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 (1)
(179/250)
판도 (1)
(179/250)
판도 (1)
2022.05.29.
이것으로 지금의 명일학은 허가받지 않은 침입자가 아닌 손님으로 확정됐다.
그것도 건물주의 손님으로.
“아니. 집중 풀지 말아봐요. 잠깐만.”
“……그렇다면 5분. 아니 3분 정도.”
“충분합니다.”
인벤토리를 굳이 노출할 이유는 없었다.
이곳은 주민성의 게이트.
그리고 게이트의 폐건물들은 전부 주민성을 소유자로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따라오세요.”
“…….”
식인 꽃 줄기의 방해는 없었기에 명일학은 수월한 걸음으로 주민성을 따라나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식인 꽃이 뒤덮은 어느 식당.
[소유자가 없는 건물에 입장하였습니다.]
[소유권을 주민성 님으로 변경합니다.]
[보유 건물 목록에 기사식당(반파)이 추가됩니다.]
“이쪽으로.”
“…….”
주민성은 느긋한 표정으로 명일학에게 말했다.
“이제부턴 제가 쓰는 능력에 대해 전부 함구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러죠.”
이것으로 만반의 준비가 갖춰졌다.
명일학이 제안한 시간은 3분.
주민성에겐 이 문제를 1초 만에 해결할 수단이 존재했다.
“이용료 청구.”
“…….”
첫째론 건물 이용자가 되는 순간 들어오는 버프를 적극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급히 오셨으니 돈은 없으실 테고. 일단 받으세요.”
명일학은 찝찝한 표정으로 주민성이 건넨 현금을 바라볼 뿐이었다.
많은 생각이 교차할 터였다.
박진우의 사례를 봤으니까.
하지만 주민성은 이런 명일학을 재촉함으로 생각의 여지를 빠르게 지워 나갔다.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죠. 벌써 1분쯤 지났어요.”
“……좋습니다.”
그렇게 명일학은 주민성에게 이용료를 납부했다.
동시에 쏟아지는 부가 효과 세례.
“어때요. 한결 낫죠?”
“…….”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건물 부가효과는 이용자의 정신적인 안정감을 선사한다.
내면의 싸움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15분쯤은 수월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요.”
다음은 진짜 해결책의 차례였다.
이에 앞서 주민성은 사전 정보를 수집했다.
“수집한 유물. 목걸이와 귀걸이 말고 또 뭐죠?”
“검지와 약지의 반지. 왼쪽 어깨의 황금 견장과 무릎 보호대입니다.”
“흐음.”
이베리카 세트와는 달리 양천구의 유물은 전부 장신구의 형태였다.
성향으로 따지자면 사치스런 느낌이랄까.
이베리카와 관련된 대자연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유물은 전부 신체에 파고든 상태고요?”
“그렇습니다.”
견장은 어깨를 파고들었고, 반지는 손가락을 파먹는다.
마지막으로 명일학의 바지를 걷어 올리자 무릎에 파고든 무릎 보호대가 기괴한 자태를 자아내고 있었다.
“참 겁도 없으시네.”
“……겁이라? 이런 대격변에서 유물을 쓰지 않는 쪽이 더 비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명일학은 언제나 나긋나긋하고 차분한 사람이 아니었다.
방금은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내며 날카로운 칼 같은 느낌이었다.
이는 주민성에게도 상당히 놀라운 부분.
‘건물 이용자가 되었는데도 이게 가능하다고?’
건물주에 대한 위협은 임진석조차 하지 못했던 부분.
SSS급쯤 되면 건물주의 억제력도 그렇게 강력하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서풍의 성우혁이 특별한 케이스에 해당되었다.
모든 진실을 알고나선 주민성을 적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위희린 씨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고. 결국 어느 정도의 호의는 필수인가.’
역시 SSS급 능력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님 말고요.”
“…….”
그렇다고 쫄 이유도 없었지만.
“하여튼. 잠깐 유물 좀 만지겠습니다.”
“…….”
명일학의 입이 잠시 벙긋거렸다.
아마 위험할거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문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유물 안에 잠들고 있는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주민성에게 빙의되면 명일학에겐 이득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당장은 양천구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길드원들과 제대로 준비를 갖춰 주민성 레이드를 걸어올 터였다.
“……그러시죠.”
주민성은 그저 입꼬리를 올리며 명일학의 유물에 손을 댔다.
처음은 귀걸이.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디에 깃들었으려나.’
명일학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 역시도 주민성의 능력을 노출할 여지가 있었으니 세세하게 직접 알아보는 게 나았다.
‘목걸이와 반지도 아니군.’
남은 것은 견장과 무릎 보호대.
주민성은 우선 견장에 손을 가져가 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죽이고 싶지 않아? 강서구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당첨이었다.
