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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 찬스 (4)
2022.06.16.


주민성의 손엔 어느새 벌집이 쥐어져 있었다.

이젠 스크린에 성아영만 포착되면 끝이다.

분신 능력이 사용되고 있다는 확신만 얻으면 된다.

스크린에 비친 강북은 여의도와 달리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기괴한 복장의 최선호만이 몇 번씩 들락거리며 잡동사니들을 쌓아 올리고 있다.

시점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외부 시점으로 넘어가고 나선 김정남과 유호영을 포착할 수 있었다.

둘은 최선호가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잔해들을 이용해 근력 운동에 한창이었다.

“……이쪽엔 없나?”

생각해보니 성아영은 최선호 팀이 아닌 주민성이 불러왔던 세입자들과 함께 있었다.

관심사가 그쪽에 꽂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세입자부터 찾아야겠는데.”

주민성은 침착하게 화면이 바뀌길 기다렸다.

성아영은 분명 멀지 않은 장소에 있을 터였다.

“아.”

다음으로 포착된 건 봉춘향이었다.

본체가 여의도에 있는 이상, 분신으로 추정된다.

무언가를 다급하게 전달하는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만 짐작할 수는 있었다.

여의도는 실험체들에게 공격받고 있었으니까.

“……음?”

다음 전개는 주민성의 예상을 벗어났다.

봉춘향이 능력을 사용해 최선호 팀원을 직접 공중에 띄워 올렸기 때문이다.

보통이라면 이현이 재빨리 합류해 공간 점멸 능력으로 합류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

이로써 확실해졌다.

사라진 건 협회장뿐만 아니라 이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혹은, 이현이 강북에 신경도 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아영 어디 있는데. 아오.”

참을성이 한계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그냥 질러버려?”

주민성에겐 매우 극단적인 선택지가 존재했다.

건물 이용자 전원을 호출해 속세에서 벗어나 인벤토리에서 다 같이 살아가는 선택지였다.

단점이 있다면 크기 한도를 넘어선 초월 건물을 수납하지 못해 식량 리필이 안 된다는 정도.

“어쩌냐. 너 이제 라면 개발 끊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하는 소린가?”

“그래.”

장 박사는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자신이 개발한 실험체가 다르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든 걸까.

“5분. 5분 안에 성아영 안 보이면, 여기로 호출할 계획이거든? 근데 걔도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러면 그냥 다 같이 여기서 사는 거야.”

“그건 상관없다만……. 그게 라면 개발을 끊는 이유는 아닐 텐데.”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여기 인벤토리에 아무리 물건이 많아도 언젠간 전부 고갈될 수밖에 없어. 수급책이 없으니까.”

“아.”

역시 장 박사는 관심 분야에만 빠삭할 뿐.

그 외의 것들엔 상당히 무지했다.

“대책 마련까지 5분 준다. 아니, 이제 1분 지났으니 4분.”

“큭! 일단 진정해라! 주민성!”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바깥 상황이 저렇게 돌아가는데 여기서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주민성의 손엔 어느새 채찍이 들려 있었다.

예전에 최선아가 쇼핑해 온 잡동사니 중 하나였다.

통감을 증폭시켜 준다나 뭐라나.

아무튼 쓸모없진 않아 보였기에 수납한 물건이었다.

“후우. 그 계집이 뭐 대단하다고 이렇게 절실히 찾는지는 모르겠……. 아무튼 협력은 하지.”

“잘 생각했다.”

장 박사에겐 성아영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능력이야 얼마든 실험체에 주입하면 그만이었으니 흥미 분야도 아니었을 테고.

그나마 경계하는 간부는 임진석 정도였다.

“우선 질문 하나. 성아영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전부 파악하고 내린 결론이냐?”

“아니. 80%쯤.”

“…….”

주민성에겐 상당히 높은 확률이었고, 연구자인 장 박사에겐 불안한 확률이었다.

표정이 반증한다.

“일단 성아영의 대표 능력은 분신이다. 여기까진 알겠지?”

“투명화가 아니고?”

“흥. 그건 다른 간부의 능력이다. 성아영의 분신에 영구적인 투명화를 걸었을 뿐이야.”

이로써 이전에 상대했던 성아영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비밀이 밝혀졌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몇 가지 시술을 거쳤다. 광폭화, 폭주, 공포심 결여, 충성심 고양 등의 인간을 전투 병기로 만드는 것들로.”

그리고 몰랐던 사실도 밝혀졌다.

성아영도 피해자라면 피해자랄까.

