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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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 (2)
2022.07.20.
“……끔찍한 수준입니까?”
“네. 이 정도면 악의 덩어리 그 자체입니다. 심지어 성장하는 저주로 추정되는데요.”
이장호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직!
“큭! 보이시죠?”
“맙소사…….”
이장호의 손끝이 검게 물들었다.
“이, 이 저주는 고대 제국을 파멸시켰던!”
11번 세입자도 아는 저주였던 모양이다.
주민성은 이장호의 손을 자세히 살폈다.
피부의 괴사가 빠르게 시작되는 상태였다.
주민성은 빠르게 텐트라도 조치하려 했지만, 오히려 이장호가 사양했다.
“아아. 이건 텐트보단 해주 쪽이 효율이 좋습니다. 아예 디폴트를 죽음으로 정의하는 저주라서요.”
“그, 그렇습니까?”
게다가 이장호는 주민성이 가진 건물 부가효과의 연구마저도 끝낸 상태였는지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이다.
지금의 저주는 건물 부가효과로도 억누를 수 없는 저주인 모양이다.
이장호의 말이라면 믿을 만했다.
도리어 11번 세입자의 존재감이 크게 떨어졌다.
둘은 말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이 세계의 마법사인가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네요…….”
“아아. 맞아요.”
“그럼 여기선 저분이 유일한 전문가니까 지켜볼게요.”
일단은 가만히 관망하려는 듯하다.
파스슥!
이장호가 능력을 사용함과 동시에 손끝에 모인 검은 기운이 사라졌다.
그의 전매특허 능력인 해주 능력이었다.
“후우. 정말 일부만 노출되었을 뿐인데 지독하군요.”
“방금 저주는 단순히 피부 괴사는 아니었죠?”
“예. 아까 말했듯 신체를 죽음 상태로 만드는 저주입니다. 텐트로는 회복시킬 수 없는 저주에 해당되고요. 저주에 걸린 채로 텐트에 들어가면 죽음이 가속될 겁니다.”
“와…….”
이 역시도 주민성을 노린 저주였던 걸까.
협회장은 쓸데없는 부분에서 엄청나게 방비를 해둔 상태였다.
“해주 꽤 힘들어 보이시는데, 이러다 탈진 오는 거 아니에요?”
“아아……. 맞습니다. 저주 하나하나가 너무 지독해서, 하루에 하나 정도로 해주가 가능하겠죠.”
“흠…….”
하루에 해주 하나.
이것만으론 곤란했다.
아무리 인벤토리에서의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한들, 시간은 멈춰 있지 않았으니까.
“아까. 성장하는 저주라고 하셨죠?”
“예. 맞습니다.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 목숨 정도는 손쉽게 빼앗을 정도로 성장했죠.”
“다행이다.”
“……네?”
그냥 단순히 지독한 저주보단, 성장하는 저주가 훨씬 나았다.
주민성에겐 성장을 무효화시키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저주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건 어때요?”
“저주가 갓 생성된 그 시기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쉽습니다. 이래 보여도 해주 업계에선 꽤 고평가를 받아왔던지라.”
“훌륭합니다.”
덕분에 허들이 낮아졌다.
예상대로라면, 이장호는 며칠 안에 대부분의 저주를 없앨 수 있을 터였다.
“그보다……. 시간을 과거로 돌린다는 가정이 참신하군요. 그런 능력은 왜 여태 발견되지 않았는지 의문이기도 하고요.”
“가정 아닌데요.”
“……네?”
“과거로 되돌리는 능력. 저한테 있거든요.”
“……느에?”
이장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민성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농담이라고 말해 주길 바라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서, 설마요…….”
“진짠데…….”
주민성은 이장호가 손을 댔던 부분을 향해 능력을 사용했다.
그것도 공간 전체를 향해.
‘시간 역행. 저주.’
[지정된 대상을 과거의 상태로 되돌립니다.]
파지직! 파직!
시간 역행 능력을 사용하자 격리 공간 주변에 새까만 스파크가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농담이 아니라니!”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주민성은 그저 최대한 저주가 초기 상태로 되돌아가기만을 바라며 집중할 뿐이었다.
쿠구구구……!
십여 분이 지났다.
이장호에겐 더 이상 경악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텐트에 들어가 힘을 회복해두는 게 최선이었다.
“허억! 헉!”
주민성은 한계까지 능력을 사용하곤 제자리에 쓰러졌다.
여기서 조금만 더 능력을 사용하면 탈진이 확실했다.
“후우…! 이 정도면 됐습니까…?”
“이, 이런 기적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이장호는 저주를 조심스레 손으로 감쌌다.
손길엔 흡사 경건함마저 담겨 있었다.
