등을 돌렸다.
“애랑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자리 비켜 드릴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윤사해가 붙잡으려고 했지만, 윤리오가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제가 따라가 볼게요. 윤리사, 아빠…… 아니, 아버지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해.”
“응.”
윤리타는 윤사해가 없으면 잘도 ‘아빠’거리더니, 윤사해 앞에서는 ‘아버지’라면서 어려워한다.
저세상이 멀어지는 쌍둥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세상이라고 했지? 돌봐 줄 가족이 없다고 들었단다.”
윤사해의 목소리에 저세상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윤사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와 같이 가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