충성심 고양 같은 부분을 보면 확실히 동정할 만한 요소였다.

“분신하고 본체가 바뀌는 원리는?”

“그 또한 시술 과정에서 파생된 능력이지. 협회 간부는 실력만으로 선발되는 게 아니야. 철저한 재능의 영역이지. 성아영은 자아를 유지한 채로 정신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뭐?”

그 이후의 설명은 전문 용어 투성이였다.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쉽게 말하자면, 자신의 자아를 타인에게 옮길 수 있다는 뜻이지.”

“본인 외에도?”

“조건부다. 상대에 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지.”

“…….”

어쩐지 성아영의 행동 양식이 이해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배척하지 않았던 인간들은 하나같이 강자였으니까.

“아오……. 그럼 걔가 나한테 친근하게 굴던 건?”

“정상적으로 보자면 보험 정도의 개념이겠지. 여차하면 빙의할 수 있는. 비이성적으로 보자면 순수한 호감일 테고.”

“……그게 정상이야?”

“아닌가?”

“…….”

장 박사의 설명에 머리가 지끈거리긴 했지만, 적어도 성아영이 분신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은 검증됐다.

이제 남은 건 남은 분신의 유무.

“……투명화 걸었던 분신은 총 몇 갠데?”

찝찝했다.

주민성이 감지했던 분신은 하나.

그 하나가 아파트에서 죽은 게 확실했으니까.

“둘이다. 분신은 적을수록 싱크로율이 높거든.”

“둘? 확실하지?”

“그래.”

새삼 봉춘향의 재능이 경악스러웠다.

동시에, 주민성은 제대로 된 확신을 얻었다.

적어도 여태 알고 지내던 성아영에겐 여분의 분신 하나가 추가로 있다는 소리니까.

“아무튼 오케이. 호출해도 문제없겠네.”

“그래. 성아영이라면 여기서라도 자유롭게 빠져나갈 수 있겠지. 그런데 네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과는 무관할 텐데? 설마 너도 똑같은 괴물이 될 셈이냐?”

“풋. 뭐래.”

장 박사는 과거의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

정보가 갱신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성아영. 그거 말고도 능력 더 있어.”

“……뭐?”

주민성은 그대로 벌집 하나를 입에 넣었다.

곧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10분간 여왕벌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 해당 건물 세입자를 호출할 수 있습니다.]

여왕벌의 권능은 엉뚱한 구석에서 사기적인 능력이다.

굳이 성아영이 평소에 텐트를 잘 두르지 않는다고 해도, 건물에 소속되어 있기만 해도 호출 대상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아파트. 성아영.’

대상을 지정함과 동시에, 끔찍한 살기가 주민성을 덮쳤다.

쉬익!

회피는 성공.

살기 너머엔 작은 칼을 휘두르는 성아영이 있었다.

“아오. 놀래라.”

“……주민……성?”

갑작스러운 재회.

하지만 서로의 반응은 너무나도 달랐다.

“……살아 있었어?”

“그럼 죽었겠냐.”

“…….”

약이라도 따로 필요한 걸까.

성아영은 울먹이고 있었다.

“울지 말고. 이거부터 먹어 봐.”

“……또 벌집이야?”

“어. 여기서 나가려면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제야 성아영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장 박사는 그새 몸을 숨겼는지 보이지 않는다.

“여기……. 어디야?”

“음……. 설명하기 좀 어려운데. 그냥 먹어주면 안 될까?”

“감옥 같진 않은데……. 어디일까나.”

난감한 상황이 또 이어졌다.

성아영은 주민성이 건넨 벌집을 입에 넣지 않는다.

“대충 살기 좋은 감옥 정도지.”

“흐응.”

성아영은 스크린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다시 화면이 전환되어 스켈레톤의 두개골을 박살내는 고블린이 나오고 있다.

뭔가 눈치챈 듯한 기색이다.

그리곤 주민성을 향해 입을 벌렸다.

“아.”

“…….”

“아.”

먹여 달라는 제스처였다.

가지가지 한다 싶었지만, 느긋한 이곳과는 달리 바깥 상황은 치열하게 흐르고 있다.

먹여 줄 수밖에.

성아영 입막음은 주민성의 전문 분야였다.

“우웁!”

“자. 이제 여왕벌의 권능 써.”

“움늄뉴움우움!”

대충 내가 왜 권능을 써야 하는지에 관한 설명이었다.

