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황 (1)
(232/250)
전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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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 (1)
2022.07.21.
묘한 기분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은 느낌이랄까.
‘해준 것도 딱히 없었는데…….’
이장호에게 해준 거라곤 그저 목숨을 살려 준 것.
그리고 인천 게이트에 박아 둔 것뿐이었다.
‘이렇게 알아서 잘 적응해 주리라곤…….’
의도엔 없었던 새로운 조력자가 생겼다.
주민성은 이 감정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했다.
애초에 부모님의 존재부터가 주민성을 계속해서 흔들어놓고 있었다.
차라리 알아보지 못했으면 모를까, 알아본다는 건 다른 얘기였으니까.
“대장님?”
“……아아. 가시죠.”
주민성은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고 사람들을 부축해 격리공간을 빠져나왔다.
“음?”
당연히 이를 가장 먼저 포착한 사람은 장 박사.
나름의 장사를 마치고도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여전히 라면 연구에 한창이었다.
“결국 구해낸 건가.”
당연하게도, 장 박사는 인벤토리에서 가장 오래 지낸 주민이다.
내부에 갇혀있던 사람들 정도는 당연히 봤을 테고.
“구경만 하지 말고, 사람들 부축 좀 도와주라.”
“그러지.”
주민성과 이장호, 그리고 11번 세입자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옮겼다.
소란 덕분인지 다른 세입자들도 합류하기 시작했다.
“……사술에 당했군.”
“축복을 견디지 못한 거겠지.”
“축복 아니에요! 색깔부터가 나쁘다고요!”
“논쟁은 나중에 하고, 도와주십쇼.”
세입자들에게도 주민성의 의견은 상당히 큰 지분을 차지했다.
물론 라면이 인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도움을 받은 덕분에 사람들을 빠르게 구해내는 데엔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여태 갇혀 있던 이들의 케어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바깥에서 치료받기보단 여기서 요양하는 게 도움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인벤토리 바깥이 평범했다면 얘기야 다르겠지만, 지금은 여전히 대격변이다.
광휘의 날개로 어둠을 거둬 냈다 한들 수평선 너머는 여전히 어둠에 뒤덮여 있었고.
‘굳이 지금 성아영을 부를 필요는 없겠지.’
인벤토리의 장점이라면 수없이 많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장 유용한 장점이라면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
이전엔 카오스 게이트와 엮여서인지는 몰라도 바깥과 1:1로 시간이 흐르며 스크린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바깥의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스크린도 보이지 않는다.
“김경태 씨. 그리고 이승아 씨라고 했었죠.”
“맞습니다.”
주민성은 생존자 명단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여왕벌의 권능을 통해 누군가를 부르려면 대상이 명확해야 하니까.
* * *
한편, 성남에 자리 잡은 임진석은 오늘도 어김없이 콩이와의 산책에 한창이었다.
이젠 생존자들도 제법 많은 동네가 되었지만, 신경은 오로지 콩이에게만 쏟았다.
당연히 주변은 어둠에 휩싸여 있다.
“젠장. 보급 한번 더럽게 느리군.”
“컹! 컹!”
천상의 안개에 대해선 이미 들었다.
문제는 이곳이 상대적으로 주민성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지역이라는 게 문제였다.
주민성은 아직 여의도와 수도권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임진석이 머무는 동부의 환경은 여전히 열악했다.
“그래도 상관없겠지. 이 주변은 마석 질이 좋으니까.”
기어코 성남 게이트에 자리 잡은 이유는 간단했다.
A급 수준의 게이트가 밀집된 이곳은 콩이에겐 뷔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컹!”
콩이의 전투력은 이제 데빌도그 수준이 아니었다.
A급 몬스터 중에도 유독 빠르기로 유명한 미스트 러너까지 따라잡을 정도였다.
콰직!
콩이는 순식간에 미스트 러너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데 성공했다.
“옳지. 잘했다.”
“컹!”
임진석의 도움은 없었다.
요즘의 콩이는 임진석이 손댄 몬스터는 기분이 나쁘다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공격하질 않았으니까.
어차피 어두워서 앞도 잘 보이지 않았기에 잘된 일이었다.
“컹! 컹!”
그뿐만이 아니었다.
임진석의 주변엔 어느새 수많은 데빌도그들이 있었다.
데빌도그의 매력을 깨닫게 되면서 길들인 녀석들이었다.
“후후…. 이젠 굳이 최면까지 걸지 않아도 되겠어.”
처음엔 임진석에게 호감을 갖게 만드는 최면이었다.
몬스터에게 무슨 기괴한 짓이냐 물어올 사람은 없었다.
