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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 브레이커 (3) (215/250)


룰 브레이커 (3)
2022.07.04.


무려 사람도 아닌 건물을 인질 삼았다.

당연히 주변에선 황당하게 반응한다.

“……튜토리얼 탑을 철거한다고?”

“어이가 없군.”

“무슨 권리로 그딴 소릴 하는 거냐!”

격하게 반응한다.

표면적으로만.

예상치 못한 상대를 만났다는 듯, 잔뜩 허세를 부리며 소리쳐 왔다.

‘이놈들. 겁먹었네.’

이런 대격변 시대에 살아남은 세력이라면, 저마다 양질의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뒤처진 이들은 대부분 더욱 큰 세력에 잡아먹혔거나 죽었으니까.

주민성과 핵심 인물들이 튜토리얼 탑에 진입했다는 정보를 얻었고, 여의도가 나름의 빈집이 되었다는 판단을 내렸을 터였다.

“철거. 못 할 것 같나?”

그런 상황에서 주민성이 나타났다.

이젠 강서구의 왕이 아니다.

서울의 왕이다.

본인이 얼마나 강하든, 일단 한발 물러서야 하는 그런 상대에 해당한다.

“우, 우리에게도 탑에 입장할 자격이 있다!”

“맞아! 입장만 하면 된다! 길을 내줘라!”

최근 서울의 왕이 가진 이미지는 이러했다.

협회장에게 인정받은 능력자.

10대 길드 일부를 흡수한 서울 초거대 세력의 수장.

이젠 신성과도 손발을 맞추는 수수께끼의 강자.

“…….”

주민성은 이들의 주장에 대답하지 않았다.

눈앞의 녀석들도 나름의 고위 능력자겠지만, 진짜배기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근처에 숨어있는 놈들은 지금도 은밀한 살기를 흘리며 주민성이 빈틈을 보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숨어있는 놈들은, 내 말이 믿어지지 않나?”

“…….”

주민성에 맞서던 몇몇 능력자들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아마도 숨어있는 놈들과 합을 맞추는 녀석이리라.

‘여차하면 진짜 철거해야 할지도….’

지금도 이미 전쟁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적군은 둘째 치고, 아군의 희생이 계속해서 늘어갈 터였다.

이미 인류는 대격변이라는 더욱 큰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심지어 몬스터는 끝없이 나타나고, 인류는 갈수록 줄어갈 수밖에 없는 불리하기 그지없는 전쟁이었다.

때문에, 전면전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좋았다.

건물 철거라는 초강수를 둬서라도.

“…….”

“…젠장.”

다행히 녀석들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유독 잠자코 있던 녀석.

그리고 근처에 숨어있던 녀석들에게서.

놈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대표 격으로 보이는, 가장 위험한 기운을 내뿜는 남자가 말했다.

“서울의 왕. 거래할 생각 없나.”

“거래? 갑자기 무슨 소리야! 거래라니!”

“닥쳐라. 패배자들은. 지금부턴 나와 서울의 왕이 대화하는 자리다.”

남자는 거래를 제안해 왔다.

심지어 수하들과도 의논하지 않았는지 반발이 제법 있다.

“거래라.”

“그래. 거래. 너와 나라면 분명……!”

거래라면 나름 평화적인 방법이었다.

스미스라는 훌륭한 사례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의 거래는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말을 끊어 역으로 물어보고 싶었다.

“네가 뭔데?”

“……뭐?”

“나는 서울의 왕 소리까진 듣거든? 거기다 신성, 서풍, 아린까지 함께야. 그래서 넌 뭔데?”

눈앞의 상대가 강하다는 건 알겠다.

부산에서도 나름 유명할 테고, 그만한 권위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윽박도 지를 수 있을 터였다.

“어이가 없네.”

하지만 모르는 얼굴이다.

즉, 대격변 이전의 유명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주민성은 어설픈 사투리로 상대방을 도발했다.

“너 부산 쪽 세력이지? 그럼 이렇게 말하면 되나. 니 좀 치나?”

“으, 으으……! 건방진……!”

거래를 하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의 신용을 증명해야 했다.

그 이후 시작하는 것이 거래다.

“쫄따구 말고. 대가리 불러 온나. 최철진이 어딨는데?”

“감히……! ■■님을 모욕하다니!”

최철진을 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가 들렸다.

만물 소통은 적용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악마들의 것과 거의 흡사한 발음이었다.

“오호라.”

이로써 주민성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거래를 제안한 남자는, 유물에 잡아먹힌 능력자 중 한명이라는 걸.

