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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각성자의 딸이랍니다 (23)화 (23/500)

23화. 그래도(3)

약속.

윤사해는 그 말을 쉽게 입에 담지 않았다. 특히나 제 자식들과는.

지킬 자신이 없어서였을 거다.

하지만 윤사해는 말했다.

‘몇 번이고 약속하마, 리사.’

다정하기 그지없던 목소리를 떠올리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우리 아가씨, 큰일을 겪으셨는데 왜 이리 기분이 좋아 보이실까?”

“리사 기분 안 좋은데요?”

“그래요? 싱글벙글 웃고 계시면서 안 좋다고 말하시는 거예요?”

“히히.”

윤사해는 나와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그런 약속을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도깨비 아저씨도 함께였다.

우리를 집으로 데려다 준 건 몇 번 본 적이 있는 이매망량 소속의 각성자인 류화홍.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마찬가지로 이매망량 소속의 광혜원 언니한테 붙잡혔다.

“잠깐, 손 좀 잡을게요.”

“네에!”

붙잡힌 손에서 따뜻한 기운이 번져나갔다.

한참 후, 내 손을 놓아 준 광혜원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 있는 쌍둥이에게 말했다.

“도련님들, 아가씨 괜찮으세요. 자잘하게 난 상처들은 내일이면 모두 나을 거고요.”

광혜원의 말에 윤리오와 윤리타가 눈에 띄게 안도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그것 보라며 방긋 웃어 준 뒤에 입을 열었다.

“언니, 리사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 전에 약부터 먹을까요, 아가씨? 아가씨가 좋아하는 딸기약이에요, 딸기약.”

딸기약이라니.

딸기약이라고 해도 약은 약이었다. 광혜원이 내게 약을 먹여 주자 혀끝에서부터 쓴 맛이 올라왔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선 광혜원에게 물었다.

“리사랑 같이 있던 애는 어떻게 됐어요?”

“아가씨랑 같이 있던 애요?”

“네! 세상이라고, 싸가지…….”

없다고 말하려다가 황급히 말을 고쳤다.

“리사랑 친구 먹은 애에요!”

“우리 아가씨, 그새 친구도 사귀셨어요?”

“네! 걔 때문에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광혜원이 다행이란 듯이 미소를 짓고선 말했다.

“세상이라고 했죠? 그 아이는 AMO 쪽에서 보호 중이에요. 부모를 찾는 중이라는 것 같더라고요.”

부모는 찾지 못할 거다.

저세상은 날 때부터 고아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럼, 언니…….”

내 친구들은 괜찮은 거냐고, 그렇게 물으려고 할 때였다.

“아가씨 친구 분들도 모두 무사하셔요, 그러니 아무런 걱정 마시고 일단 주무실까요?”

가슴까지 이불을 덮자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먹은 약 때문인 것 같았다.

“혜원이 누나, 리사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그건…….”

“리사도, 리사 친구들도 갑자기 사라졌었어요. 리사만 다른 곳에서 발견됐고요.”

“일단, 나가서 이야기 나눌까요?”

윤리오와 윤리타가 광혜원과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문이 닫히기 전, 누군가 내게 다가와 인사했다.

“잘 자, 리사.”

끔뻑끔뻑, 졸린 눈을 깜빡이던 나는 윤리오의 나지막한 인사에 두 눈을 꼭 감고 말았다.

길고 길었던 하루.

잠들기 전 떠오른 것은, 선비에게 짓밟혀 버린 단예와 단아의 케이크였다.

***

“음? 신발 꼴이 왜 그래요, 선비씨? 진흙은 아닌 것 같은데.”

달이 뜨지 않는 밤.

아니, 하늘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 그 어둠을 밝히고 있는 건 청사초롱이었다.

남자의 말에 선비가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케이크입니다, 케이크.”

“케이크?”

선비의 말에 한쪽 눈에 안대를 착용 중이던 남자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선비가 신경질적으로 흙바닥에 신을 비비고선 물었다.

“닦을 것 없습니까, 이매?”

“저는 없고, 저기 널려 있는 인형으로 닦는 건 어떠세요?”

이매.

그가 가리킨 것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작은 피에로들이었다.

선비가 장난하느냐는 듯이 이매를 노려봤고, 이매는 웃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여 주었다.

“그보다 신발에 왜 케이크가 묻었대요?”

“밟았거든요.”

이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 들고 가던 케이크가 신발 위로 떨어졌다면 몰라, 케이크를 밟아서 신발이 더럽혀졌다니.

‘도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오신 거람?’

이매가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그렸다. 그에 선비가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고는 말했다.

“함과의 일이 잘 안 풀렸습니다. 지금쯤 모두 AMO의 인간들에게 잡혔겠군요.”

“함이라…….”

큰 건을 하나 물었다면서, 유랑단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지하 길드로 기억한다.

이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쉽다, 선비 씨도 잡혔으면 좋았을 텐데.”

그 말에 선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놓고 드러내는 불쾌한 감정에도 이매는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그 순간, 허공에서 누군가 나타나 곧바로 선비를 향해 발길질 했다.

“……!”

가까스로 이를 막아낸 선비가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다짜고짜 무슨 짓입니까?”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이 개새끼야.”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멋대로 내 숲에 들어와서는 그곳을 망친 주제에!”

