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차애님을 만났는데 말입니다(3)
윤리오와 닮은 얼굴, 그러나 분위기는 확연하게 다른 윤리타가 나를 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빠?”
내가 아니라 윤사해를 본 것 같았다. 윤리타가 귀신이라도 본 줄 아는지 두 눈을 비볐다.
“리타야.”
“헉… 진짜 아빠였어……!”
하지만 윤사해는 귀신이 아니었다. 윤사해가 나를 내려 주고는 곧장 윤리타에게로 향했다.
“어, 어어?”
윤리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뒷걸음질 쳤지만.
“열이 있다더니 내렸나 보구나.”
윤사해에게 잡혔다.
윤사해가 윤리타의 이마 위에 얹은 손을 내리고는 미소 지었다.
그 얼굴에 윤리타의 얼굴이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길드장님, 도련님 놀라셨잖아요.”
그런 윤리타를 구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거실 안쪽에서 흰 가운을 입은 언니가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바뀐다더니, 제가 모르는 사이에 불치병이라도 걸리셨어요?”
“광혜원 헌터.”
윤리오가 아버지 노망난 것 같다면서 불러오라던 사람이었다.
광혜원이 찡그린 얼굴 그대로 윤리오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찾아대나 했더니. 리오 도련님, 어디서 그렇게 구르고 온 거예요?”
“……그럴 일이 있었어요.”
“리사 아가씨랑 같이요?”
그러고 보니 내 꼴도 엉망이었다.
윤리오의 품에 안겨 있을 때 옮아 붙었던 건지, 검은 점액질이 내 옷 곳곳에 묻어 있었다.
이런 꼴로 차애님의 품에 안겨 있었다니!
뒤늦게 알아차린 사실에 경악하고 있는데 윤사해가 나와 윤리오가 있는 쪽을 보곤 말했다.
“아이들이 험한 일에 휘말렸었다네. 잠시 봐줬으면 하네만.”
“험한 일이요?!”
윤사해의 말에 윤리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윤리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험한 일이라니?”
윤리오가 짜증스레 윤사해를 보곤 말했다.
“별일 없었어.”
“별일 없던 것 같지는 않은데?”
묻는 목소리에 윤리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윤리타가 뚱한 얼굴로 윤리오를 보다가 몸을 낮추고선 내게 물었다.
“리사, 도대체 무슨 일 있었어?”
나는 배시시 웃기만 했다.
윤리타의 주의를 돌린 건 광혜원의 목소리였다.
“그래도 험한 일에 휘말린 것 치고는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네요.”
“하지만.”
“물론 봐 드려야죠, 당연히. 받는 돈이 있는데. 돈 받은 만큼은 착실하기 일할 테니까요.”
광혜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리고?”
윤사해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그 시선에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 왜 그렇게 봐? 리사한테 할 말 있어?”
윤사해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뭐요?”
대답을 재촉한 건 광혜원이었다. 윤사해가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리사, 치아 좀 봐 주게. 앞니가 없다네.”
“네……?”
“놀다가 어디 부딪히기라도 한 모양이야.”
작게 말한다고 한 것 같지만, 우리 모두에게 들린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나와 윤리오, 윤사해와 가까이 있는 윤리타까지 말이다.
윤리타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황급히 나와 윤리오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나도 윤리오를 바라보았다.
“……진짜 노망나셨나 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장님.”
“자네가 봐 주지 못하는 영역이라면, 병원을 좀 예약해 줬으면 하네만. 실력 있는 자가 있는 곳으로.”
그 말에 광혜원이 빼액 소리 질렀다.
“병원은 무슨 병원이에요! 리사 아가씨 저번 주에 앞니 빼셨잖아요! 두 개 다요!”
윤사해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빠진 앞니를 보여 줬다.
“…….”
머쓱한가 보다.
멋쩍게 뒷목을 긁적이는 모습에, 광혜원이 한심하다는 듯이 윤사해에게 말했다.
“치과에 손수 전화를 걸어서 우리 리사 앞니 아프지 않게 뽑아 달라고 말씀하시고선…….”
“그만!”
윤사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광혜원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이미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아빠가 리사가 갔던 치과에 직접 전화를 걸었었다고요? 리사 앞니 아프지 않게 뽑아 달라고요……?”
“거짓말.”
윤리타의 말을 윤리오가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로 부정했다.
한겨울도 아닌데 윤리오 주변에서는 칼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윤사해가 자괴감 어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윤리오가 그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리사, 들어와. 씻어야지.”
“웅…….”
잠깐, 설마 같이 씻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님, 씻겨 주려고 저러나?
“리사?”
절대 안 된다.
나는 육상 세계 신기록을 세운 사람처럼 날래게 움직였다.
허겁지겁 신발을 벗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욕실을 찾으려고 했지만.
“무슨 집이 이렇게 넓어…….”
넓어도 너무 넓었다.
“리사! 그렇게 들어가면 어떻게 해!”
왜 저러나 했더니 내가 아직 신발 한 짝을 신은 채였다.
나는 신을 벗어 윤씨 부자가 모여 있는 곳으로 던졌다.
“아! 윤리사, 너……!”
혼이 반쯤 나가 있었던 윤리타가 내가 던진 신발에 머리를 맞고는 정신을 차렸다.