임진석을 상대로 그런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생존자는 이 시국엔 존재하지 않는다.
“컹!”
“커컹!”
수하가 생겨서일까.
콩이도 조금은 달라졌다.
마석을 전부 먹지 않고 맛있는 부분만 골라 먹는 느낌이었다.
남은 마석은 다른 데빌도그들이 처리한다.
콰직! 콰드득!
흐뭇한 광경이었던 걸까.
임진석의 얼굴엔 어울리지 않게도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모르겠군.”
그 순간, 콩이에게 향하는 수상쩍은 인기척이 감지됐다.
“마수가 어째서 여기에?”
너무나도 노골적인 인기척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혼잣말조차 숨기지 않는다.
“크큭! 이 녀석들이라면 가능성 있겠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근처 골목길.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임진석의 공간지각력은 누구보다도 탁월했다.
임진석은 심드렁하게 인기척을 향해 말을 걸었다.
공간 절단과 함께.
“묻겠다.”
쉬이익!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교묘하게 절단된 공간을 회피했다.
“……음?”
“방금 내 애완동물을 탐내던 것 같은데.”
그제야 인기척이 가까이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애완동물? 설마 마수를 애완동물 취급하는 건가?”
인기척은 마수를 탐내고 있었고, 인기척이 말하는 마수는 콩이임이 밝혀졌다.
“아아. 정리됐다. 네가 그 악마구나.”
“……그런 너는 겁이 없는 인간이구나?”
당연하게도 임진석 역시 주민성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었다.
협회장조차도 없는 지금, 유일하게 두려운 상대가 바로 주민성이었으니까.
“잘됐군. 이 기회에 최대한 공적이라도 쌓아서 더 멀리 떠나고 싶었는데.”
“아아. 그럼 나도 잘됐다고 해주지. 목표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둘의 목표는 달랐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상황.
악마가 서 있던 공간이 그대로 절단되기 시작했다.
콰르르르!
당연히 주변 지형지물은 임진석의 능력을 버텨낼 수 없다.
스치는 모든 게 썰려나간다.
“……놀랍군. 이 몸뚱이의 주인보다 훨씬 강력한 인간이라니.”
임진석은 손전등을 꺼내 악마의 얼굴을 향해 집어 던졌다.
“……모르는 얼굴이군. 너는 잔챙이가 확실하다.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악마라니.”
“이 몸은 S급 능력자일 텐데? 허세가 좀 심하지 않나?”
“……정 믿어지지 않으면 공격해 보든가.”
눈앞의 악마가 S급 능력자의 몸을 빼앗은 것은 사실이었는지 어마어마한 출력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뿐.
임진석은 S급 능력자를 기억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출력이라면 무조건 임진석 쪽이 우위였으니까.
“……너는 그 말을 후회하게 될 거다.”
“내가 할 말을 하는군.”
“……!”
악마가 빙의한 대상은 분명 S급이 맞았다.
분명 그에 걸맞은 거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능력 보여준다며?”
“……크윽! 크아아아!”
어느새 임진석의 표정엔 여유가 가득해져 있었다.
능력을 사용할 준비는 끝났지만, 능력이 사용되진 않는 상황.
이 시간이 지속될수록 부담을 받는 쪽은 능력을 준비 중인 악마뿐이었다.
“끄아아아아아!”
승부는 이미 끝나있었다.
임진석이 손전등을 던진 순간부터.
“이런 능력은 처음 겪어 보나? 악마는 대체로 경험이 부족한 녀석들뿐이군.”
놀랍게도 임진석이 마주친 악마는 눈앞의 상대가 처음이 아니었다.
콩이를 산책시키면서 수없이 많이 겪어왔다.
임진석의 몸을 탐내는 악마들이 알아서 찾아와줬으니까.
“계속 그렇게 능력 준비만 하다 죽어라.”
“아, 안 돼애애애!”
피빗! 핏!
녀석의 모세혈관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몸이 능력을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멍청한 놈.”
절단 능력은 페이크였다.
진짜는 손전등을 던져 대상이 정해진 순간의 최면.
임진석은 대격변을 통해, 그리고 콩이를 지켜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경험을 지금도 쌓아가고 있었다.
지금의 공격 역시 손쉽게 악마를 처치하기 위해 터득한 노하우였고.
콰드드득……!
상대는 결국 자신의 출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몸뚱이가 먼저 무너져내린 것이다.
그 외엔 달리 어울리는 표현이 없었다.
“컹! 컹!”
“못 볼 꼴을 보여줬구나. 미안하다.”
어느새 다른 몬스터 사냥을 마친 콩이가 돌아왔다.
“자.”