“이렇게 순수한 저주라니……. 이건 분명 귀한 자료가 될 겁니다…….”
스르르…….
이장호의 손에 닿은 저주는 그대로 끈적하게 녹아내렸다.
이젠 한눈에 힘의 격차가 보였다.
지금의 저주는 피부를 괴사시키지 못한다.
“전부. 전부 해주하겠습니다. 해주 끝난 녀석은 따로 챙겨도 될까요? 대격변을 종식시키는 데 참고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요…….”
주민성에겐 텐트를 얼굴에 덮은 채로 대답하는 게 고작이었다.
츠츳! 파슷!
공간 전체를 뒤덮은 저주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턴, 저주가 미약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만큼 이장호는 압도적으로 저주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해주 끝나면……. 깨워 주세요…….”
“알겠습니다!”
탈진까진 아니었지만, 극심한 피로가 몰아쳤다.
저주 전부의 시간을 과도하게 되돌린 탓이다.
어차피 이장호는 건물 이용자였기에 맘 편히 자도 상관없었다.
“대장님. 끝났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눈을 다시 뜨자 상쾌한 표정의 이장호가 포착됐다.
그리고 곁엔 어디서 꺼냈는지 알 수 없는 깃발을 흔들고 있는 11번 세입자가 눈에 띄었다.
“11번 씨? 뭐 하세요?”
“승리의 깃발이에요. 저희 제국의 염원이 담긴.”
“아아.”
깃발 때문이었을까.
왜인지 몸 상태가 평소 상태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건물 부가효과의 케어를 받을 때 점수가 8점이라면, 지금은 10점 정도.
완벽을 넘어 반쯤 업그레이드되는 수준이다.
“최고네요.”
“당연하죠! 보통은 전쟁할 때만 꺼내는 깃발이니까요.”
“……와우.”
저주의 시간을 되돌리는 건 무언가 다른 저주를 초래하는 걸까.
그만큼 11번 세입자가 보기에 주민성의 몸 상태가 나빴던 모양이다.
“아무튼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다음 공간으로 넘어갈게요.”
“네.”
주민성은 자신의 부모님이 갇힌 스크랩을 뽑았다.
이제 다음 공간으로 넘어가는 것이 당연한 상황.
하지만 공간이동은 이뤄지지 않았다.
“…음?”
“…으어어.”
“…….”
그 대신, 부모님 쪽이 이쪽 공간으로 옮겨졌다.
“사, 사람? 그보다 대장님! 이 사람들! 저주에 너무 오래 노출되었습니다!”
“……!”
이장호의 다급한 외침에 주민성은 재빨리 텐트를 꺼냈다.
하지만 그대로 씌울 수는 없었다.
이전에 들은 말이 있었으니까.
-아아. 이건 텐트보단 해주 쪽이 효율이 좋습니다. 아예 디폴트를 죽음으로 정의하는 저주라서요.
“이장호 씨! 이 저주는 무슨 저주죠?”
“잠시만요…. 살펴보겠습니다.”
이때, 11번 세입자가 끼어들었다.
“이 사람들. 정신이 너무 피폐해졌어요. 해주보단 제가 더 도움될 거예요.”
세입자가 다시금 깃발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미묘한 높낮이의 노래를 제창했다.
변화는 즉각적으로 발생했다.
“…으어. 여, 여긴….”
“허억…! 우, 우리 민성이는…!”
중년 여성 쪽.
정확히는 주민성의 어머니의 눈빛이 초점을 되찾았다.
“……!”
무어라 말이라도 하려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질 않는다.
“…괜찮으신가요?”
일단은 제3자로서 말을 거는 것이 최선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민성이니? 내 아들 민성이 맞니?”
“…….”
“민성이 맞아? 정말?”
다행히 세입자의 조치만으로도 정신은 돌아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여태껏 어떤 저주에 노출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동결되는 저주라…. 어떻게 보면 축복도 될 수 있는 저주였군요.”
“…그렇습니까?”
주민성의 어머니는 계속해서 주민성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마음은 계속해서 복잡해져갔다.
부모님의 이름조차도 여전히 알 수 없었으니까.
“크윽…. 이곳은….”
곧이어 주민성의 아버지도 정신을 차렸다.
그 역시 다르지 않다.
단번에 주민성을 알아봤다.
“아아…. 내 아들….”
“…….”
감정의 온도가 맞지 않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 아픈 문제였다.
주민성은 결국, 문제의 해결보단 사태의 해결에 중점을 두려고 했다.
“장호 씨는 저주 계속 분석해 주시고요. 세입자 씨는 깃발 조금만 더 흔들어주세요. 저는 이곳에 갇힌 사람들부터 구해내겠습니다. 협력 부탁드려요.”