“리사한테 고마워해!”
“뭐?”
“리타, 괜찮니?”
“네? 네, 괜찮은데…….”
『각성, 그 후』에서 윤리타는 윤사해를 위해 움직였었다.
윤사해가 봐 주지 않아도 그 곁을 지키고, 무너진 가족의 울타리를 붙잡고 있던 사람.
그는 지금 눈앞에 벌어진 모든 상황이 꿈만 같을 거다.
“리사!”
윤리오는 아닌 것 같지만.
나는 윤리오의 쨍한 목소리를 무시하고는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찾았다!”
반쯤 열려 있는 문을 보건대 저기가 욕실이다. 나는 윤리오의 손을 피하곤 욕실로 달려갔다.
“리사! 윤리사!”
그만 좀 부르라고 혀를 날름 내밀어 주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꼭꼭 잠그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윤리사! 문 안 열어?!”
“싫어! 리사 혼자서 씻을 거야!”
“리사!”
윤리오가 절대 안 된다는 듯이 나를 불렀다. 내가 샴푸 먹고 죽을 줄 아나 보다.
“리오 도련님, 리사 아가씨도 이제 혼자 씻을 수 있는 나이예요. 그보다 도련님도 어서 씻고 나와요. 상처 좀 보게.”
“저 다친 곳 없어요!”
“없기는요!”
쫘악, 등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윤리오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 집 방음이 별로인 것 같다.
“광혜원 헌터! 애를 그렇게 때리면 어떻게 하나!”
방음이 별로여도 괜찮았다.
들려오는 차애님의 목소리에 흐뭇하게 웃고는 나는 물을 틀었다.
검은 점액질로 엉망인 옷을 벗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윤리사, 네 옷 문 앞에 뒀어.”
“응!”
씻고 나오니 단정하게 개어진 잠옷이 보였다. 토끼 귀가 달려 있는 것이 앙증맞았다.
그 옷을 입고 뽀송뽀송해진 채로 바깥으로 나왔다.
“다 씻었어?”
“리타 오빠!”
윤리타는 어깨 위에 토끼가 가득 그려진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거 리사 거.”
“네가 두르고 있으라고 준 거잖아? 그보다 머리 제대로 말려야지, 윤리사.”
윤리타가 수건으로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기 시작했다.
물기를 말려 주는 게 아니라, 나를 놀리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윤리타가 수건을 팔에 걸치고선 키득거리며 웃어댔다.
“우리 리사, 누군지 몰라보겠는데?”
벼락이라도 맞은 꼴이 됐다.
그래도 티 없이 맑은 윤리타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내가 아는 윤리타는 억지웃음만 보여 주는 사람이었단 말이야.
윤사해가 우리와 함께 집에 온 것에 기분이 좋나 보다.
그런데 윤사해가 보이지 않는다.
“오빠, 아빠는?”
“잠시 나가셨어. 곧 돌아오신대.”
윤리타가 무릎을 굽혀 앉고는 헝클어뜨렸던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돌아오신대, 리사. 돌아오신다고 하셨어. 그런 말,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는데.”
윤리타는 그렇게 말하면서 기쁜 듯이 환하게 웃었다.
나 역시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련님. 길드장님께서 돌아오겠다고 말한 게 그리 좋으세요?”
“혜원이 누나!”
윤리타가 배시시 웃는다.
“당연히 좋죠!”
“집주인이 집에 돌아오겠다고 말한 건데, 뭐가 그리 좋은지 몰라.”
이번에 윤리타는 윤사해와 닮은 얼굴로, 그가 그랬던 것처럼 멋쩍게 웃으며 뒷목을 긁적였다.
“윤리오는요?”
“주무셔요. 어디서 구르고 오신 건지, 아주 화끈하게 다치고 오셨더라고요.”
광혜원은 화끈하게 애를 치료한 모양인데.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했던 윤리오가 쥐 죽은 듯이 잘 리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아가씨. 도대체 어디를 다녀오신 거예요?”
“비밀!”
여기서 말하면 가족 일에 한없이 바보가 되는 윤리타가 펄쩍 뛰고는 던전을 공략하러 갈 것 같았다.
내 말에 윤리타가 짓궂음이 가득한 얼굴로 내 머리를 꾹꾹 누른다.
“윤리사, 이제 비밀도 만들 줄 알고. 아주 다 컸어.”
“맞아! 리사 다 컸어!”
“네가 크기는 뭘 컸다고.”
언제는 다 컸다더니.
윤리타가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내고는 광혜원에게 물었다.
“화홍이 형 불러 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안 그래도 부르려고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바쁜가 봐요.”
그러고는 이만 돌아가 보겠다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리오 도련님 깨시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해 주세요.”
“네, 누나.”
“언니, 잘 가!”
광혜원이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는 현관을 나섰다.
그렇게 고요해진 집.
내가 단 한 번도 가진 적 없던, 편안한 안식의 공간.
이 공간을 가져도 될까?
분명, ‘윤리사’로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는데 고민이 들었다. 그런 내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윤리사, 머리 말리러 가자.”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윤리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윤리사’의 가족이다.
저 손을 내가 잡아도 될까, 그런 고민이 들었지만…….
“윤리사, 머리 말리러 가자니까?”
“웅!”
나는 윤리타의 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