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 게이트 (6)
(206/250)
카오스 게이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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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게이트 (6)
2022.06.25.
주민성이 텐트에서 빠져나올 땐 혼돈의 존재 반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태양의 순례지에서 그랬듯, 이 녀석들은 철저한 약육강식이었기 때문이다.
혼돈이란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크르르……. 내 상점…….”
주민성은 인벤토리에서 분노 꽃 한 송이를 꺾어 혼돈의 존재에게 내밀었다.
그리곤 넌지시 말했다.
“훌륭하군.”
“크큭! 이제 나는 상점을 받을 수 있는가?”
“아니. 부족하다.”
위령제 3막에 대해선 전부 알게 됐다.
앞으로의 목표에 혼돈의 존재가 필요 없다는 것도 함께.
“크하하하! 이래도 부족하다니! 과연 새로운 게이트의 주인!”
사자와 비슷하게 생긴 혼돈의 존재가 주민성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더 많은 죽음을 원하는가?”
심장이 꿰뚫릴 듯한 시선.
건물 부가효과 덕분에 공포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이로써 혼돈의 존재는 가장 강한 개체만이 남을 터였다.
주민성이 개입할 시기는 그때였고, 지금은 아니다.
“이제 상점은 한 번만 뿌릴 거야. 오직 한 명에게.”
“그런가. 그게 네 뜻인가.”
“응.”
지금부터 서로 죽이라는 대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대답이면 충분했다.
“좋다.”
콰지직!
혼돈의 존재는 주민성을 위한 지원군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혼돈의 위령제를 위한 지원군이다.
상점을 이용해 이현을 구출해낸 것은 별개로 위령제의 지분을 협회장이 대부분 가진 것도 변치 않는 사실.
세력의 절댓값 자체를 깎아낼 필요가 있었다.
“…….”
목숨마저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고 죽이는 싸움은 생각보다 훨씬 박력 넘쳤다.
수준은 말할 것도 없었고.
혼돈의 존재들이 카오스 게이트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미래는 인류 멸망을 장담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
개체 수는 줄어드는 반면, 전장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진심으로 강한 녀석들만 남은 탓이다.
그런 와중에도 주민성과 텐트 속 혼돈의 존재에겐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는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혼돈의 위령제 2막이 시작됩니다.]
위령제 2막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고대의 원혼들이 등장합니다.]
[이미 멸망한 차원과 연동됩니다.]
[멸망한 차원의 영혼이 입장 권한을 획득합니다.]
2막에 대한 설명도 간략하게 있었지만, 주민성에겐 더욱 구체적인 정보가 있었다.
-2막은 징벌제! 원혼의 사연을 듣고 차원 경매에 대한 권리를 정당화하는 절차다!
이를 종합해 보자면 대충 멸망한 차원의 원혼들의 사연의 사연을 혼돈의 존재들이 수렴해 이뤄주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이는 혼돈의 존재와 보스급 몬스터의 특징까지도 종합해서 내놓은 결론이었다.
몬스터간의 생사결에선 패배한 몬스터의 바램을 죽인 몬스터가 대신 이뤄주는 규칙이 있었으니까.
“끄으으으으으!”
“원통하다!”
예상대로 한을 품은 원혼들이 나타났다.
얘기를 들어줄 것도 없다.
녀석들을 곧장 태양의 순례지로 보내버리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영혼들은 그런 주민성의 속마음도 모르고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아아! 드디어 지구에 복수할 기회가!”
“어서 원통함을 풀어다오!”
주민성은 순간 행동을 멈췄다.
지구가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차원의 존재가 언급하는 지구와 지구인이 아는 지구는 명백히 다른 느낌이었다.
“너.”
주민성은 지구를 언급한 원혼을 지목했다.
“오오! 나를 지목했구나! 가까이 오너라!”
“아니. 간다곤 안 했어.”
“……뭐?”
“사연이나 읊어 봐. 들어는 드릴게.”
원혼에게선 혼돈의 존재들이 말했던 것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있어 보였다.
따라서 순례지로의 귀양은 잠시 미루는 게 옳았다.
“크흐흐! 좋다! 지구인이 우리에게 했던 횡포를 들려주지!”
혼돈의 존재는 여전히 머릿수 줄이기에 한창이었고, 원혼은 오로지 주민성에게만 몰입해 자신의 사연을 풀어냈다.
“…….”
사연은 길었지만, 정리는 쉬운 편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지구인에게 차원이 멸망했다고.
이게 끝이었다.
“야! 너도?”
“나도!”
기타 원혼들도 내용만 달랐지, 이유는 같았다.
이젠 요약도 가능하다.
이세계로 전송된 지구인에 의한 멸망.
