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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웅할거 (2) (157/250)

군웅할거 (2) 2022.05.07.

양천구 목동 아린 길드 본거지 앞. 삼엄한 경계 사이로 피 칠갑한 남자가 걸어왔다. 누더기를 뒤집어 쓰고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생존자겠지?” “일단 세워.” 판단은 옳았다. 부상당한 생존자라기엔 미묘하게 기척이 날카로웠으니까. “나다. 박진우.” 남자의 정체는 길드장의 특명을 수행 중인 박진우였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임무는 어떻게…….” “더 급한 건수가 생겨서 말이지……. 큭큭…….” 박진우의 파견은 다른 사람도 아닌 길드장의 명령이었다. 그 고고한 남자의 명령을 거스르고도 멀쩡한 사람은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뿐. 충성심이 높다곤 하나 박진우는 여기 해당되지 않는다. 어딜 가나 대우받는 A급 능력자라 하더라도 이곳은 아린이었으니까. “이, 일단 회복팀부터 준비시키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다.” “피 많이 나는데요?” “멀쩡해. 피? 그까짓 거 얼마든지 흘려도 돼.” 박진우는 너덜너덜한 텐트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상처는 없으시네요? 새로운 루트라도 알아내신 겁니까?” “크흐흐……. 아니. 평범하게 가양동과 등촌동 모두를 뚫고 왔다. 정면으로.” “저, 정말입니까? 단독으로 아이시클 그렘린에 식인꽃을 상대하셨다니……. 역시 형님이십니다.” “후후……. 일단은 보고가 먼저다. 길드장님께선 아직 성산대교에 계신가?” “새로운 생존자들과 함께 30분 전에 귀환하셨습니다. 지금쯤 길드장실에 계실 겁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SSS급 능력자이자 아린 길드장 명일혁은 극도의 결벽증과 편집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대표적인 버릇 중 하나는 어떤 임무를 마치든 45분은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 시간은 길드장과 거의 동일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부길드장 후지와라 테츠야조차도 엄수하는 부분이었다. “……넉넉히 20분 뒤에 올라가는 게 좋겠군.” “그렇습니다.” 명일혁의 45분에 끼어들었다가 목이 잘린 SSS급 중국인 능력자의 이야기는 명일혁이 가진 수많은 전설 중 하나였다. “혹시 생존자들에게 샤워실은 개방했나? 피부터 씻어내고 싶은데.” “아직 통제 중이긴 하지만 형님이라면 문제없습니다. 편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간단히 샤워 시설을 이용한 박진우는 길드장실이 있는 위층이 아닌 아래로 향했다. 바로 은행이었다. “음? 진우 씨? 임무는 어쩌고?” “……길드장님께 보고할 일이 생겨서요. 잠시 출입해도 되겠습니까? 보고사항과 관련 있습니다.” 은행은 며칠 전까지만해도 아린의 지정 경비구역이 아니었다. 점거만 해두고 협회의 본격적인 수복 작전이 시작되면 반납할 예정이었다. “아아……. 강서구였으니 확실히……. 4분 남았네요. 얼른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노아의 방송 이후 은행의 가치는 180도 반전했다. 그곳에서 나온 신원 불명 고위 능력자의 특이사항 때문이었다. 하필 현금을 필요로 하는 능력자가 바로 옆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아린 입장에선 경계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혹시 강서쪽 리더와 얘기 잘 됐어요? 거래 제안이라도 받은 걸까?” “좋은 얘기를 나눴죠. 다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지금 바로 얘기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내려와서 공유하지요.” “응응. 그래요. 참고로 현금은 전부 길드장실로 옮겨졌으니 참고하구.” “……예.” 박진우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비어 있는 금고를 지키는 여자 또한 아린의 대표 간부였기 때문이다. ‘길드장님도 철두철미하시군. 나를 보낸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함정까지 파두셨을 줄이야.’ 금고 지킴이는 무려 SS급 트랩 구현 능력자였다. 원소 계열은 물론이고 플라즈마 이상의 출력까지 끌어올릴 수 있어 영체나 정령, 심지어는 SS급 보스몬스터에게도 치명적인 일격을 입힐 수 있는 핵심이었던 것. 그런 무시무시한 트랩이 금고 내부에 빼곡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김정남조차도 초입에서 격살될 것이 자명했다. ‘칫. 현금이나 좀 더 마련하려고 했는데.’ 텐트 이용 기간은 30일. 고작 30일만 사용하기엔 텐트의 효능이 말도 안 되게 좋았다. 