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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1) (242/250)


변화 (1)
2022.07.31.


중국 진저우의 어느 게이트.

이현은 이곳에 있었다.

“…….”

사람이 살던 흔적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중국 북부지방은 몬스터 포화 상태로 진작부터 사람이 살 수 없는 장소가 되었으니까.

치지직! 치직!

물론 이현에겐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전부 소거시킬 수 있는 녀석들이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타겟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죽게 되는 기묘한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다.

‘……거의 다 왔다.’

이현의 눈에는 작은 메시지 한 줄이 떠 있었다.

[사형 집행자와의 거리 410m]

카오스 게이트에 잠식된 이후 꾸준히 떠오르는 메시지였다.

‘이번에는 기필코 죽이겠다…….’

이현은 몬스터를 소거시키며 카오스 게이트에 있었을 당시를 떠올렸다.

처음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유난히 강한 몬스터들이 습격해 왔지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빠르게 처치했고 불리하면 피했었다.

그러던 그 때, 이현에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형 집행까지 500시간 남았습니다.]

[발언권이 제한됩니다.]

[변호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보 전달이 제한됩니다.]

[카오스 게이트에 귀속됩니다.]

하나같이 전부 섬뜩한 내용들뿐이었다.

실제로 이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부터 이현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달할 수도 없게 되었다.

카오스 게이트에서 벗어나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당연히 이현에겐 식량도 없었고, 먹을 수 있는 몬스터도 없었다.

그대로 버티다가 쓰러졌다.

어느 순간, 이현은 구해졌다.

주민성 덕분이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임시 구출되었습니다.]

[사형 집행 예정 시간이 길어집니다.]

[사형 집행까지 370시간 남았습니다.]

[사형 집행자가 멀어졌습니다.]

[사형 집행 예정 시간이 길어집니다.]

[사형 집행까지 520시간 남았습니다.]

[사형 집행자를 처단해 결백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형 집행자와의 거리 340km]

희망이 생겼다.

어째서인지 사형 집행자도 멀어졌다.

그때부터 쫓고 쫓기는 처지가 반전됐다.

드디어 사형 집행자를 찾아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공간 점멸 능력자에게 누군가를 쫓는 건.

사형 집행자가 있던 장소는 백두산이었다.

이현은 그때 알아차렸다.

사형 집행자가 하성이라는 걸.

이현은 당시의 녀석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거래가 있었다.

-나에겐 물론 너를 향한 악감정 따위 없다. 네게 악감정이 있는 인간의 의뢰였지.

-그 표정을 보니 의뢰자가 누구인지 알려줄 필요는 없는 것 같군.

-사형 선고는 해제되지 않는다. 기회는 끝났으니까.

하성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이현처럼 장소를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었던 건지.

[사형 집행자와의 거리 1949km]

하성과의 거리가 턱없이 멀어졌다.

명백히 이현의 실수였다.

대화가 통했기에 좋게 해결되기만을 바랐다.

그때부턴 쫓고 쫓기는 세계 일주의 반복이었다.

하성은 닿을 듯하면 귀신같이 멀어지며 이현을 따돌려왔다.

‘기필코…….’

지금의 이현은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

아마도 남미 방면 게이트를 통과할 즈음이었다.

[사형수 권한이 연동됩니다.]

[사형수의 집착 권한이 해금됩니다.]

[사형 집행관이 사형수를 인지하기 어려워집니다.]

보기엔 정말 소소한 능력이었지만, 현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이기도 했다.

1km까지만 접근해도 도망가던 하성은 이제 500미터 이내로 접근했음에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저벅.

이현은 걸음을 옮기며 하성이 숨어있을 만한 장소를 압축해나갔다.

그리고 400미터 전방.

폐허가 되어버린 공장을 바라봤다.

하성은 반드시 저곳에 숨어있으리라.

척.

시야에 들어오는 위치였다.

이젠 굳이 걸을 필요도 없었다.

공간 점멸을 이용해 소음이 생길 모든 원인을 제거했으니까.

츳.

[사형 집행자와의 거리 11m]

공장 입구 근처에 도착했다.

이제 하성은 코앞에 있다.

그럼에도 걷지 않는다.

벽이 문제라면 벽 자체를, 건물이 문제라면 건물 자체를 소거시킬 계획이었다.

