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사이좋게 한 걸음을 떼려고 했는데(3)
나는 지금 행복하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주문을 거는 중이다. 그러지 않으면 체할 것 같거든.
“…….”
“…….”
차라리 사과를 먹고 있었다면, 아삭거리는 소리가 이 숨 막힐 듯한 정적을 채워 줄 텐데.
“리사, 아.”
“아.”
이 와중에 윤리오가 내게 딸기를 먹여 주었다. 나는 오물오물 씹은 딸기를 꿀꺽 삼키고는 윤사해를 쳐다봤다.
……우리 아버님, 체한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
윤사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딸기를 먹는 중이었다. 윤리타가 그런 윤사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 바쁜데 붙잡아서 죄송해요, 아버지.”
“알아서 다행이구나.”
“…….”
주변의 공기가 단번에 내려갔다.
윤사해가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아차 싶은 얼굴로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내 말은……!”
“그러게. 바쁜 사람은 왜 붙잡은 거야, 윤리타.”
그 말을 윤리오가 매몰차게 끊어 버렸다.
“하지만 궁금하기는 하네요, 뭐 때문에 그렇게 바쁘신 건지.”
비아냥거림이 다분한 목소리였다.
그에 윤사해가 침을 꿀꺽 삼킨다.
지금 보니, 우리 아버님. 체하신 게 분명한 것 같다.
돌아오지 않는 답에 윤리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윤사해는 딸기 하나를 삼키고선 뒤늦게 답해 줬다.
“주말에는 던전 공략과 관련하여 DMO와 이야기를 나눠야 하고, 차주 월요일에는 정계 일로 시간을 못 내는 거란다.”
무척이나 빠른 목소리로 말이다.
“하지만 그 일이 끝나면 시간을 비울 수 있지. 언제든지 말이야. 대답이 됐니, 윤리오?”
윤리오가 떨떠름한 얼굴로 윤사해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윤사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서 그런지, 무척이나 뿌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답이 됐냐고 물었단다.”
“네? 아… 네…….”
윤리오가 뻘쭘하게 답하고는 고개를 숙인다. 그에 윤사해는 뿌듯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아버지. 그렇게 뿌듯한 표정 짓지 마. 물론 보기는 좋지만, 윤리오의 당황한 표정이 보이지 않는 거야?
“……리사, 하나 더 먹어.”
윤리타도 당황했나 보다. 나한테 자기 몫의 딸기를 주는 걸 보니까 말이다.
어쨌든 주는 건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윤리타가 준 딸기를 입에 집어넣고는 윤사해를 흘긋거렸다.
분명, 윤사해에게 건 ‘내 말이나 들어라’ 스킬은 해제됐다.
하지만 윤사해는 말했다. 할 일이 끝나면 언제든지 시간을 비울 수 있다고 말이다.
그 말은 즉, 해야 할 일을 끝마치면 우리에게 언제든 시간을 내겠다는 것.
“……스킬이 걸려 있지도 않은데.”
속에 담겨 있던 마음을 중얼거렸다.
윤리타가 내 작은 목소리를 듣고서 물었다.
“응? 뭐라고 했어, 리사?”
“리사는 아무 말도 안 했어.”
나는 딸기를 꿀꺽 삼키고는 윤사해를 쳐다봤다.
여전히 체한 것 같은 얼굴이지만 옅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잠깐 흐뭇해하다가 생각했다.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하면서, 저 뺨을 때리면 어떨까 하고.
그런 나의 시선을 윤사해가 느꼈나 보다.
“윤리사, 왜 그러니?”
커흑, 아버님! 갑자기 소녀와 그렇게 아이컨택을 하시면 심장에 타격이……!
나는 심장을 부여잡고 심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내 고갯짓에 윤사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당장에라도 지난번의 의사 언니, 광혜원을 부를 것 같은 기세에 나는 다급하게 윤사해에게 물었다.
“아빠, 출마해?”
“그게 무슨 소리니?”
“정계 일이라고 해서.”
내 말에 윤리오가 놀란 얼굴을 보였다. 윤리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윤리사, ‘정계’가 무슨 말인지 알아?”
“응!”
나를 뭐로 보고! 겉모습은 일곱 살이지만, 안에 들어 있는 애는 열아홉 살이라고요!
뿌듯하게 어깨를 으쓱이자 윤사해가 대견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하하! 당신의 딸이 이렇게나 똑똑하답니다, 아버지!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의기양양해하고 있을 때였다.
우웅-
울리는 진동에 윤사해가 폰을 들었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니, 꽤 중요한 전화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윤사해가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구나.”
윤리오는 말없이 고개를 홱 돌려 버렸고, 윤리타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바쁜데 저희가 너무 붙잡고 있었죠?”
윤사해가 아니란 듯이, 무어라 입을 달싹였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저 미안하다는 얼굴로 우리를 볼 뿐이었다. 그 시선에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빠, 일 끝나면 돌아오기.”
“…….”
그런데 저 망할 아버지가 대답을 피한다.
“아빠?”
“크흠, 흠.”
윤사해가 헛기침을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저 발목을 붙잡고 뺨을 한 대 때릴까 보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윤사해가 집을 나서기 전에 우리에게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사 왔는지 모르겠지만, 딸기가 정말 달더구나. 잘 먹었단다, 얘들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리오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딸기를 사 온 건 윤리오인가 보다.
윤리타가 팔꿈치를 들어 윤리오의 옆구리를 꾹 눌렀다. 그러고는 윤사해를 배웅하며 말했다.
“딸기 더 사 놓을게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버지.”
“아빠! 빨리 오기!”