말로만 들었던 이고깽과 비슷한 사례들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말하는 용사, 황제, 헌터 및 기타등등이 다 지구인이었다?”
“그래!”
“하. 어지럽네…….”
주민성에겐 이런 원혼들의 억울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감 능력의 부재를 떠나서, 원혼들의 치졸함이 훨씬 불편했다.
“복수를 할 거면 당사자한테 하지. 왜 가뜩이나 힘든 동네에 행패야?”
“……뭐?”
“아까 드디어라고 했었지? 죽은 지 얼마나 됐어?”
주민성의 박력에 원혼이 주춤댔다.
“300년 이후론 세어보지 않았다…….”
“여기 사람들 수명이 몇 년인 줄 알고? 오래 살아 봐야 100년이야. 오케이?”
그렇다고 완전히 기죽진 않는다.
자기만의 논리를 쌓아 왔을 테니까.
“차원의 문제는 차원 대 차원으로 풀어야 한다!”
여기서 혼돈의 존재라면 공감해줄 요소가 있었을까.
답은 알 수 없었지만, 입장은 확고했다.
원혼식의 편 가르기가 정론이라면 주민성은 정확히 적대자의 포지션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저, 정말인가?”
“응.”
들을 얘기는 전부 들었다.
이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갈 뿐.
“영혼 재배치. 태양의 순례지.”
[재배치할 영혼을 지정해야 합니다.]
“얘들 다.”
[고대의 원혼을 소유 중인 건물에 귀속시킵니다.]
[영혼이 재배치됩니다.]
태양의 순례지라는 만능 영혼 처리장이 다시금 활약할 시간이었다.
“그어어어어!”
“잘 가시고.”
이것으로 카오스 게이트에 쏟아진 2막의 원혼들이 전부 사라졌다.
곧이어 2막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혼돈의 위령제 2막이 실패합니다.]
[이미 멸망한 차원이 자연 소멸합니다.]
[징벌제가 무효화됩니다.]
[혼돈의 위령제 3막이 지연됩니다.]
[해당 차원이 감시 대상 차원에 등록됩니다.]
“음?”
2막의 실패를 알리는 부분은 1막의 실패와 같았지만, 뭔가 다른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물론 징벌제에 대해선 혼돈의 존재를 통해 미리 알고 있었다.
문제는 차원의 소멸과 감시 대상 차원 등록 부분이었다.
“으하하하하! 이것으로 열 놈째!”
꽃향기에 취해서일까.
혼돈의 존재들은 여전히 살육에 진심이었다.
2막의 변화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었다.
‘감시 대상 차원이 뭐지?’
이미 협회에 당한 게 있었던 주민성으로선 감시라는 단어가 너무나 찝찝했다.
말뜻을 그대로 풀어보자면 누군가가 이 차원을 감시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불안해. 3막은 최대한 단칼에 끝내는 게 좋겠어.’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주민성은 3막을 대비하기 위해 분노꽃을 추가로 심기 시작했다.
시들 걱정은 없다.
애초에 폐건물 콘크리트 속에서 자란 꽃이었다.
꽃블린의 개량까지 거쳤다.
분명 카오스 게이트에서도 성장할 수 있으리라.
‘오케이.’
꽃 심기는 금방 끝났다.
대충 굳은 땅을 뜯어내고 바로 심는 방식이었다.
흙을 덮는 과정은 굳어버린 땅을 악력으로 으스러뜨리면 그만이다.
“크하하! 힘이 솟는다!”
“죽어! 죽어!”
혼돈의 존재는 분노꽃 때문인지 힘에 취해있었다.
여기서 적당히 개체 수가 줄어들면, 결정타를 위해 활력꽃이든 고블린꽃이든 섞어주면 끝이었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림뿐이다.
“으음? 저것들 뭐 하는 거지?”
텐트에 있던 혼돈의 존재도 나타났다.
건물 부가효과에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모양이다.
“별일 아냐. 그냥 상점 걸고 내기하는 거니까.”
“……아아. 상점이라면 그럴 만하지. 목숨을 던질 가치가 있어. 그렇고말고.”
상점을 받은 혼돈의 존재는 쓸데없이 차분해져서 뭐라도 있어 보이는 느낌을 마구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흡사 복권 1등에 당첨된 다음 날의 사람을 보는듯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무려 5시간 가까운 시간이 흘러 혼돈의 존재는 이제 셋만 남게 됐다.
텐트에서 행복해 하는 혼돈의 존재를 포함한 숫자였다.
심지어 텐트를 차지한 혼돈의 존재는 몇 백 년 만의 수면욕이라며 낮잠까지 청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상점을 받기 위해 싸우는 녀석들은 3시간째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슬슬 이쯤에서 변수를 줘야겠군.’