하성은 그 과정에서 통째로 소거될 터였고.

츠츠츠츠!

소거 능력이 발동되면서 공장은 소리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건물이 균형을 잃고 무너지기 직전에 소거되기에 마찬가지로 소음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현 또한 한때 세계 최강급으로 평가받던 SSS급 능력자였다.

그 정도는 가능하다.

츠츠츳! 츠츳!

건물이 반 정도 날아가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발견됐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아마도 하성과 같은 악마로 추정된다.

“……!”

이현은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해 하성의 목을 조르며 소거 능력을 준비했다.

“……뭐야.”

사형 집행인을 상대로는 발언이 제한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또 너냐…….”

“…….”

뭔가 이상했다.

능력도 취소했다.

눈앞의 하성은 도망치지도 못할 정도로 나약해져 있었다.

“크윽……!”

“……뭐야.”

“크흐흐……! 젠장! 이렇게 허무하게……!”

하성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악마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오히려 하성의 상태가 양호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쿨럭!”

하성이 새까만 무언가를 토했다.

피라고 하기엔 점성부터 시작해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크큭…. 여기까진가…. 끔찍한 전염병이군….”

“……전염병?”

깜짝 놀란 이현은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텐트로 호흡기 주변을 막았다.

보호 장막은 이미 활성화된 상태였기에 추가적인 조치는 필요 없었다.

“크크…! 이미 늦었다…. 근처에만 있어도 감염되는 전염병이니까…. 이걸로 사형은 예정대로 집행될 거다…. 예정보다 빠르게….”

“…그건 상관없다.”

“…뭐?”

“여기서 죽는다면 그것으로 내 역할도 끝이겠지. 내가 이렇게까지 절실했던 이유는 온갖 제한이었다. 연락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있고.”

“크크…. 그런가….”

이현은 하성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라면 하성을 기절시킨 후 봉인구를 채울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상태로 놈을 서울로 데려가 주민성 앞에서 직접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공유할 계획이기도 했다.

“전염병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군….”

“동감이다…. 크흐흐….”

“이왕 죽는 김에 원래 하려던 일이나 알려주면 좋겠는데. 그럴 리는 없겠지.”

이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하성의 머리를 조준했다.

이것으로 모두 끝이다.

“알려주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 이렇게 된 이상 마계에 돌아갈 수도 없을 테니….”

“…뭐?”

이현은 조준을 멈추며 물었다.

다시 되뇌어 봐도 하성이 자신이 하려던 일을 말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정말이냐?”

“아아…. 그래….”

“…….”

유언이라도 남기려는 건지, 딱히 조건도 걸지 않았다.

어차피 하성의 말대로라면 이현 역시도 전염병에 노출된 상태였고.

그저 누구는 빨리 죽고, 누구는 늦게 죽을 뿐이었다.

“우선 내 소개부터 다시 하지…. 나는 고문 기술자 벨라크. 이곳의 상식이라면 귀족도 아닌 일반 평민이랄까.”

한국의 경우엔 두 가지 루트로 악마가 발생했다.

하나는 협회장과 자신을 잠식하던 악마가 초대해서 찾아온 순혈의 고위 악마들.

그리고 하성처럼 유물에 봉인되어있던, 출신이 불분명한 악마들이었다.

하성은 후자에 해당했다.

“여기 있는 떨거지들과는 다르다…. 물론 여기선 내가 더 강하지만, 마계에선 이놈들이 기득권이거든. 크큭.”

“…….”

하성이 가리킨 대상은 다른 악마들이었다.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아아…. 악마는 보통 다른 차원에서 죽으면 마계로 송환되는데, 이번엔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야. 영혼 자체가 죽어가고 있음이 느껴져…. 씁쓸하구만….”

“…원래는 죽어도 죽지 않는 건가?”

“그래…. 너희에겐 생존이겠지만, 우리에게 대격변은 유희니까….”

유희의 의미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생긴 순간, 자극뿐인 이 세계는 게임처럼 보일 테니까.

“끔찍하군. 그래서 얻는 게 뭐길래….”

“…지분이 생기지. 이 세상에서 얻는 지분에 따라 마계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늘어난다….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 얼마나 많은 차원민을 죽였는지에 따라….”