평소였다면 거뜬하게 B급과 A급으로 판정될만한 가양동과 등촌동을 A급 능력자 혼자서 뚫어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만약 전문 고등급 버퍼에게 이 정도 수준의 버프를 30일간 받으려면 수억쯤은 간단하게 깨졌으리라. ‘마석 위치만 기억해 두자. 물물교환도 가능하니까.’ 그렇게 박진우는 금고 내부를 기웃거리며 시간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약속 잊지 말기?” “……하하. 예.” 그리고 길드장실. 45분을 막 끝낸 명일학과의 독대 시간이 마련됐다. “그래. 진우야. 괜찮은 소득이라도 있었구나?” “예. 길드장님.” 명일학은 세상 좋은 미소로 박진우의 보고를 기대했다. “강서구 세력 말입니다.” “응.” “……가, 강서구 세력에…….” “…….” 명일학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반복……. 앵무새 같은 행동은 약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 이게 아닌데? 죄송합니다!” 박진우는 당황하며 입을 뻥긋거릴 뿐이었다. “아, 안 돼……. 왜 말이 안 나오지?” “……박진우.”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 명일학의 표정은 이제 위험한 단계에 이르렀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빠지면 45분의 변명 시간이 주어질 터였다. “……주제 바꿔 봐.” “아, 예! 강서구 세력 대표에게 좋은 제안을 받았습니다!” 대화 주제를 바꾸자 이번엔 입이 트였다. 기묘한 현상이었다. “그와 만났나?” “예!” “어떤 인물이었지?” “……!” “…….” 왜인지 박진우의 입은 질문을 골라서 대답하고 있었다. “……금제라도 걸렸나?” “아,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걸 받았습니다.” 박진우는 울먹이는 얼굴로 명일학에게 텐트를 진상했다. 이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누더기?” “크흑! 아닙니다! 텐트입니다! 유물급의 성능이었습니다!” “……유물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명일학의 지독한 결벽증이라면 텐트의 효과를 반드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몸 상태 변화에 누구보다 예민한 남자니까. “……진우야.” “예. 길드장님.” “이게 그 방송에 나온 텐트는 맞아?” “오는 길에 조금 손상됐습니다. 하지만 성능은 유효합니다.” “……그래?” 말을 마친 명일학은 근처의 단도로 자신의 손가락을 긋고 텐트에 손을 집어넣었다. “…….” “…….” 대화는 7분 후에 재개됐다. 명일학의 손가락이 완벽히 아물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방송에서 부상자가 치유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분 3초였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부상이었지.” “……기, 길드장님! 잠시만 들어주십시오!” “말 끊지 마. 7분이면 실전성 심각하게 떨어지는 하급 유물이잖아. 진우야. 우리가 회복계 능력자 하나 없는 거지 쓰레기 길드는 아니잖아? 너도 알 텐데? 이럴 바엔 제대로 잠입해서 더 제대로 된 정보를 캐와야 하지 않을까? 임무가 마음에 안 들었니? 대격변이라는 자각은?” 명일학의 표정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일단은 들어줄게. 그동안의 실적도 있으니 형은 얼마든지 너그러워질 수 있어.” “가, 감사합니다!” 따뜻한 말투와 다르게 내용물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45분.” “……예?” “45분이 지날 때마다 너의 직책을 강등시킬 거야. 물론 공평하게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줄 거고. 지금의 진우는 믿음직한 상급 길드원이니까 편하게 말해.” “아아…….” “8초 지났어. 벌레까지 강등시킬 계획이니 형 실망하게 하지 마.” 박진우의 목숨을 건 사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서울에는 한국 10대 길드 중 3개 길드가 존재한다. 양천구의 아린. 강북구의 일살. 송파구의 자운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장.” “아오. 더럽게 힘드네. 다들 수고했다.” 쿠궁! 자운 길드장 조주현의 진각을 마지막으로 방이동을 장악하던 보스 몬스터 자이언트 샌드웜의 형체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송파구 통합인가.’ 조주현은 1차 대격변과 2차 대격변을 모두 겪은 SSS급 베테랑 능력자. S급과 SS급을 넘나드는 게이트 난이도에도 굴하지 않고 본거지인 송파구를 탈환했기에 주위엔 존경의 시선이 가득했다. “저 유물이 답이 되겠군요.” “……그래. 1차 대격변의 해답이 각성 스캐너였다면, 이번 대격변의 해답은 이것이겠지.” 