“아…….”

선비가 바람 빠진 소리를 한 번 내고는 미소를 지었다.

“윤사해가 결국 제 자식을 찾았나 보군요.”

“윤사해? 여기서 그 새끼의 이름이 왜 나와?”

“그 인간의 따님 분과 일이 조금 있었거든요.”

“뭐……?”

선비를 걷어찼던 여자, 할미의 붉은 눈이 일순 흔들렸다.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함과의 일이 제대로 틀어졌었나 보네요? 아쉽다, 구경하러 갈 걸.”

선비가 그 입 좀 닥치라는 듯이 이매를 본다.

그러나 이도 잠시.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에 선비는 이매에게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윤사해의 아이가 너와의 일로 내 숲에 떨어졌고 윤사해가 그걸 알게 됐다는 거지?”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닥쳐.”

후웅, 날아든 불꽃이 선비의 코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무 그러지 마시고,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네? 꿰매 주랴?”

윤사해는 미지 영역의 거주자.

특히, 도깨비들과 주로 계약을 맺은 자였다.

이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주자는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존재니까.

문제는 이매(魑魅)와 망량(魍魎).

윤사해는 도깨비뿐만 아니라 온갖 잡것들을 부리는 자라는 거였다.

할미에게 있어서는 상대하기 가장 버거운 자이자 꺼려지는 자.

그런 인간의 분노를 사게 됐는데, 저 망할 새끼는 남의 속도 모르고 여유롭게 웃고만 있다.

할미가 이를 으득 갈았을 때였다.

“할미, 당신께서는 공양으로 바쳐질 아이를 빼돌렸지요.”

나긋한 목소리에 할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

할미가 한쪽 눈가를 일그러뜨리고는 선비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선비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 사실이 수장님께 알려지면 꽤 곤란해질 텐데요.”

따르는 주인의 이름이 거론되자, 할미는 결국 걸음을 돌렸다.

“재수 없는 새끼.”

“칭찬 감사합니다.”

할미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이내 그 얼굴은 화르륵, 일어난 불꽃에 삼켜졌다.

불꽃이 수그러들었을 때, 할미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쉽다, 선비 씨가 할미께 얻어맞는 꼴을 보고 싶었는데.”

“시끄럽습니다. 그보다 모자 장수는 어디 갔습니까?”

툭툭, 선비가 작은 피에로들을 발로 차며 물었다. 그 질문에 이매가 미소를 그렸다.

“벚꽃 구경하러 간다더라고요.”

“벚꽃?”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공간.

선비는 뒤늦게 ‘봄’이 온 지 오래됐음을 깨달았다.

***

벚꽃이 한가득 지던 날.

그날에 나는 보육원에 맡겨졌다.

‘그러니까 없는 살림에 애는 왜 낳아서!’

취기 어린 목소리에 두 눈을 번쩍 떴다. 밝은 시야에 보이는 건, 창틀에 가득 쌓인 벚꽃이었다.

‘애는 나 혼자 낳았어?! 당신이 싫다는 나를……!’

쨍그랑, 유리가 깨지고 고성이 오갔다. 나는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 시바.’

익숙하다면 익숙한 곳.

이곳은, 내가 보육원에 맡겨지기 전에 살았던 지하 단칸방이었다.

너무 큰일을 겪었다했더니 이런 악몽을 다 꾼다.

‘악몽이라…….’

이건 마리아일 적의 내 기억이다.

마리아로서 행복했던 기억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악몽과도 같은 것들뿐이었다.

문득 저세상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자면서 끙끙거렸다고 했지? 이런 꿈을 꿨었나 보네.’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없지만.

그때였다.

‘마리아!’

귓가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작은 손이 잡혔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일어나!’

내 손이 아닌, 내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마리아’의 어린 손이.

‘싫어! 안 갈 거야!’

‘이게 어디서 고집이야? 당장 안 일어나?!’

우악스런 손길에 어리기만 한 몸이 억지로 끌려 나간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았다.

‘놔! 이거 놔!’

보육원에 ‘마리아’가 맡겨지던, 벚꽃 내리던 늦은 봄날.

나는 노란 원피스를 받고서 좋으라고 싱글벙글 웃었더랬지.

부모님이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싸워도 금방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리사는 아빠한테 갈 거야! 우리 아빠한테 갈 거라고!’

‘이 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네 아빠인데, 누구한테 간다고!’

내게는 없는 기억이었다.

‘아니야! 아저씨, 우리 아빠 아니야! 아빠! 아빠아! 리오 오빠, 리타 오빠!’

아이의, 아니.

나의 울음소리가 현관문 너머로 사라졌다. 텅 비어 버린 집에서 나는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어릴 적의 나는, ‘윤리사’를 알고 있었던 거야?

윤리사뿐만 아니라, 윤사해도? 윤리오와 윤리타까지?

‘거짓말.’

그럴 리가 없는데.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머릿속에 복잡해지던 순간이었다.

“리사!”

어깨를 흔드는 손길과 함께 악몽이 부서져 내렸다.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건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윤리사의 방.

그리고.

“괜찮니? 아빠…… 알아보겠어?”

걱정이 가득 묻어 있는 윤사해의 얼굴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