동시에 부산 빌런 세력의 대표인 최철진 역시 상당한 거물급에게 잡아먹혔다는 정보도 함께 유추해볼 수 있었다.

‘최철진은 카오스 게이트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지.’

주민성은 협회장과 신성이 주도하던 카오스 게이트 지분싸움 당시를 떠올렸다.

최철진이 본격적으로 서울에 관심을 가진 시기가 그때부터였으니까.

[대규모 투자!]

[최철진 님께서 1억 5000만 원 후원하셨습니다.]

당시 후원 금액은 하성이 1억.

최철진이 1억 5000만 원이었다.

협회장과 신성 회장의 투자한 금액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작았지만, 절대 얕볼 수 없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이런 거금이 투자된 시기가 대격변 도중이었기 때문이다.

‘신명철급 재벌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미리 돈을 준비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돈의 가치는 급격히 추락했다.

은행을 털어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마석 금고에 쏟을 노력으로 식량을 확보하는 쪽이 훨씬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딱 떨어지는 금액이었지. 급하게 마련한 돈도 아니었다.’

대격변 생존자들에게 화폐는 식량이나 의약품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여기에 술과 담배, 커피 등의 기호품이 수요가 있다.

반면, 마석의 가치는 급격히 줄었다.

심지어 몬스터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안전하게 마석을 확보하기엔 더욱 힘들어진 상황.

이런 리스크가 생겼음에도 지금의 마석은 환전이 되질 않아 화폐로서의 가치를 잃었다.

물론 마석 관련 용품 충전 용도로는 쓰이긴 한다.

용품을 사용하는 사람이 대부분 중견급 이상의 능력자라서 그렇지.

그들은 마석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위의 흐름은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짙어졌다.

‘수도권이 아님에도.’

주민성은 노아의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선언했었다.

세력권 안에서는 화폐의 가치를 인정해 주겠다고.

그 덕분에 강서구와 인천, 안산 게이트에선 제대로 된 경제활동이 가능하게 됐다.

시세에 어느 정도 변동이 있긴 했지만, 나름 빛과 소금의 삼각지대라든지 젖과 꿀이 흐르는 행복 게이트라든지, 빛빛빛 빛빛빛빛 등의 긍정적인 별명들을 얻게 됐다.

근처의 생존자들 또한 현금을 최대한 챙겨 이쪽으로 계속해서 모여드는 추세였고.

하지만 지방에선 주민성의 영향력보단 지역의 강자들이 저마다의 질서를 새로이 구축한 상태였다.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당연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같은 생존자의 눈치까지 봐야 한다.

이 녀석들은 그러한 모든 리스크를 짊어지고 튜토리얼 탑에 올인했다.

“커헉! 커억!”

“……!”

남자는 어느새 주민성에게 목덜미를 잡혀있었다.

놈에게선 역겨운 피비린내가 끝없이 진동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모양이다.

“가까이 오지 마라. 전부 죽기 싫으면.”

악마어가 튀어나올 때부터, 놈은 이미 제압당해 있었다.

“크르륵! 크륵!”

“유물 주제에 감히?”

감히라는 소리 또한 갑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너희들이 무서워서 인질극을 하는 게 아니야. 나름의 인류애였다고. 이 쓰레기들아.”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악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놈은 죽지 않는다.

꾸드득!

“최철진 어디 있어.”

“크르르르!”

“아니. 됐다. 내가 찾고 말지.”

놈은 분명 여의도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튜토리얼 탑이 눈앞에 있는 이상, 부산에서 숨어 부하들만을 보내 올 리가 없었으니까.

“똑똑히 들어라. 악마.”

“그륵! 그륵!”

“거래는. 내가 거래할 마음이 생길 때. 그때 제안하는 거고, 너희들은 그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했다.”

물론 주민성이 생각하는 거래 내용은 놈들이 수용할 수 없는 범위였다.

유물에 빙의된 능력자 전원의 신병을 이쪽에 넘기라고 요구할 예정이었으니까.

당사자들은 당연히 거절한다.

주민성이 희망을 가진 대상은 그나마 유물에 빙의되지 않은 능력자들이었다.

“너희들의 대가리가. 여태까지 알던 대가리가 아니라는 걸 너희들이 더 잘 알았을 텐데.”

“…….”

적어도 아린과 일살은 그랬다.

내부적으로 명일학과 하성이 변했다는 걸 진작부터 인지했었다.