윤사해는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는 그대로 집을 나가 버렸다.
달칵, 현관문이 닫히기 무섭게 윤리오가 윤리타를 향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돌아오시지 않을 텐데, 그냥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하지 그랬어?”
“뭐가 또 그렇게 불만이야?”
“흥.”
나는 냉큼 윤리오의 허벅지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고서는 말했다.
“리오 오빠, 딸기 진짜 맛있어!”
내 말에 윤리오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더 사러 가야겠다.”
그 말에 윤리타가 키득거렸다.
“맞아, 더 사놔. 아빠가 인정한 최고의 맛을 가진 딸기잖아.”
“시끄러, 윤리타.”
그렇게 말하면서도, 윤리오의 귓불은 여전히 빨갛게 물든 채였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윤리오에게 딸기 하나를 건넸다.
“고마워, 리사.”
윤리오가 활짝 웃으며 내가 건넨 딸기를 입 안에 넣었다.
“윤리사, 나도!”
“싫은데.”
나는 윤리타를 향해 혀를 날름 내밀어 주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빌어먹을 집구석에도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다.
***
희망은 개뿔이었다.
하루가 지나 이틀, 이틀이 지나 삼 일이 되도록 윤사해는 또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금요일.
“시바……!”
나는 죄 없는 곰 인형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중이었다.
이 빌어먹을 아버지! 잘생기고 뭐고 자시고 돌아오기만 해 봐. 그 고운 뺨에 싸대기를 날려 줄 테니!
퍽-! 퍼억-!
곰 인형의 배가 움푹 들어갈 때마다 도윤이와 단아가 흠칫,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백도윤! 가서 윤리사 좀 말려 봐!”
“시, 싫어! 무섭단 말이야!”
얘들아, 나를 너무 무서워하지 마렴. 그냥 곰 인형을 패고 있는 것뿐인데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친구들을 보며 방긋 웃어 주었다.
“히익!”
역효과만 낳은 것 같다.
나는 입술을 씰룩이고는 다시 주먹을 들었다. 그렇게 곰 인형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고 할 때였다.
“리사.”
단예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초대장 하나를 내게 건넸다.
“……단예야, 이게 뭐야?”
“일요일이 생일이거든.”
“생일?”
“응, 나랑 셋째. 그리고 외국에서 요양 중인 첫째의 생일.”
그러고는 도윤이를 불렀다.
“여기, 도윤이 것도 있어.”
“와아! 고마워!”
도윤이가 초대장을 받아 들고는 활짝 웃는다. 나 역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꼭 갈게, 단예야! 단아야!”
“나도! 나도 꼭 갈게!”
나와 도윤이의 말에 단예가 잔잔히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들었지, 셋째야? 리사와 도윤이가 우리 생일 파티에 온대.”
“오, 오든가 말든가……!”
단아가 팔짱을 끼고는 우리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에 도윤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단아야, 나랑 리사가 생일 파티에 가는 게 싫어……?”
그 말에 단아가 빼액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싫을 리가 없잖아! 백도윤, 이 바보야!”
“나 바보 아니야!”
“아니야! 백도윤은 바보야!”
그 말과 함께 단아와 도윤이는 다투기 시작했다. 물론, 도윤이가 일방적으로 맞기만 했다.
이내 도윤이가 울음을 터트렸고, 단아는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었다.
나는 사이좋은 친구들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단예에게 물었다.
“진짜로 생일 파티에 가도 되지, 단예야?”
“응, 당연히 되지. 초대한 건 우리인걸? 셋째는 너무 신경 쓰지 마, 리사야.”
단예가 싱긋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날, 할아버지께서 온종일 집을 비우신다고 하셨거든.”
“단예랑 단아의 생일에?”
“응.”
단예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고 있던 단아가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우리 할배는 맨날 거짓말만 해! 이번 생일 파티에는 꼭 오겠다고 했으면서!”
단아를 혼내는 중이었던 선생님께서 당황하셨는지 이제는 그 애를 달래기 시작했다.
선생님께 안긴 단아가 교실을 빠져나갔다.
도윤이가 그 뒤를 따랐다.
나도 따라갈까 하다가 단예의 옆에 얌전히 있기로 했다.
“단예랑 단아네 할아버지는 엄청 바쁘신가 보구나?”
금쪽 같이 아끼는 손주들 생일에 얼굴 한 번 못 비출 것 같다니. 그러니 『각성, 그 후』에서 그렇게 후회했지.
내 말에 단예가 미소를 그렸다.
“바쁘신 건 맞지만, 그날은 특히나 더 바쁘다고 하시더라고.”
“왜?”
“전당 대회라고, 할아버지께서 속하신 당의 대표를 뽑는 날이래. 우리 할아버지, 국회의원이시거든.”
“……!”
잔잔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불현듯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권력이 무엇이라고, 우리 단예와 단아가 그렇게 될 동안에 그리 떠들고 있었어…….”」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리사?”
“……그날이구나.”
“응?”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교실 밖을 쳐다봤다.
도윤이가 단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단예와 단아의 생일 파티.
원래라면 도윤이만 초대받았겠지. 윤리사는 이 시기에 이미 유명을 달리한 상태일 테니.
“리사, 괜찮아?”
“응? 응, 괜찮아.”
나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리사가…… 아주 멋진 생일 선물 준비해서 갈게.”
“리사가 와 주는 것만으로도 나와 셋째에게는 아주 큰 선물인걸?”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애써 웃음을 지어 줄 뿐이었다.
다가오는 일요일.
단예와 단아, 도윤이가 죽었던 ‘사건’이 벌어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