“…….”

“물론 나에겐 이곳의 대격변이 장난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기회였지…. 단순 고문 기술자에서 고위 악마가 될 수 있었던….”

이현으로선 크게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애초부터 SSS급이었고, 그 이전에도 대기업 소속의 고연봉 기술자였으니까.

게다가 딱히 명예욕도 없었다.

“그냥 사는 대로 살면 되는 것을….”

“마계는 그런 곳이…! 쿨럭!”

하성이 다시금 새까만 무언가를 토해냈다.

“…후우! 분명히 나는 성공할 예정이었다…! 제대로 카오스 게이트에도 권한을 사용했고…! 쿨럭!”

“…….”

“어째서! 대체 어째서 하는 일마다 풀리질 않는 거냐…!”

하성의 눈은 실핏줄 전부가 터진 것처럼 새빨갰다.

그만큼 억울하고 화가 난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하성은 너보다 훨씬 억울할 거다.”

눈앞의 있는 악마는 하성이 아니었다.

벨라크였다.

그리고 한때 긴 시간을 악마에게 잠식되었던 이현은 하성의 심정을 아주 절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 악마도 그랬겠지….”

“…뭐?”

“나도 하성과 같은 처지였다. 정작 몸 주인은 따로 있는데. 자기 사정만 따지고 있고. 하하….”

김정남은 하성의 목을 졸랐다.

“…크윽!”

더 들을 것도 없었다.

결국 자신의 명예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고 짓밟았던 이야기일 뿐.

“하성에겐 미안하지만…. 전염병은 어찌 치료할 방도도 없고…. 네놈은 내 손으로 꼭 죽이고 싶어서 말이야.”

“…크아아!”

“하아…. 그 사람이라면 분명 방법이 있었을 텐데….”

주민성에겐 악마에게 잠식되어버린 능력자를 구해낼 방법이 있었다.

이현 또한 수혜자였고.

“…크윽! 크으으!”

“전염병만 아니었어도…. 어라?”

그 순간, 이현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미안하지 않을 방법이…. 있었잖아?”

이현은 빠르게 손아귀의 힘을 풀고 하성에게 말했다.

“사형 집행. 해제해라. 어차피 죽는 마당에 거래고 뭐고 필요 없잖아?”

“…커헉! 헉!”

“어때?”

악마는 말했다.

영혼 자체가 죽어간다고.

그리고 이현은 자신을 잠식했던 악마가 어떻게 처분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영혼 자체를 보내버렸다고 했었다.

“…집행 해제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러는 거지?”

“어차피 나도 죽는다며?”

이현은 주민성이 가끔씩 짓던 사악한 표정을 떠올리며 모방했다.

악마라면 이런 표정이 먹히지 않을까 하며.

물론 도박이었다.

지금의 전염병이 악마에게만 적용되는 특이한 종류의 병이 아닐까 하는 가정이다.

악마의 영혼만 죽는다면, 하성이라면 분명 자신의 신체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

“사형 집행만 해제해라. 마지막 가는 길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

“…….”

그 증거는 이미 주변에 있었다.

게이트의 몬스터는 너무나도 멀쩡했고, 고통받는 건 오로지 악마뿐이었으니까.

“…….”

“…….”

대치는 길었다.

그 사이에도 주변의 악마들은 하나둘 죽어갔다.

덕분에 확실한 증거가 발견됐다.

주변에서 생기가 하나둘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염병은 고스란히 악마만 죽어나가는 병이었다.

“너도 눈치챘지?”

“…….”

팟.

이현은 공간 점멸을 이용해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키곤 빠르게 복귀했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사형 집행 해제뿐이다.”

그제야 이현은 깨달을 수 있었다.

대격변이 여태 알던 것과는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걸.

이상한 수단을 앞세우며 괴롭혀오는 악마만 사라진다면.

오직 몬스터만이 상대라면, 인류에겐 가능성이 있었다.

“…….”

곧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형 선고가 해제되었습니다.]

[발언권 제한이 해제됩니다.]

[정보 전달 제한이 해제됩니다.]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고맙다.”

“…허무하군.”

이현은 하성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다시 한번 공간 점멸을 하기 위함이었다.

“돌아간다. 서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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