유물에 깃든 녀석의 목소리가 주민성의 뇌리에도 침입했다.
-음?
하지만 주민성은 녀석과 아무런 말도 섞지 않았다.
대신 다른 능력을 준비할 뿐.
‘영혼 재배치. 태양의 순례지.’
[고대의 영혼이 확인되었습니다.]
[영혼이 재배치됩니다.]
한때 엄청난 위용을 뽐내던 태양의 순례지는 이제 주민성의 편의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유배지가 되었다.
공룡의 영혼도, 인천에서 마주했던 악령도 이를 거부해낼 수는 없었다.
-으어? 이게 대체 무슨…….
재배치가 완료됨으로서 유물의 외침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것으로 명일학이 겪어 오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된 것이다.
“끝났습니다.”
“……으어?”
어울리지 않게 멍청해 보이는 탄식을 내보이며 당황하는 명일학이었다.
“끝났다고요. 이제 계산합시다. 무슨 대가를 내놓으시렵니까.”
“…….”
명일학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착용 중인 유물을 매만졌다.
꾸드득!
온몸을 파고들었던 유물은 어느새 명일학의 몸에서 벗어나 평범한 유물로 변모하는 중이었다.
동시에 정상적으로 상처도 본연의 역할을 수행 중이었고.
“크윽!”
“아이고. 이제 피가 나네.”
다행히 출혈은 문제가 아니었다.
건물 부가효과가 알아서 다 해결할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지혈은 알아서 될 터였다.
찝찝한 사람은 명일학이었고.
주민성은 붕대를 찾는 대신, 기사식당 내부의 냉장고를 뒤적였다.
진작 식인꽃에 잠식되어버린 건물이었기에 내부 상태는 꽤나 양호한 편.
“커피 우유는 상했지 싶고……. 이게 괜찮겠네.”
주민성은 자양강장 음료 두 개를 꺼내 하나를 명일학에게 건넸다.
“마시면서 얘기하죠.”
“…….”
“음료값은 괜찮습니다. 빼드리죠.”
“…….”
명일학의 표정은 점차 평소의 것으로 돌아왔다.
이제 상처로 인한 고통도 멎은 모양.
“일단 감사를 표합니다. 아린 길드장으로서도. 명일학 개인으로서도.”
“네.”
성의는 물질적으로라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상대는 10대 길드의 수장 중 한 명이었다.
그가 가진 전력이 버젓하게 양천구에 남아있는 이상, 그에 걸맞은 대우는 필수였다.
“이웃끼리 돕고 살아야지요.”
“……그렇습니다. 이웃이지요.”
명일학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정곡이라도 짚으려는 것처럼.
“강서구의 왕. 당신은 정확히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갑자기요?”
“편히 말씀하시지요. 세상 전체가 그쪽을 적대한다 하더라도 아린은 가만히 있거나 소극적으로 움직일 계획입니다.”
“……오잉.”
발등에 떨어진 불을 치워줬더니 여유가 생긴걸까.
명백히 주민성을 떠보는 질문이었다.
짚이는 바는 있었지만.
“일단 한 가지. 협회장과는 적대관계입니다. 자치권은 개인적인 협상을 통해 끌어낸 것이고.”
“흠…….”
“박진우 씨한테도 말했을 텐데. 아닌가?”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금제를 강하게 걸어두셨더군요.”
“아까워라.”
명일학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아린 길드원을 대상으로한 금제는 엄중히 규탄할 생각이었습니다.”
“자꾸 상황과 어울리지도 않는 얘기들이네요.”
“…….”
이는 자신이 쌓아온 업적들을 강조하며 상대의 양보를 요구하는 부류에 해당한다.
역시 주민성에겐 이런 사람들이 불편했다.
혹여나 지역 발전에 기여라도 했으면 모를까.
능력자 길드는 강력한 보스 몬스터를 토벌해 유명세를 타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후우. 이제 좀 괜찮아졌군. 강서구의 왕. 실력 좀 보고싶은데.”
“……아하.”
의도가 드러났다.
결국, 이제 살 만해졌으니 싸워 보자는 것.
호적수로 판단되면 협상을 재개할 것이고, 자신이 우위라면 판을 다시 짜 보자는 심산이었다.
“갑질도 제법 할 줄 아시는구나.”
“그럴지도 모르지. 시국이 이런데, 국적이 의미 있나? 약자가 강자를 따르는 것. 이런 효율적인 수단도 있는데.”
명일학의 판단은 주민성의 시선에서도 틀리지 않았다.
방송에 노출된 신체 능력과 돈과 관련된 특이 능력.
마지막으로 방금의 이용료 청구가 해주 관련 능력으로 보였을 터였다.