물론 명일학의 빙의는 조기에 제압했고, 일살은 하성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와해 됐지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튜토리얼 탑이고 뭐고, 내 식구들을 건드린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말을 마친 주민성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놈의 눈은 충혈된 걸 넘어 전체가 새까매진 상태였다.

유물에 깃든 악령이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영혼 재배치. 태양의 순례지.’

태양의 순례지는 지금도 과부하 상태인 걸로 추정되지만, 이만한 쓰레기 처리장이 없다.

일단 쓸 수 있는 데까지 쓰자는 게 주민성의 생각이었다.

“끄어어어어어!”

이것으로 제압은 끝.

방금의 대화로 최철진을 찾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적어도 이곳에 쳐들어온 모든 능력자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데엔 충분했다.

털썩!

주민성은 악령이 빠져나가고 의식을 잃은 남자에게 텐트 천을 덮으며 말했다.

“항복하든지. 뒤지든지 선택해.”

“…….”

살지도 모르는 선택지와 무조건 죽는 선택지가 제시됐다.

망설이는 모습이 보인다.

순간 최철진의 보복이 두려워서일까도 고민했지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자신들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태도였다.

2인자로 추정되는 남자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죽기 전에 정정하지.”

“……뭐?”

남자에게선 사투리 섞이지 않은, 차분한 억양이 흘러나왔다.

“네가 말하는 대가리는. 전부 죽었다. 우리의 목숨을 살리는 대가로. 연합을 창설하는 대가로.”

“…….”

주민성이 잘못 예측했던 부분이 있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최철진을 따르던 이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먼저 죽은 형님에겐 미안하지만,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죽음 따위 두렵지 않아……. 두려운 게 있다면, 기회가 사라지는 쪽이 훨씬 더 두렵겠지.”

“…….”

이들에겐 튜토리얼 탑에 대한 탐욕 쪽이 훨씬 컸다.

튜토리얼 탑은 지금의 능력이 무엇이든, 새로운 능력을 추가로 부여해주는 탑이니까.

2개의 능력을 가진다는 건, SS급 능력자만이 가지는 대표적인 특권이었다.

“…….”

주민성은 침략자들이 느꼈을 감정에 이입했다.

“낭만은 있다고 해 줘야 하나…….”

이렇게까지 악이 받쳤다는 건, 그만큼 당한 게 많았다는 소리였다.

선하고 올바른 방향은 기대도 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떠올릴 만한 사건이라면 기존의 조직이 최철진을 비롯한 강자들에 의해 와해되고 유물을 빼앗기는 시나리오 정도.

자신의 세력이 눈앞에서 새롭고 거대한 힘을 차지할 기회가 날아갔다는 박탈감이 어마어마했을 터였다.

이들을 이끌던 리더의 죽음은 더욱 큰 상실감을 초래했고.

“근성이 있다고 해줘야 하나…….”

유물의 부작용을 꿰뚫어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새로운 질서가 갖춰진 서울과 달리 지방은 약육강식의 야생 그 자체였으니까.

단순히 힘이 전부인 세상이다.

“당신이 탑에서 나온 이상, 이 포위망을 살아서 돌파할 가능성은 없겠지……. 아쉽군. 적어도 우리만큼은, 죽더라도 탑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은 채 죽고 싶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어마어마한 집착.

이런 점이 주민성에겐 상당히 고득점으로 작용했다.

대격변이기에, 이런 무식하리만치 집요한 성격은 통할 수밖에 없다.

“아쉽지만, 더 할 말은 없다. 죽여라. 그리고 최철진을 조심해라.”

이들에게 튜토리얼 탑은 신분 상승의 기회이자 그동안의 설움을 한 번이라도 떨쳐낼 도전권과도 같았던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주민성은, 이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선사했다.

“취소다.”

“……뭐?”

“아까의 제안. 취소라고.”

“……우릴 동정하는 건가?”

주민성은 그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동정은 무슨. 여태 해오던 것처럼, 겪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바뀐 대가리를 받아들여라.”

“……무슨 소리냐.”

“대충 너희들 이용하겠다는 소리지. 튜토리얼 탑 도전권? 살아남으면 줄지도 모르고.”

튜토리얼 탑 도전권이라는 동기부여도 심어줬다.

이는 동시에, 삶에 대한 집착도 함께 심어주는 말이었다.

‘눈치 보며 탑 입장 미루던 사람들보단, 간절한 사람을 써먹는 게 낫겠지.’

눈앞의 적들을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음에도, 주민성이 배신당할 일은 없었다.

이들 또한 건물주 능력에 노출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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