자이언트 샌드웜의 시체 위엔 유물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조주현이 생각하는 해답은 유물이 아니었다. [송파구(방이동)의 지배권이 양도되었습니다.] [해당 지역은 송파구 게이트에 통합됩니다.] [지배의 비석이 귀속됩니다.] [보유중인 지배의 비석: 11] ‘지배의 비석. 이건 대체 뭘까.’ 대격변이 일어난 이후, 조주현에겐 영문 모를 메시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은 본거지가 위치한 잠실역 부근의 보스 몬스터를 처치했을 당시. “이번 유물도 위험해 보이는군요. 해주팀 투입하겠습니다.” “그래.” 조주현은 유물의 저주가 해제되길 기다리며 상념에 빠졌다. 이번 원정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었다. 방이동의 통합으로 송파구의 모든 지역을 장악했고, 눈앞의 유물이 송파구 게이트 마지막 유물이었으니까. 지배의 비석과 관련된 의문도 이번 해주로 해결될 가능성이 컸다. “레이드 하는 동안 들어온 정보는?” “……국내보다 해외 소식이 더 빠른 상황입니다. 그중 미국의 움직임이 가장 도드라집니다.” “갱스터? 아니면 화이트하우스?” “아뇨. 부처라는 비공식 길드가 가장 앞선 상황입니다. 벌써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수복하고 보스턴 평정까지 코앞에 둔 상황이라더군요. 핫라인도 요청해 온 상황입니다.” “그쪽은 정권이 또 바뀌겠군. 신흥강자라면 언제나 환영이야. 돌아가면 내가 직접 연락해야겠군. 국내는 어때?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 처음으로 나타난 지배의 비석이라는 특이한 키워드와 보스를 토벌하면 급격히 게이트가 약화되는 특이점이야말로 이번 대격변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눈치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부터 협회가 언론을 닫아버렸으니까. “능력자 실종은 이제 확실합니다. 서초구까지 탐지 범위를 늘려도 고위 능력자는 잡히지 않아요.” “……그런가.” 송파구는 강남 바로 옆이었기에 다른 지역에 비해 느끼는 위기감이 어마어마했다. 실종 사건의 핵심이 협회장 정혁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린 쪽도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45분 내부 징계가 시작되었다고 하는군요.” “……그 미친놈은 이런 시국에 무슨 짓이야.” “강서구와 관련된 문제로 짐작됩니다.” “생각해보니 그쪽도 신흥강자였군. 경계할 놈들 투성이야. 젠장.” “1차 대격변 때와는 다르게 전 인류가 단결하는 느낌이 없어서 씁쓸합니다.” “……룰이 바뀌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적응할 수밖에.” 아마 조주현급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눈치챘을 터였다. 이번 대격변은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같은 인간도 조심해야 한다는 걸. “우선은 협회장부터 견제해야 해. 강남구 쪽 계속 주시하면서 경계 인원 늘려. 레이드 멤버들도 조금만 휴식한 다음에 교대해주고.” “예!” 해주팀을 제외한 모든 길드원들이 전선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대장님! 해주 끝났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너희도 조금만 휴식하고 전선 투입해.” “예!” 드디어 송파구의 마지막 유물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저주받았던 왕관이라……. 허허.” 확신했다. 진정한 송파구의 평정이 끝났으니까. 이 유물을 집는 것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떠오를 터였다. “크흐.” 예상은 적중했다. 새로운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송파구 게이트의 진정한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지배 권한이 해금됩니다.] [특수 권한이 해금됩니다.] …… 영문 모를 메시지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조주현은 이를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오랜만일세. 조주현.” “……정혁수.”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자네를 위해 퀴퀴하기 짝이 없는 지하철까지 이용했네. 상대가 조주현이라면 이 정도 품은 들여야겠지.” “……하. 이제 와서 인류를 저버릴 셈이냐.” SSS급과 SSS급의 대면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SSS급 중에서도 최강자였고, 기습자였다. 조주현의 몸은 진작부터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딴 건 관심 없네. 잘 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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