즉, 명일학 입장에선 판을 다시 짜 볼 만한 구도였던 것이다.
“실력. 볼 수 있으면 보던지.”
“……그러죠.”
안타깝게도 명일학이 놓친 게 한 가지 있었다.
주민성은 이미 실력을 보였고, 판 또한 진작에 완성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지이잉.
명일학의 손아귀에서 광선이 뻗어져 나왔다.
이전에 봐왔던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위험해 보이는 광선이었다.
“나도 참 궁금하거든요. 저주가 해제되면서 유물 성능이 더 좋아진 것 같거든.”
“아아……. 그러시구나.”
여기서 명일학이 놓치고 있던 게 추가로 드러났다.
건물 부가효과를 유물 본연의 효과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해 준 대가로 선공은 양보하지요.”
“어이쿠. 감사해라.”
주민성은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명일학에게 다가갔다.
“예상했던 대로 초근접 계열이군.”
방송을 너무 과신하면 생기는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지금 할 행동이 초근접은 맞았지만.
“에라이. 인간아.”
주민성은 명일학에게 꿀밤을 먹였다.
쾅!
“큭?”
SSS급답게 명일학의 머리는 엄청나게 단단했다.
바위를 때려도 멀쩡한 주먹이 모처럼 찌릿했을 정도였으니까.
“해 보든가. 반격.”
“……어째서?”
알고 보니 반격은 진작에 이뤄져 있었다.
명일학의 공격점은 정확히 주민성의 어깻죽지에 조준되어 있었다.
광선이 사라져서 타격이 없을 뿐.
“어휴. 괜히 10대 길드가 아니네.”
세계랭킹 5위라는 성우혁을 재평가하게되는 순간이었다.
상대가 천마가 아니었다면. 그 역시 위험천만한 상대였을 터였다.
“…….”
“일단 민망하니까 팔부터 내리시지.”
명일학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민성의 어깨와 자신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알잖아요. 싸움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보다 더 무서운 자로군.”
지잉.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단지 주민성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을 뿐.
그리고 이런 규칙은 소유 중인 건물에도 해당된다.
이번에 부족원이 새로 추가됐고.
“이런 금제였다니……. 하하…….”
“테스트는 그걸로 끝났습니까?”
나름 동등하던 위치는 이제 주민성 우위로 확실히 바뀌었다.
먼저 모험을 시도했던 건 명일학이었으니 이젠 받아들이는 수밖에.
“좋습니다……. 제대로 당했군요.”
“생각보다 깔끔하게 인정하시네.”
“그게 내 신념이라서 말이죠.”
“흐음…….”
상대가 깔끔해 보인다고 해서 가까이 해도 된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깔끔해 보였기에 도리어 위험함을 자아내는 인물이었다.
‘적당히 거리만 두면서 써먹어야겠군.’
생각을 마친 주민성은 명일학에게 말했다.
“오늘 겪은 모든 것들은 어차피 말하지 못할 테니 넘기고, 일단 정보부터 받겠습니다.”
“정보라.”
“아린 길드가 얻는 정보. 그대로 공유하시죠. 앞으로도 계속.”
“…….”
“대격변이잖습니까. 일상으로 돌아가기 싫어요?”
주민성에겐 서울 내부의 정보가 가장 절실했다.
특히 종로구의 몬스터처럼 특이한 몬스터에 대한 정보라면 더더욱.
“좋습니다. 공유하지요. 우리만 독점하고 있는 정보라면 글쎄. 우리 10대 길드 내부 정보가 되겠군요. 아니면 협회장의 움직임 정도일까?”
“전부 맞네요.”
명일학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일단은 서울의 판도부터 알려드리지요. 자운 길드장 조주현은 사망. 일살 길드는 10대 길드를 탈퇴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지요.”
“……그렇다는 건.”
“예. 서울에 남은 유일한 10대 길드는 우리 아린뿐이라는 말이 되겠군요.”
처음부터 상당히 충격적인 정보였다.
주민성이 활발하게 수도권을 점령해나가는 것처럼, 서울 내부 역시 굉장히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일살이라면 강북구의 일살. 맞죠?”
“맞습니다. 지금은 한강 위쪽 지역 반절을 전부 집어삼킨 상태라 강북의 일살도 옛말이에요.”
“…….”
“그래봤자 하성 그놈도 종로구 앞에서 막힌 모양이지만. 풋.”
알고 보니 신경 써야 할 상대는 협회장만이 아니었다.
한강 윗 지역을 전부 삼켜나가는 세력이 종로구 앞에서 막혔다는 건, 수도권으로 눈을 돌릴 여지도 있었다는 소리니까.
그렇다는 말은 곧, 동선 상 겹치게 되는 김정남과 유호영, 그리고 가르취 차크취 형제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