“예.”
“알겠어요.”
사람을, 그리고 목숨을 구하는 행동이었다.
리스크는 없다.
이런 상황에 가만히 있는 건 가장 멍청한 행동이었다.
주민성은 다른 스크랩을 뽑았다.
“끄으….”
또 다른 중년 가족이 나타났다.
주민성은 계속해서 다른 스크랩을 뽑았다.
“응애!”
“…….”
끔찍하게도, 협회장이 가둬왔던 사람들 중엔 갓난아기도 있었다.
이런 아기 또한 인질이었을 것을 생각하자 협회장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심지어 이 공간의 입장 조건은 소주 한잔.
협회장은 이곳의 사람들을 눈요깃거리용 안주로 삼았을 터였다.
“협회장……. 개자식……. 찢어 죽여도 모자랄 놈.”
하지만 주민성은 이번에도 감정을 삼켰다.
공간의 저주가 풀린 이상, 지금은 사람들을 구해내는 게 최선이었다.
“…제발 여기서 내보내줘! 으아아!”
이미 미쳐버린 사람도 있었고.
“…….”
말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그 외에도 저마다 사연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대장님. 이분들에게 걸려 있는 저주도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만 한다면 내일쯤 바로 해주 가능할 겁니다.”
“…그건 좀 힘들어요.”
“…아아.”
시간 역행은 대상을 지정할 수 있었다.
대상에 따라 소모되는 정신력도 다르다.
문제는 이 점이었다.
대상이 저주에 쓰인 사람이라는 게.
지정 자체가 애매했다.
저주를 되돌림과 동시에, 그 사람이 쌓아온 시간이 되돌아갈 가능성이 있었다.
당장 눈앞의 부모님에게 시간 역행 능력을 사용하면, 부모님이 어려진다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는 더욱 깊어진다.
“…젠장.”
부모님이 걸린 저주는 시간이 동결되는 저주.
주민성의 또래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으니까.
‘못해도 25년은 되돌려야 할 텐데.’
대상의 시간은 동결되었지만, 저주의 시간은 동결되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리면야 저주의 해주는 가능하겠지만, 그 결과로 부모님은 많아야 두 살 남짓한 아기가 되어버린다는 소리였다.
이는 기억 자체를 잃어버릴 확률이 너무나도 큰 도박이었다.
“민성아…. 대답 좀 해주련? 우리 민성이 맞지?”
“…네. 맞습니다.”
건물 부가효과가 저주를 강화할 가능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영 거슬렸다.
주민성은 텐트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이장호는 팔로 엑스자를 만들어 반대를 확실하게 표명했다.
“후우….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이장호의 표정 역시 씁쓸하긴 매한가지였지만, 주민성만큼 심각하진 않았다.
“시간이야 좀 걸리긴 하겠지만, 괜찮을 겁니다.”
“…시간이요?”
“인천에 경태 씨나 승아 씨가 있잖아요.”
“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네?”
모르는 이름이었다.
아니, 알고 있다 하더라도 기억엔 없는 이름이었다.
“정신과 전문의 출신 김경태 씨. 심리 치료사 출신 이승아 씨요.”
“…아?”
그제야 주민성도 기억에서 이름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들 역시 인천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으니까.
능력을 각성하긴 했지만, 의사로서의 수입이 더욱 좋아 굳이 게이트를 다니지 않던 사람에 해당했다.
김 씨 아저씨와 박 씨 아저씨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케이스다.
“저주야 제가 하루 한 분씩 풀어드리면 되고, 가장 문제는 정신적인 문제인데. 이 부분은 그분들한테 맡겨보죠. 오히려 좋아하실 겁니다. 평소에 몸 쓰던 분들도 아니라 실적이 상대적으로 낮은 분들이거든요.”
“세상에….”
그동안 놓쳤던 부분이었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걸.
김경태와 이승아는 그저 주민성이 만든 룰에 맞지 않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고, 천천히 차근차근 해 봅시다.”“……알겠습니다.”
너무 앞만 멀리 본 나머지 가까운 사람들을 파악하지 못했다.
‘인프라도 좀 더 세부적으로 꾸릴 필요가 있겠군.’
주민성은 그 점을 자책했다.
그리고 순수히 이장호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큰 도움을 받게 되네요.”
“에이. 뭘요. 그래도 저희한테는 꽤 괜찮게 대우해주셨잖아요. 그런 덕분에 여기까지 이어진 거고.”
이장호는 갇혀있다 빠져나온 노인을 부축하며 시원스레 답했다.
“이분들. 얼른 바깥으로 옮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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