3막이 얼마나 지연될진 몰라도 더 이상은 위험했다.
이전의 행사들과는 다르게 이번 3막은 본격적인 차원 침공이 예고되어 있었으니까.
여기서 주민성의 심경엔 작은 변화가 찾아온 상태였다.
남아있는 혼돈의 존재 셋은 아득할 정도의 전투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미 상점을 받은 혼돈의 존재 덕분에 녀석들의 또 다른 약점까지 발견한 상태였고.
‘이 녀석들. 장 박사의 실험체와 비슷해.’
장 박사가 가지고 왔던 실험체 둘.
그중 균열로 보내버린 문어처럼 생긴 녀석을 제외한 범상치 않았던 실험체는 지금도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혼돈의 존재와 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냥 재워 버리면 그만이야.’
덕분에 주민성의 손아귀엔 활력꽃이 아닌 고블린 꽃이 들려있었다.
“거기까지.”
“음?”
퍼걱!
의도와는 달리 싸움은 단 한마디로 멈춰지게 됐다.
아니, 정확히는 승부가 갈렸다.
주민성의 말에 반응한 혼돈의 존재 하나가 공격을 피하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크흐흐! 이 몸의 승리다!”
“어……. 그러네. 상관없겠지. 뭐.”
머릿수 하나가 줄어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었다.
컨트롤하기 힘든 상대는 적을수록 좋으니까.
고블린 꽃은 수면의 질을 높여줄 테라피 정도가 될 듯하다.
“축하해. 상점 1점.”
“……크흐흐! 크하하하하!”
혼돈의 존재는 광소하며 순수하게 기뻐했다.
주민성에겐 너무나도 다행인 결과였다.
“……이, 이것이 상점.”
그렇게 남은 혼돈의 존재도 새로이 꺼내진 텐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이것으로 혼돈의 존재들은 자신들이 방해받지 않는 이상, 쓸데없는 싸움에 개입하지 않을 터였다.
“휴.”
한차례 숨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혼돈의 위령제 3막이 시작됩니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을 기다림을 종결짓는 메시지였다.
3막의 주제는 혼돈의 존재를 위한 축제.
카오스 게이트 최초의 적막한 축제가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
하지만 주민성은 말이 없었다.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며 메시지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을 뿐이었다.
[혼돈의 위령제 3막이 진행 불가 상태입니다.]
[혼돈의 축제가 보류됩니다.]
[감시 대상 차원입니다.]
[상위 차원 회의가 개최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메시지였다.
앞선 메시지들처럼 위령제가 실패했다고 알리지도 않았고, 보류까지 됐다.
심지어 감시 대상 차원 메시지가 시발점이 되어 회의까지 시작되었단다.
“곤란한데요. 선생님들.”
주민성은 혹시라도 존재할지 모를 감시자를 의식해 혼잣말을 이어갔다.
“그냥 발 뻗고 편히 살면 안 됩니까? 서로 좋게좋게. 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림의 시간만 하염없이 늘어가고 있었다.
“아오.”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지금쯤이면 이현의 의식도 회복되었을 테고, 포장마차 조사도 제법 진전이 있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니까.
‘이 녀석들부터 빼돌려야겠어.’
혼돈의 위령제는 뭘 하든 혼돈의 존재를 거쳐야 하는 행사였다.
덕분에 지금이라면 대응할 수 있었다.
혼돈의 존재 자체를 카오스 게이트에서 없애면 그만이었으니까.
“해보자.”
어느새 인벤토리에선 리어카가 튀어나와 있었다.
혼돈의 존재와 텐트를 동시에 바깥으로 빼돌리기 위한 매개체였다.
물론 이 방법이 최선은 아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인벤토리 수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인벤토리 수납도 함부로 해선 안 되는 상황이다.
부모님의 목숨을 인질 삼는 포장마차만큼은 아무런 변수 없이 지켜내야 했다.
“읏차.”
꺼내진 리어카는 두 대.
혼돈의 존재들은 무겁지 않았다.
가진 전투력에 비하면 너무나도 평범했기에 싣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드르륵.
카오스 게이트 출구와도 같은 격리 공간은 단 한 걸음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 번 더 움직이면 바깥이었고.
그렇게 주민성은 동료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오! 민성 씨! 거긴 괜찮……. 어? 리어카?”
카오스 게이트 바깥엔 최선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대 감시하기로 했는지 신우빈은 보이지 않는다.
“…….”
반가운 인사였음에도 주민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새로이 떠오른 메시지 때문이었다.
[혼돈의 존재가 강제로 차원에 개입했습니다.]
[절차를 거치지 않은 개입입니다.]
[힘의 균형을 위한 신규 차원 연동이 진행됩니다.]
[지정된 장소에 튜토리얼 탑이 생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