주머니에 있는 디저트용 마석을 노린 모양이다.
“컹!”
벌써 오늘 하루에만 열세 번째였다.
악마가 콩이를 노리고 찾아온 건.
“이 정도면 주민성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후후….”
* * *
같은 시각.
최선호와 김정남, 유호영은 팀을 이뤄 튜토리얼 탑을 지키고 있었다.
“응애!”
“…….”
이번 튜토리얼 탑 방문자도 아기 고블린이었다.
최선호는 최선아의 영상통화를 유지한 채로 고블린의 신원을 파악했다.
“스무 번째 고블린. 맞지?”
-드디어 불룽이도 도착했구나? 맞아. 스무 번째.
“……알았어. 통과시킬게.”
-응!
여의도 주변엔 최선아의 몬스터 강화를 거친 아기 고블린들이 바글바글했다.
아기 고블린들의 튜토리얼 탑 입장은 봉춘향의 판단이었다.
-이제 고블린들이 머물 구역이 부족합니다. 이전에 대장님이 얘기했던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당연히 주민성의 의향과도 일치한다.
일정 강화 단계를 거친 고블린은 굳이 주변을 지키는 것보단, 튜토리얼 탑을 통해 그 이상을 추구해도 되는 경지였다.
이 과정만 거치면 고블린을 배치할 수 있는 구역은 훨씬 광범위해질 터였다.
“여의도가 이렇게 안전한 동네였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쟁터 그 자체였는데 말이죠…….”
이번 방문자 불룽이도 보통은 아니었다.
손에 쥐어진 앙증맞은 철근에는 온갖 몬스터의 흔적이 가득했으니까.
어지간한 침입자나 주변을 배회하는 몬스터는 전부 아기 고블린의 강화 재료로 산화됐다.
“조만간 저희에게도 자유시간이 생기겠네요.”
이런 변화를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최선호였다.
추방자와 건물주라는 두 종류의 사기 능력을 갖춘 최선호는 이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상태였다.
이런 모습에 유호영이 물어왔다.
“정말로 되겠어? 그 정도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잖아.”
“될 때까지 해 봐야지 뭐. 당장 저 튜토리얼 탑만 봐도 피가 끓어오르는데.”
튜토리얼 탑의 디자인은 현대 양식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었다.
게임 속에서 흔히 볼 법한 판타지 양식이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나였으면 수련을 위해 더 강한 몬스터들과 싸워 볼 텐데.”
“정답은 없어. 당장 건물주 능력만 해도 민성이 형이랑은 완전히 다르게 성장해 버렸으니까.”
성장한 건 추방자 능력뿐만이 아니었다.
건물주 능력도 함께였다.
주민성이 현실 노가다에 특화됐다면, 최선호는 게임 속 노가다에 특화된 인간이었기에 더더욱 능력에 쉽게 적응한 케이스였다.
쿠르르르……!
튜토리얼 탑 문이 열렸다.
“응애!”
아기 고블린은 인사를 마치곤 튜토리얼 탑을 향해 아장아장 기어갔다.
쿵!
아기 고블린이 탑 내부에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응헤헤…….”
그와 동시에, 귀엽던 아기 고블린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음침한 아기 고블린의 웃음소리만이 남았을 뿐.
“응헤헤헤헤…….”
아기 고블린 불룽이는 다른 아기 고블린과는 달랐다.
“웅헤!”
최초로 악마를 사냥한 아기 고블린이었다.
그 덕분에 불룽이는 숨겨진 진화 방법을 터득했다.
“웅헤헤……. 우헤…….”
콰드득!
불룽이의 날개뼈가 박쥐처럼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날개뼈에 새살이 돋아났다.
“웅헤!”
악마의 날개가 달린 아기 악마 고블린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우헤헤헤…….”
물론 불룽이는 튜토리얼 탑이 뭔지 잘 모른다.
고블린들의 성녀로 추앙받는 최선아가 점지해 줬기에 도착했을 뿐.
하지만 탐욕의 화신인 고블린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을 거침으로 자신이 한 단계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걸.
“우헤….”
“…….”
불룽이의 아장거림이 멈췄다.
거대한 고블린의 다리가 앞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룩.”
“우, 우헤….”
“크룩….”
“키엑….”
악에 물들어갈 계획이었던 불룽이는 정신을 차렸다.
아장거림을 멈추고 두 발로 섰다.
애초에 악마종 고블린으로 진화했기에 두 발로 걸을 수도 있었다.
사족보행은 그저 콘셉트였을 뿐.
“크룩.”
그런데 하필 눈앞의 고블린이 크룩스였다.
불룽이는 빠르게 자신의 악의를 조절했다.
“키에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