“하수인 관련 능력이잖아. 호출 능력도 있겠지. 그걸로 나 호출해.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잠시 성아영의 눈빛이 살벌해졌지만, 쉴 새 없이 꼬물거리는 볼살이 살기를 희석시키는 모습이다.

“빨리.”

곧이어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순순히 권능은 사용한 모양이다.

[여왕벌의 하수인으로 지정됩니다.]

[같은 권능을 가졌습니다.]

[상하 관계를 동맹 관계로 정정합니다.]

성아영이 당황하기 시작했지만, 아무튼 이것으로 호출 조건은 충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호출해. 빨리.”

“…….”

그럼에도 성아영은 대꾸하지 않는다.

결국 주민성은 다른 설득 카드를 꺼냈다.

“지금 실험체들이 여의도 공격 중이야. 급해.”

그제야 진지한 표정이다.

[여왕벌의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팟.

이현의 능력과는 다른 미묘한 감각이 온몸을 스쳤다.

결과는 같았지만.

“드디어 온 건가.”

길거리였다.

주변엔 한글 간판이 보인다.

인벤토리 내부와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이곳은 서울이 확실했다.

“드디어……. 돌아왔군.”

“실험체가 공격 중이라니……. 무슨 소리야?”

곁에는 분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아영이 있었다.

주민성은 그대로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휴.”

통신망도 부활했다.

이것으로 제대로 된 상황을 전달받을 수 있다.

“대, 대장님?”

분신으로 추정되는 봉춘향이 찾아왔다.

곁에는 7번, 11번 세입자도 함께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 정말 대장님이 맞습니까?”

“새삼스럽게 왜……. 아아.”

체감은 몇 시간뿐이었지만, 실제로 주민성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 깨어난 상태였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겠네. 의식도 잃은 뒤엔 계속 인벤토리에 갇혀 있었어.”

“그쪽이었습니까…….”

인벤토리라면 봉춘향도 들어가본 경험이 있었기에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일단 여의도로 가자.”

“전부 알고 계셨습니까?”

“전부는 아니고. 최근 몇 시간 정도만 지켜봤어.”

“아아.”

곧이어 주민성은 그대로 다른 세입자들과 함께 띄워졌다.

“그보다 협회장이랑 이현 씨는 어떻게 된 거야. 안 보이던데.”

“…….”

봉춘향의 표정은 참담했다.

“이현 씨는 카오스게이트로 떠났습니다.”

“……뭐?”

카오스게이트에 관한 정보는 봉춘향에겐 아주 일부만이 전달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의 태도는 카오스 게이트에 확실히 이해를 마친 표정이었다.

“카오스 게이트. 제대로 파괴된 거 아니었어?”

“예. 대장님이 사라진 이후, 모든 생존자들에게 메시지가 떠올랐습니다.”

“뭐라고?”

“카오스 게이트 개방까지 남은 시간 48시간.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48시간? 그러면 이미 개방되었다는 소리야?”

“예…….”

그동안의 노력은 그저 시간 지연뿐이었을까.

허탈했다.

봉춘향의 설명이 이어졌다.

“카오스 게이트는 BBA 방송국 건물이 위치하던 자리에 생성되었습니다.”

“카오스 게이트는 지금도 남아있고?”

“아닙니다……. 이현 씨가 게이트 내부로 입장하자마자 자취를 감췄습니다.”

“휴.”

제대로 밝혀진 건 없지만, 카오스 게이트는 누가 봐도 위험해 보였다.

그런 곳에 이현은 홀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틀 전,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습니다.”

“……뭐라고.”

“최종 대격변까지 남은 시간 48시간.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

심지어 최종 대격변이란다.

이건 밝혀지고 말 것도 없었다.

인류에게 치명적인 사건이 예고되었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틀 전이면. 지금이네?”

“……그렇습니다. 사태가 어떻게 벌어질지 몰라 지역 방어태세만 구축해 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최종 대격변이 여의도에서만 벌어지고 있고.”

“예…….”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여의도 상공이다.

지상에선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지속되고 있었고, 한구석엔 새빨간 카오스 게이트가 다시금 형성되려는 조짐이 보인다.

“후우.”

여기부턴 가진 정보가 효력을 발휘하는 시점이었다.

카오스 게이트가 형성되는 실질적인 원인은 실험체가 흘리는 피.

“일단 전투부터 중지해.”

“잘못 들었습니다?”

주민성은 실험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갔다.

“저것들이 흘리는 피가 카오스 게이트를 형성하거든. 최대한 상처 없이 생포해. 전부 회복시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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